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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60)화 (160/264)

렉시우스는 지쳐 잠든 애리얼을 제1 기숙사로 데려갔다. 그녀를 병실에 눕힌 뒤 의사를 불렀다. 진찰 결과 다행히 단순 스트레스성 반응이고 크게 아픈 데는 없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푹 쉬게만 하면 금세 괜찮아질 거라고 했다.

‘그런데도 왜 안심이 안 될까.’

그는 심란한 얼굴로 잠든 애리얼을 살폈다. 그러다가 문득 그녀의 왼쪽 손목이 비어 있다는 걸 포착했다. 늘 느껴지던 불길한 데본시아의 마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애리얼이 마력의 흐름을 막던 브레이슬릿이 사라졌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는 애리얼의 왼 손목을 당겨 와 쥐고서 찬찬히 살펴보았다. 손목은 매끈하고 희었다. 브레이슬릿에 눌린 자국도 없었다. 적어도 하루 이틀 전에 떨어진 건 아니다. 며칠은 지났다는 뜻이다.

렉시우스는 애리얼의 팔을 다시 침대 위로 되돌려 놓았다. 그녀에게서 그녀의 마력 외에 다른 이의 마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은 데본시아가 수를 쓰지 않았다.

그는 곧장 호출 벨을 눌러 보좌관을 불렀다. 메튼을 통해 그간 아카데미에서 있었던 일들을 보고받았다.

공개 시험에서 있었던 일, 그리고 그에 이어진 조치와 애리얼의 처분 등. 대충 알고 있었던 일들의 자세한 전말을 들었다.

“황제 폐하께서 얼마나 버티실 것 같지?”

“길어도 일 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내년이면 제국의 정점이 바뀐다는 소리로군.”

“대부분 황태자 전하께 돌아선 참이라 정계도 생각보다 어지러운 상태는 아닙니다. 오히려 무서울 정도로 정연합니다.”

“데본시아가 생각 이상으로 유능했던 모양이네.”

“차라리 잘된 일입니다. 샤펠 공작가마저 황태자비 자리에서 물러난 상황입니다. 이제 황태자파의 최고 기반은 대공자 저하십니다. 정계고 사교계고 모두 저하께서 제국의 두 번째 가는 최심부 권력이 되시리라고 전망합니다.”

“그래? 기어코 샤펠을 쫓아냈어?”

“네. 제1 기숙사 동에 침입한 왕녀에게 공갈 협박을 사주한 뒷배로 지목당하는 바람에 그대로 황태자비 내정자에서 도려내지게 되었습니다. 샤펠 공작가에서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샤펠 공녀도 생각보다 간이 작네. 나한테 바락바락 대들기에 조금은 더 질척거릴 줄 알았더니.”

“……알고 계셨습니까?”

메튼이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렉시우스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낮게 웃었다.

“황태자가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지. 허를 찔렸어. 내가 파 놓은 함정까지 이용할 줄이야.”

귀찮으라고 왕녀를 붙여 뒀더니, 그 왕녀의 성격을 이용해서 제 약혼녀까지 솎아 낼 줄은 몰랐다. 난놈은 난놈이었다. 그러면 이쪽도 다음 수를 쓸 수밖에.

“대공비께는 연락드렸나?”

“네. 준비는 마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직 확신은 없으신 듯합니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평생 혼자 살다가 뒈질 테니 그렇게 아시라고 해. 그러면 알아들으시겠지.”

렉시우스의 돌발적인 발언에 메튼은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진심이십니까?”

“진심이 아닐 건 또 뭐야.”

렉시우스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장난스러운 투였으나, 메튼은 알았다. 그가 절대 장난으로 저런 말을 꺼낸 게 아니라는 사실을.

메튼은 곧장 병실을 나가 부리나케 전화를 걸었다.

-그래, 대공자가 뭐라 했나?

“이번 기회가 아니면 평생 독신으로 사시겠다고 합니다.”

-뭐!!!

대공비가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커다랗게 외쳤다.

-그 미친놈이 기어코 제국 법을 어긴 범법자로 자폭하겠다는 것이냐!

“정확히는 이 일이 실패하시면 그러시겠다는 겁니다만…….”

-아니, 그러면 내가 그런 협박을…… 기어코 그런 소리를 그 공녀한테 해야 하는 것이더냐?

“협박보다는 회유책이라 생각하심이 어떻습니까?”

-내가 말주변이 별로다. 협박이 될 것 같구나…….

대공비의 힘없는 목소리를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메튼은 앞으로 일이 어떻게 될 것인가, 감히 상상하기도 두려워서 눈을 감았다. 어찌 되었든 자신은 주군의 명을 따를 뿐이었다.

***

애리얼은 익숙한 공간에서 눈을 떴다. 한동안 신세를 진 적 있었던 제1 기숙사의 병실이다. 느릿느릿 상체를 일으켜 주변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녀는 병실을 차지한 호화로운 기재들을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하아…….”

“안녕, 잘 잤어?”

익숙한 음성이 귀에 꽂혔다. 애리얼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리고 그와 마주했다.

의자에 앉은 렉시우스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황금색 눈동자가 보기 좋게 휘어져서 미소를 보냈다.

애리얼은 공손하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대공자 저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기절하기 전에는 렉스 선배라더니.”

“죄송합니다.”

