문이 부서지는 수준의 커다란 소음이 머리를 아프게 했다.
“애리얼!”
익숙한 음성이 날카롭게 귓전을 파고들었다.
두통이 삽시에 심해졌다. 애리얼은 휘청거리며 바닥을 짚었다. 다리의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떨어진 휴대폰은 주울 생각도 들지 않았다.
뚜벅거리며 다가오는 구두 굽 소리가 점점 커졌다. 과거의 소리인지 현재의 소리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심장이 엉망으로 뛰었다. 정신이 깜박깜박 흐려졌다 명료해지길 반복했다.
“애리얼?”
아까부터 뇌를 울리는 기억 속의 음성이 바로 머리 위에서 들렸다.
애리얼은 바닥을 짚은 손에 힘을 줬다. 머리가 계속 웅웅 울리고 팔이 떨렸다.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리자 스카이라가 보였다. 커다랗게 확장된 눈, 놀라 벌어진 입. 그는 기억과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스카이라…….”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상체를 숙이며 그녀를 향해 걱정이 가득 담긴 손길을 뻗어 왔다. 당장이라도 바닥에 고꾸라질 것 같은 그녀의 어깨를 감고 부축했다.
“어디 아파?”
“스카이라.”
연거푸 제 이름을 불린 스카이라가 의아해하며 애리얼을 살폈다. 이럴 애가 아닌데. 딱 그런 표정이었다.
애리얼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창백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혼미해지는 정신을 붙들고서, 기억 속의 그를 떠올리며 물었다.
“너, 예전에 나랑 만난 적 있어……?”
“예전이면 언제?”
“몰라, 모르겠어. 아무 때라도 나 만난 적 있어?”
“언제 적을 말하는 거야? 아카데미 입학 전에 백작저에서 본 게 처음이잖아. 비 오던 날.”
둘의 첫 만남. 애리얼도 알고 있는 시작점. 빙의하고서 일주일 후.
그게 처음이다.
“그런데 왜…….”
이 기억은 뭘까. 애리얼은 이마를 감싸 쥐고서 비틀거렸다.
스카이라가 애리얼의 어깨를 당기고 제 품에 머리를 기대게 했다.
“일단 보건실부터 가자.”
“잠시……. 잠깐만, 바닥에…….”
애리얼은 그를 밀어내며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을 집었다. 그 순간, 머리를 칼로 쑤시는 듯한 오싹한 감각이 들었다. 끝없이 추락하는 기분, 악몽의 구렁텅이에 처박힌 듯한 절망감. 형용할 수 없는 부정적인 감정들이 온몸을 휘감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전된 듯 떨렸다. 혼몽하던 정신이 번쩍 뜨였다.
“어차피 돌아갈 수 없는데, 그냥 여기서 살아.”
스카이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환청, 혹은 기억 속의 음성.
그 목소리가 강렬한 거부감을 불러왔다. 엉망진창으로 망가지고 뒤엉킨 감정이 확 끼쳐 들었다. 있지도 않은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것 같았다. 무의식 깊은 곳에 잠재한 악몽이 강제로 끄집어내지는 감각이 구역감을 일으켰다.
이건 있었던 일이다. 있었던 과거다.
……실패한 과거였다.
과거의 그녀는 이 세계를 탈출하지 못하고 스카이라에게 붙들려 있었다.
그게 떠오른 단편적인 기억의 마지막이었다.
머리가 참을 수 없게 지끈거린다.
“너, 괜찮아?”
스카이라가 멍하니 쭈그리고 앉은 애리얼의 어깨를 붙잡았다.
애리얼은 소스라치며 스카이라의 손을 뿌리쳤다. 처참했던 결말에는 그가 함께하고 있었기에. 그녀는 실패의 트라우마를 건드려진 것처럼 발작적으로 그를 쳐 냈다.
스카이라는 크게 당황한 얼굴로 물러났다. 그의 파란 눈동자가 크게 떨리고 있었다. 이토록 명확한 애리얼의 거부는 처음이었다.
“……애리얼?”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해명이라도 해 달라는 듯이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그녀는 갑작스럽게 떠오른 기억에 판단이 흐려져 공포에 사로잡힌 상태였다. 괴물이라도 본 듯이 뒷걸음질을 쳤다.
