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62)화 (162/264)

두려움에 떨리던 애리얼의 눈동자가 명료해졌다.

지금까지 그에게서 느꼈던 알 수 없는 기시감, 홀로 지나치게 높았던 호감도. 여태 의문점으로 남았던 것들이 회귀라는 단어 앞에 설명되었다.

데본시아는 이 전에 이루어진 결말을 거부하고서 회귀를 선택했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회귀 전의 기억이 있으며, 분기를 일으키고, 회귀 전을 후회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으니까.

그는 이 모든 일을 한 번, 혹은 수 번에 걸쳐 겪었다. 그리고 그 결론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래서 회귀한 것이다.

애리얼은 그렇게 추측했다.

그렇다면 그는 왜 그 결론에 만족하지 못하고 회귀한 것인가.

“그게 그렇게 소중해?”

데본시아의 차가운 음성, 서늘한 눈빛.

깜빡깜빡, 늪 속에서 건져 올린 기억이 점멸했다.

그녀가 과거라고 느끼는 이 모든 기억의 시발점은 브레이슬릿의 파괴였다. 그게 사라지고 난 후부터 고작 기시감에 불과했던 감각들이 제대로 된 형태를 갖추고 기억으로 나타났다.

이걸 막기 위해 데본시아는 브레이슬릿을 채우려고 했으리라. 정신 제어를 걸어 그녀가 계속 망각 상태에 머무르도록. 또다시 같은 선택을 반복하게 하지 않으려고.

“어차피 돌아갈 수 없는데, 그냥 여기서 살아.”

또 다른 기억의 파편이 머릿속에서 점멸한다.

그녀의 실패를 알리던 스카이라의 목소리. 그건 위로였을까, 아니면 비아냥거림이었을까.

고저 없던 그의 음성이 판단을 어렵게 했다.

좋게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 목소리에 이어진 기억의 감각은 부정의 끝을 달렸다.

애리얼은 제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자신이 특별 엔딩에 실패하고서 본 엔딩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혹시 지금의 자신도 그때와 비슷하게 가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러면 결국 또 실패하고 말 텐데…….

떨리는 손이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선배님.”

손길만큼이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애리얼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샌가 욕실을 나온 휘아킨이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샤워를 마친 은발이 물기를 머금어 촉촉했다.

“어디 아프세요?”

“아, 아냐. 괜찮아.”

“울고 있는 줄 알았어요.”

“그럴 리가……. 그냥 좀 졸려서 그런 거야.”

애리얼은 담담히 미소를 지었다. 생각에 골몰하느라 그가 나온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웅크린 자세가 그에게 우는 모습으로 비친 모양이었다.

“난 정말 괜찮아.”

애리얼은 손사래까지 치면서 그의 걱정을 무마했다.

휘아킨은 여전히 걱정을 지우지 못한 눈빛으로 애리얼을 훑다가 물러났다. 그는 축축하게 젖은 머리칼을 수건으로 적당히 닦아 내며 침대에 앉았다.

“혹시 고민이 있으시면, 저한테 말해도 돼요. 저 입도 무겁고, 경청도 잘하거든요. 해결은 못 해 줘도 듣는 정도는 해 줄 수 있어요.”

그가 무심한 듯 상냥한 배려를 건네 왔다.

애리얼은 조금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살포시 웃었다.

“그럴게. 고마워.”

그렇게 답하자 그의 고개가 모로 기운다.

“지금은 말 안 해 주는 거예요?”

“지금?”

“아니……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휘아킨은 말을 얼버무리더니 침대 위로 풀썩 누웠다. 그는 눈을 감고서 조용히 전했다.

“오늘 고마웠어요, 선배님.”

“나도 고마워. 전에 도와줘서.”

애리얼이 마찬가지로 감사를 전했다. 그러자 그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우우우웅-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애리얼은 움찔 놀라며 시선을 돌렸다. 접근 알림인가? 불안감에 저도 모르게 제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선배님은.”

휘아킨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애리얼은 급히 휴대폰에서 손을 뗐다. 다시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상태로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이상한 사람이에요.”

“…….”

“동시에 좋은 사람이기도 하고요.”

“……어쨌든 칭찬인 거지? 고마워.”

