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리얼은 충격에 얼어붙었다.
물소리와 비웃음 소리. 적나라한 따돌림의 현장.
그들이 조소하고 조롱하는 그 이름은 ‘멜로르’였다. 자신과 함께 방을 쓰는 룸메이트의 이름. 휘아킨이 위장용으로 쓰는 가명.
“블랑셰……?”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시끄러운 소음에 그녀의 목소리는 나아가지 못했다.
군중의 한가운데서 시작된 비웃음이 점차 전염되듯 퍼져 나갔다. 대부분은 동조하며 웃어 젖혔고, 몇몇은 눈치를 보다가 슬금슬금 물러났다.
이 질 나쁜 광경은 무언가. 애리얼은 불쾌함이 솟구쳤다. 화가 나서 앞에 모여든 무리를 헤치고 그 중심으로 나아갔다. 밀려난 이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돌아보다가 애리얼의 얼굴을 보고서 굳어 버렸다. 특별 감시 대상. 엮여서 좋을 게 없는 인물이었다. 상황 파악을 마친 학생들은 입을 다물고 한 발 두 발 물러나 길을 터 줬다.
그러는 동안에도 수준 떨어지는 괴롭힘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저런, 멜로르. 방어술을 잊은 거야? 그럼 정화 마법이라도 써.”
“그 간단한 것도 못 하나 봐.”
“하긴 할 줄 알았으면 저러고 있겠어?”
“아예 잊어버린 것 같은데?”
“첫 학기에 배우는 걸 벌써 잊었다고? 뇌에 종양이라도 자라니?”
“어머, 병원부터 가보라고 해.”
“병원은 벌써 예전에 갔다 왔겠지. 마저증이잖아.”
“아……. 그러면 그냥 지능이 떨어지는 거?”
아하, 소리를 내고는 박수를 친다. 동그랗게 원을 이루며 모인 이들이 저마다 배를 잡고 깔깔, 과장된 웃음을 지었다. 그것도 사람의 아픈 점을 잡아서 모멸적인 언사의 재료로 썼다. 저급하고 치졸했다.
이따위로 사람을 모욕하다니.
극도로 분노한 애리얼은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무리의 중심으로 뛰어들었다.
“뭐야, 누구…….”
주동자로 보이는 학생이 짜증이 난 얼굴로 입을 열다가 그대로 굳었다.
애리얼의 등장에 난잡하던 분위기가 단박에 잡혔다. 얼음물이 끼얹어진 것처럼 복도가 조용해졌다.
짜 맞춘 듯 권력에 굴복한 비열한 침묵 속에, 애리얼은 입술을 깨물었다. 물에 젖은 복도 바닥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냥 물도 아니고 악취가 풍기는 구정물이었다. 그리고 그 바닥을 딛고 선 긴 은발의 학생, 블랑셰. 아니, 휘아킨이 보였다. 그는 전신에 물기가 흥건했다. 흰 블라우스는 얼룩덜룩하게 물들었고, 치맛단에서부터 뚝뚝,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끊기지 않고 들렸다.
휘아킨이 스치듯 말했던 괴롭힘의 현장이었다. 그가 대충 넘겼던 것과 달리 심각했다. 적당히 장난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갈 수준이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덤덤한 표정으로 애리얼과 마주했다.
“선배님.”
“미안해.”
“네?”
갑작스러운 애리얼의 사과에 휘아킨이 의아해했다.
애리얼은 그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를 등 뒤에 두고서 비열한 무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이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것 같지도 않은 인간들마저 몇몇 보였다. 여학생 기숙사임에도 고개를 디민 남학생들과 후작가 자제인 제2 기숙사 동의 학생 몇.
“이러려고 아카데미에 다니십니까?”
애리얼이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로 추궁했다.
안 그래도 얼어 있던 분위기가 쩌적 갈라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경직되었다.
그녀의 추궁에 그 어떤 반박도 돌아오지 않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입꼬리를 올리고서 킬킬거리던 이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 있었다. 양심에 찔려서가 아니었다. 그저 애리얼의 위치를 알고 있기에, 그녀의 뒤에 선 권력의 강대함을 알기에, 일시적으로 고개를 숙인 것이다. 미세하게 찡그려진 미간이나 귀찮은 듯 사선으로 돌아간 눈동자가 이를 뒷받침했다.
여기서 그들의 비양심적인 행동을 쏘아붙이고 지적한들 듣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말로 될 거였다면 이 지경까지 일을 저지르지는 않았겠지. 그러니 그녀가 나서도 휘아킨을 향한 괴롭힘이 사라질 일은 없을 것이다. 교묘히 장소만 바꿔 눈이 없는 곳에서 괴롭힘을 이어갈 게 뻔했다.
애리얼은 구태여 화를 낼 의욕도 사라졌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말이 아니었다.