“애리얼, 왜 그래?”
스카이라가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이리 와서 잡으라는 듯이.
하지만 애리얼은 그의 손에서 실패한 과거를 보았다. 잡으면 그대로 이 세계에 묶이고 말 것 같았다. 온전하지 않은 기억이 한없이 좋지 않은 쪽으로만 발전하여 큰 두려움을 일으켰다.
지금은 공략 대상 중 그 누구와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벗어나 숨고 싶었다.
“죄, 죄송…… 죄송합니다.”
애리얼은 더듬거리며 사과를 꺼내더니 몸을 돌리고 황급히 뛰어갔다. 스카이라의 반대쪽으로 무작정 달렸다.
저런 모습의 애리얼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대개 차분했고, 심각한 상황에서도 언제나 최소한의 이성은 유지했다. 솔렘의 시험에서조차 저렇게 지배적인 공포에 사로잡힌 모습은 보이지 않았었다.
그런데 오늘은 왜 저러는가.
너무나 생소한 그녀의 모습에 스카이라는 혼이 빠진 얼굴로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았다. 여태껏 겪어 본 적 없던 충격적일 정도의 거부였다. 가슴에 비수가 꽂힌 듯하다. 이런 거부가 계속된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도망치는 그녀의 모습에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왜 도망치는 거야? 내가 뭘 했다고?’
그는 억울했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미리 시간표를 확인하고 교육실에 먼저 와 있었던 게 그리도 소름 끼쳤나? 잠시 생각했으나, 곧장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이전 학기에도 그는 애리얼의 수업을 따라다녔다. 이미 그걸 겪은 애리얼이 새삼스럽게 저런 반응을 보일 리가 없었다.
‘그것도 저런, 괴물이라도 만난 듯한 반응이라니…….’
입 안 가득 쓴 물을 마신 듯하다. 그는 입꼬리를 비틀며 입술을 깨물었다. 앞니에 세게 깨물린 얇은 살결이 찢어져 피가 비쳤다.
이대로 놓칠 수는 없다.
스카이라는 복도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무서운 기세로 애리얼의 뒤를 쫓았다. 도망치는 그녀를 보자 이상한 본능이 자극당했다. 두려움, 분노, 애증. 텁텁한 감정이 급격하게 끓어올랐다. 어디도 가지 못하게 잡아 두어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뜀박질 소리가 복도를 가득 채웠다. 애리얼은 정신없이 뛰어갔다. 계단을 내려가고 1관을 빠져나가 외진 길로 무작정 달렸다. 몇 번이나 넘어질 뻔하며 온 힘을 다해서 다리를 움직였다. 거친 호흡에 긁힌 목구멍이 따가워졌다. 입 안에 피 맛이 돌았다.
뒤에서 스카이라가 쫓아오고 있었다.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애리얼은 잠깐 보았던 실패의 기억 탓에 반쯤 정신이 빠져 있었다. 지금만큼은 그 기억과 연관되어 있는 스카이라를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친 다리는 더 속력을 내지 못하고 느려졌다. 유약한 몸이 한계를 외쳤다. 스르르 힘이 풀려 고꾸라질 것 같을 때쯤, 그녀의 시야로 벽돌로 된 별관의 외벽이 들어왔다.
저기에 숨을 수 있을까.
잠시 멈칫한 사이 그녀는 허리를 확 잡혀서 건물의 뒤쪽으로 끌려갔다. 달리느라 체력 대부분을 소모한 애리얼은 제대로 된 저항 한번 하지 못했다. 힘 빠진 고개를 겨우 들어 저를 붙잡은 이의 얼굴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흐릿한 시야에 흰 교복과 붉은 머리칼이 잡혔다. 그걸로도 누구인지 신원을 파악할 수 있었다.
“렉스 선배…….”
불규칙한 호흡 사이로 자주 부르던 그의 호칭을 말했다.
렉시우스는 그녀가 발음하는 제 이름에 미소를 지으며 애리얼을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그녀의 모습을 눈에 담고는 표정을 굳혔다. 혼몽하여 초점이 없는 검은 눈동자, 식은땀에 젖은 백지장 같은 얼굴, 색색 가쁘게 뱉어지는 호흡. 애리얼의 상태는 금방이라도 기절할 사람처럼 연약해 보였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애리얼, 너 어디 안 좋아?”