“일부러 거리를 두려는 거면 사과보다는 시원하게 욕이나 하지.”

렉시우스가 등받이에 한쪽 팔을 걸고 다리를 꼬며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비웃는 듯한 얼굴로 오만하게 애리얼을 응시했다. 일부러 신경을 거슬리게 하려는 듯, 그는 한껏 방만한 자세를 취해 보였다.

“어때? 욕 좀 해 줄래?”

“죄송합니다.”

애리얼은 조금 당황했으나 흔들리지 않고 대답했다. 렉시우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비죽 올라갔던 입꼬리가 아래로 떨어졌다. 심통이 난 것 같은 얼굴을 하다가 꼰 다리를 풀었다. 어린애처럼 구나 싶더니 표정을 바꾸었다. 슬쩍 미소를 짓더니, 상체를 확 숙이고는 애리얼에게로 얼굴을 들이댔다.

놀란 애리얼이 몸을 물리자, 렉시우스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나랑 결혼할래?”

“……죄, 죄송합니다.”

몹시 당황했으나 애리얼은 어떻게든 대답을 해냈다. 아마 장난으로 던지는 소리일 것이다. 장난이 아닌 것 같았으나,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너무 빠른가? 친구부터 시작할까?”

“아, 그게…… 죄송합니다.”

“친구도 싫어? 아예 처음 만난 걸로 치고, 인사나 할까? 우리 첫 만남이 좀 별로였잖아. 난 그것도 좋았지만.”

“죄송……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무슨 고장 난 전축 같네.”

“…….”

“아무튼 대충 친구부터 시작하면 되지?”

“이제 그만해, 선배.”

그의 일방적인 요구에 끝내 애리얼이 반말로 내뱉었다.

렉시우스가 얄밉게도 입꼬리를 씩 올리며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의도대로 끌려가고 있음을 알면서도 애리얼은 그에게 맞출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여기서 나가고 봐야 할 것이 아닌가. 렉시우스의 기분을 맞춰 주지 않으면 계속 병실에 갇혀 있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무렴 구금을 직접 집행한 작자가 아니던가.

“원하는 게 뭐야?”

“들어주게?”

“들어 보고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승전식에도 못 와 주는 네가 할 수 있는 게 뭔데?”

그의 말에 애리얼의 입이 꾹 다물렸다. 할 말이 없었다. 공략을 생각하고 일부러 한 일이었다. 그에겐 못 할 짓이 맞았다.

“솔직히 나, 진짜 상처받았거든. 전쟁에 갔다 왔는데, 얼굴 한번 안 봐 줘?”

렉시우스는 여전히 애리얼의 손을 놓아주지 않은 채 하소연했다. 별로 울상을 지은 건 아닌데, 말로써 계속 상처받았다 상처받았다 언급했다. 그녀의 양심을 쿡쿡 건드렸다.

애리얼이 오히려 울상을 하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 일은 미안해.”

“정말 미안하긴 해?”

“……응. 진심이야. 내가 너무했어.”

렉시우스는 애리얼의 손을 조물거리며 침대 난간에 턱을 괴었다. 더 말해 보라는 듯이.

그래서 애리얼은 그의 요구대로 그가 원할 말을 꺼냈다.

“뭐 하면 기분이 좀 풀릴 거 같아?”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선배, 제발…….”

“정 그러면, 여름 휴학기 때 우리 집에 오든지.”

그가 넌지시 요구를 흘렸다.

애리얼은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그의 요구가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대공저에 오라고?”

“올 거지?”

그가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지 않으면 끄덕일 때까지 요구할 듯한 악착같은 구석이 보이는 태도로.

애리얼은 당황한 얼굴로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여름 휴학기 때 말이지? 알았어. 갈게. 초대해 줘서 고, 고마워.”

“그래. 기다리고 있을게.”

그가 능청스럽게 웃었다. 그제야 애리얼의 손목을 놓아주며 한껏 밀착했던 상체를 물리고 앉았다. 승리자의 여유였다.

그렇게 다소 찝찝한 요구에 응한 후에야 애리얼은 제3 기숙사 동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녀가 제1 기숙사에서나 이용하는 세단에서 내리자 주변이 웅성거렸다. 기숙사 학생들의 시선이 썰물처럼 몰려들었다가 그녀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에 밀물처럼 빠져나갔다. 저들끼리 수군수군 뒷말을 늘어놓았다.

애리얼은 그들을 적당히 무시하고 지나갔다. 주변에 신경을 쏟기엔 이미 겪은 일이 많았다.

당장 렉시우스의 요구가 무슨 의미인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병실에서 나오지 못할까 봐 일단 수락하긴 했지만, 불안하다.

‘휴학기니까, 어쨌든 당장은 아니야.’

대비할 시간은 있었다. 발을 들인 곳이 적당한 구렁이라면 혼자 올라올 수도 있을 것이다. 부디 큰 함정에 빠진 것만은 아니길 바랐다.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층계를 올랐다.

웅성거리는 여럿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높게 웃는 소리도 들려왔다. 웬일로 늘 조용하던 4층이 시끄러웠다. 방으로 향하는 복도에 사람이 몰려 있는 것이 보였다.

애리얼은 사람으로 복작거리는 복도를 불안하게 주시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생일 축하해, 멜로르!”

누군가가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물이 촤악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낄낄거리는 비열한 웃음소리가 난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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