“제가 특별 감시 대상이기 이전에 황태자 전하를 추천인으로 두고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다는 건 아시겠죠?”
술렁거리는 이들 사이, 당연히 안다는 듯 심드렁한 표정을 지은 면면들이 보였다. 애리얼은 거기에다 대고 그들이 잊고 있었을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제 룸메이트인 멜로르 공녀도 황태자 전하를 추천인으로 두었다는 걸 아시길 바랍니다.”
비록 스카이라에게서 애리얼의 추천인 자리를 빼앗기 위해 한 조처였으나, 어쨌건 효력이 있는 사실이었다.
물론 데본시아가 블랑셰 멜로르를 보호하고자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바쁜 인물이었다. 여기까지 신경 쓸 여력은 없다. 그럴 자비도 없는 인물이고. 어지간히 심하지 않고서야 보좌관이 대신 나서서 적당히 하라는 공문만 보내고 끝일 거다.
하지만 애리얼이 언급하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그녀는 특별 감시 대상으로 그녀에게는 언제나 황성의 감시 인력이 붙어 있었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과 교우 관계를 살폈다. 지금까지는 그녀에게 이렇다 할 교우 관계가 없었으나,
“저는 블랑셰에게 무도하게 구는 무리를 간과할 생각이 없어요.”
애리얼은 멜로르 공녀를 친근하게 이름으로 칭하며 친분을 드러냈다. 이제 감시 인력의 감시 범위 안에 멜로르 공녀도 들어갈 가능성이 커졌다. 그 말인즉슨, 앞으로 멜로르 공녀를 건드리면 황성에 보고가 올라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녀의 돌발적인 언사에 내내 무심한 표정이던 휘아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른 이들도 놀란 얼굴로 그녀를 주목했다.
애리얼은 친분을 과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무리를 향해 경고했다.
“오늘과 같은 일이 재차 반복된다면, 그때는 경고성 발언으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다음부터는 실질적으로 제재를 가하겠다는 발언이었다. 아카데미가 제지하든 말든, 일단 나서고 보겠다는 소리다.
그제야 뻔뻔하던 인간들의 낯빛이 사색이 되었다.
공개 시험에서 과녁을 검게 물들이며 화력을 과시했던 그녀였다. 오죽하면 황성에서도 위험인물로 여기고 따로 감시를 붙였겠는가. 그녀의 마력이 가진 위력은 이곳에 모인 모두가 알았다. 황태자가 나서는 정도가 아니면 쉽사리 막을 수 없는 화력이다.
심지어 아카데미는 제1, 2 기숙사 동의 일이 아니면 잘 나서지 않았다. 어지간한 사고가 터진 게 아니고서야 그녀에게는 제재가 가해지지 않을 것이다.
멜로르에게 괴롭힘을 가했던 것처럼, 그들도 똑같이 당할 수 있었다. 아니, 그보다 더 심한 꼴을 당할 것이다.
겁먹은 주동자가 앞으로 나섰다.
“오해가 있는 거 같은데, 저희는 그런 게 아니라…….”
“앞으로 이런 일이 없으리라 믿겠습니다. 이만 물러나 주세요.”
애리얼의 차가운 음성이 어쭙잖은 변명을 단칼에 끊어 냈다.
자기 비호차 나섰던 남학생은 어물거리다가 입을 다물고 물러났다. 여기서 말을 잘못 꺼냈다간 그 후폭풍을 감당할 수 없을 터였다.
그 남학생을 필두로 모여 있던 무리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썰렁해진 복도에 남은 건 애리얼과 휘아킨뿐이었다. 애리얼은 구정물로 더러워진 복도 바닥을 보다가 몸을 돌렸다. 동그랗게 눈을 뜬 휘아킨과 마주하자 곧장 고개를 푹 숙였다.
“멋대로 말해서 미안해. 널…… 감시에 말려들게 했어.”
“감시라면, 선배님께 붙어 있는 특별 감시 인원 말씀이세요?”
“응. 원래 나만 감시하는데, 방금 내 발언으로 너도 그 감시 대상에 들어갔을 거야. 정말 미안해.”
“아, 그건 괜찮아요. 원래 저도 감시당하는 인원이거든요.”
“감시를 당했다고?”
애리얼이 다급히 고개를 치켜들고서 물었다. 휘아킨은 조금 놀란 듯 흠칫하다가 슬며시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네. 일단은 요주의 편입생이기도 하고, 황성에서도 제가 조금 신경 쓰이긴 하나 봐요. 그러니까 감시 건은 신경 안 쓰셔도 괜찮아요.”
“그랬구나…….”
그 역시도 감시를 당하고 있었다니. 그러면 황성은 그가 저런 일을 당하는 걸 알고서도 줄곧 묵인했던 건가. 애리얼은 충격을 받은 나머지 저도 모르게 표정에 힘을 줬다. 화가 난 듯 인상이 찡그려졌다. 그러자 휘아킨이 그녀의 분노를 달래듯 살가운 미소를 지었다.