그는 걱정으로 어쩔 줄을 모르는 눈빛을 하고서 애리얼의 허리를 강하게 붙들었다. 혹시나 휘청이다 넘어지지 않도록.
허리를 감아 오는 팔심에 애리얼이 바르작거렸다. 고개를 저으며 그를 밀어냈다. 병아리만도 못한 힘이었다.
“괜찮아요. 잠시만 쉬면 돼요.”
“이 지경이 돼서도 나한테 하는 말이 그게 다야?”
렉시우스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평소와 다르게 성질을 부리지는 않았다. 어제 그녀의 룸메이트가 벌인 일 때문에 꽤 심통이 나 있었는데도 말이다. 솔직히 제 성격대로 굴기엔 애리얼의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았다.
그녀의 무릎 아래에 팔을 받치고 단단히 안아 올렸다. 가녀린 체구가 품으로 쏙 들어왔다. 생각보다도 더 가벼운 무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몸집으로 어떻게 걸어 다니는 걸까.
“내려 주세…….”
“가만히 있어.”
렉시우스는 엄한 말투로 애리얼의 고집을 잘라 냈다. 핏줄이 선 팔뚝이 그녀를 강하게 옥죄어 왔다. 애리얼은 저항할 수 없음을 느끼고 몸에서 힘을 풀었다. 눈앞이 가물가물했다. 그대로 렉시우스에게 안긴 채 이동했다.
그러면서도 애리얼은 두고 온 스카이라를 생각했다. 그에게 미안하면서도, 기억 속에 나타났던 그가 두려워 만나고 싶지 않았다. 실패와 연결된 기억 속에서마저 스카이라는 애리얼을 향한 애절함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그냥 여기서 살아.”
하고 말하던 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애리얼은 그와 관련된 기억을 더 떠올려 보려고 노력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째서 실패했는지. 알고 싶었다. 알고서 예방하고 싶었다. 다시는 실패하지 않도록.
그러나 그녀의 기억은 떠올리려고 할수록 늪처럼 깊은 무의식으로 침전했다. 아주 짧은 장면이나 작은 목소리만 잠깐 떠올랐다 사라졌다. 안개가 자욱한 밤, 희미하게 깜박이는 별의 잔상을 좇는 것 같았다.
명확하게 기억하는 건 끝이 최악이었다는 사실뿐.
***
별관의 뒤쪽에 있던 두 사람의 인영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애리얼을 안은 렉시우스가 순간 이동을 썼다.
스카이라는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다가 악 소리를 지르며 고개를 젖혔다.
미치게 분하다. 분해서 돌 것 같다.
그런데도 그는 애리얼을 억지로 붙잡지 않았다. 둘이 마주치는 걸 처음부터 다 보고 있었으면서, 일부러 끼어들지 않았다. 애리얼이 너무 힘겨워 보여서. 그래서 억지로 참고 있었다. 더 시달리게 하지 말고 쉬게 해 줘야지 싶었다. 그 일념으로 렉시우스가 애리얼을 안아 드는 같잖은 장면을 감내했다. 렉시우스의 팔을 잘라 내고 싶은 걸 참았다.
그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서 씨근거리는 호흡을 뱉어 냈다.
간접적으로 실연을 당한 심장이 아픔을 호소하며 펄떡거렸다. 각오한 것보다도 훨씬 분하고 고통스러웠다. 각혈이라도 할 것 같았다. 성질을 죽이느라 깨문 아랫입술이 길게 찢어져 피를 질질 흘리고 있었다.
빼앗기고 싶지 않은데. 소유욕을 부리면 애리얼이 저를 괴물처럼 볼까. 스카이라는 조금 전에 보았던 그녀의 눈빛이 도무지 잊히질 않았다. 그런 눈빛을 한 번 더 받으면 그대로 무너져 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가지고 싶어. 극단적인 방법을 써서라도.’
스카이라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심해처럼 어둑하게 잠긴 두 눈이 안광을 번뜩였다.
아직은 괜찮다. 한 번 정도는 더 참을 수 있었다.
인내심을 끌어올린 그는 피로 물든 입술을 대충 손등으로 닦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