“화내지 말아요, 선배님. 전 정말 괜찮으니까.”
우우우웅-
그의 상냥한 음성과 함께 휴대폰이 진동했다.
갑작스럽게 울린 소음에 애리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접근 알림인가, 아니면 호감도 상승 알림인가. 마주한 휘아킨의 잿빛 눈동자에서 시선을 돌리지 못한 채 당혹스러워했다.
휘아킨은 그녀를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조금 노골적일 정도로 오래 눈을 맞추다가 물러났다.
“고마워요.”
그가 경쾌하게 감사를 전했다. 그러더니 휙 몸을 돌리고서는 방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여전히 구정물로 얼룩진 바닥을 벗어나지 못하는 애리얼을 향해 말을 건네며.
“솔직히, 선배님이 이렇게 나설 줄 몰랐어요. 그래서…… 기뻤어요.”
하고픈 이야기를 모두 끝낸 휘아킨은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왼쪽 끝 방. 그는 구정물을 씻어 내기 위해 곧장 욕실로 향했다.
더러워진 바닥을 치우기 위해 하녀들이 소란이 끝난 복도로 걸어왔다. 애리얼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제 방으로 향했다. 미세하게 방문이 열려 있었다. 자신이 올 줄 알고 그가 열어 놓은 것인지.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애리얼은 급하게 방문을 닫아 잠갔다. 조심성 없는 휘아킨의 행동에 그녀의 속만 철렁거렸다. 욕실 쪽을 흘깃 보고는 침대로 가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휘아킨 무하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에게 호감을 느낍니다. 당신에게 먼저 말을 걸기도 합니다.)
▷현재 위치: 아카데미 제3 기숙사 동 - 4층』
연분홍색 테두리의 반쪽짜리 하트가 보였다. 그 역시도 명백한 공략 대상임을 보여 주는 증거.
다만, 휘아킨은 히든 캐릭터로, 호감도가 올라도 특별 엔딩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호감도를 쌓아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도 나쁠 건 없어.’
한 개 반. 이 정도면 괜찮았다. 애리얼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렉시우스의 초대도 여름 방학에 예정되어 있으니 시간적 여유가 있다.
그러니 중요한 건…….
‘……그 기억.’
오늘 교사 동에서 스카이라와 마주했을 때 뇌리를 잠식하던 기억. 지금과 유사했던 과거의 과정. 그리고 좋지 않았던 끝. 실패의 기억.
애리얼은 창백한 낯빛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회귀한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지독한 기시감이 느껴지는 기억을 떠올릴 수 있을 리가 없다. 두통과 함께 떠오른 기억은 현재와 지나치게 유사했다.
‘그렇다면 나는…… 실패를 경험한 뒤 기억을 잃고 똑같은 상황을 되풀이하고 있는 건가?’
그렇게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처음 겪는 일이 아니다.
그러면,
‘지금은 몇 번째지?’
두 번째, 세 번째, 열 번째, 아예 수십 번, 혹은 수백 번.
그 이상일 수도 있다.
애리얼은 다리에 힘이 풀렸다. 오싹한 가정에 아득한 공포가 뒤따랐다. 휘청거리다 침대에 풀썩 주저앉았다. 절망감이 어린 얼굴이 바닥을 향해 떨궈졌다. 그녀는 자신이 망각한 범위를 가늠하는 것이 두려워졌다. 과연 무슨 일을 겪고서 오늘에 도달하게 되었을지. 그 기억이 지나치게 방대할까 봐 무서웠다. 기억을 떠올리는 게 꺼려졌다.
‘차라리 모르고 있었다면…….’
“그래야 안 흔들리고, 목표한 것만 바라볼 수 있지. 응?”
그녀의 안일한 생각에 자연스레 데본시아의 음성이 이어졌다. 무언가 알고 있는 듯하던 그의 말투. 의미심장한 단어들.
그게 경각심을 불러왔다. 공포에 젖어 굳어진 사고를 깨웠다.
“그걸 버리면 네가 날 선택해 줄까?”
실마리가 될지도 모를 과거의 대화가 연달아 떠오른다.
백작저에서 욕실 문을 사이에 두고서 했던 이야기. 그때 보였던 데본시아의 묘하던 태도.
황태자 지위를 버리면 자길 선택해 줄 거냐고, 그는 그런 식으로 말했다. 마치 애리얼의 지난 선택을 알고 있다는 듯이. 이미 겪었다는 것처럼.
애리얼은 표정을 굳혔다. 선득한 감각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의심은 어느새 확신에 가까운 형태로 뇌리를 잠식한다.
‘데본시아는 회귀했고, 회귀 전의 기억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