애리얼이 감사를 말하자, 그는 다시 픽 웃었다.

대화는 그걸로 마무리되었다.

휘아킨이 잠든 뒤 애리얼은 욕실로 들어왔다. 휴대폰을 켜자 익숙한 알림이 눈에 들어왔다.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휘아킨 무하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을 강하게 의식합니다. 당신에게 먼저 말을 거는 일이 많아집니다.)

▷현재 위치: 아카데미 제3 기숙사 동 - 4층』

테두리만 있던 하트가 연분홍색으로 가득 차 있었다.

호감도 오르는 속도가 조금 빠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애리얼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휘아킨은 히든 캐릭터이기에 호감도가 어느 정도 올라도 큰 문제는 없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다시 욕실에서 나왔다.

***

그 후로 휘아킨은 기숙사 방에 머무는 시간이 늘었다. 애리얼과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기도 하고, 시답잖은 이야기를 몇십 분씩 말하기도 했다. 함께 로맨스 소설을 읽기도 했다. 그러나 밤이 되면 그는 이전과 같이 기숙사를 비웠다.

애리얼은 아직도 그가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건가 불안했다. 전처럼 물에 흠뻑 젖은 채 오는 일은 없었지만, 그게 괴롭힘이 없어졌다는 증거는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수업에 나가기 전에 넌지시 물었다.

“요즘은 괴롭히는 사람 없어?”

“없어요.”

휘아킨이 침대에 늘어지게 누운 채 답했다. 두 눈은 소설책에 고정하고 있었다. 팔자 좋아 보이는 모습이었다. 정말로 괴롭히는 이는 없는 듯했다.

“그렇구나. 다행이다.”

애리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책을 챙겼다.

휘아킨은 수업을 나가는 일이 적었다. 낮잠을 자거나 책을 보거나 하는 게 다였다. 저러고도 성적이 높다니, 게으른 천재란 저런 건가. 애리얼은 그에게 부러움을 느끼며 기숙사를 나왔다.

금요일의 열차는 평소보다는 덜 붐볐다. 애리얼은 운 좋게 창가에 앉아 시간표를 확인했다.

「금요일

오전 11시 - 예술로서의 술식(특별관, 제1 전시실)

오후 2시 - 마력 재활용(특별관, 제5 전시실)」

‘예술로서의 술식’, ‘마력의 재활용’. 이 두 가지 과목은 마력과 마법을 다루고 있음에도 그 전문성이 애매하여 교양으로 빠진 강의였다. 수업 내용이 상당히 난해하고, 교양치고는 시험 난도가 높았다. 당연하게도 수강하는 인원은 적었다. 그래도 애리얼은 괜찮았다. 시선을 피하고자 넣은 수업이었기 때문이다.

교사 동에 정차하자 학생들이 우르르 빠졌다. 열차 안은 순식간에 한적해졌다. 특별관에 도착했을 때는 애리얼을 포함해 서른 명 정도의 학생들만 남아 있었다.

애리얼은 열차에서 내려 특별관으로 들어갔다. 편입 첫 학기에도 봤던 천마 조각상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때는 렉시우스의 방해로 제대로 된 수업을 듣지 못했었다.

‘설마하니, 이번에도 찾아오지는 않겠지?’

괜스레 불안에 잠겨 걸음이 멈칫거렸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전시실로 향했다.

한동안 휘아킨을 제외한 공략 대상들과는 마주치지 않았다. 주머니 속 휴대폰도 열흘 넘게 잠잠하다. 괜한 걱정으로 치부하며 애리얼은 전시실의 문을 밀고 들어갔다.

널따란 내부, 스무 개나 되는 책상에 비해 매우 적은 수강 인원이 보였다.

애리얼은 벽면에 붙은 4인용 책상에 자리를 잡고 앉아 책을 꺼냈다. 수업 시작까지는 아직 십여 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우우우웅-

휴대폰이 갑작스럽게 진동했다. 애리얼은 심장이 철렁거렸다. 주변이 고요한 탓에 유독 요란하게 들렸다. 그녀가 놀라서 입을 벌린 사이 휴대폰이 한 번 더 진동했다.

우우우웅-

조용히 가라앉은 전시실의 공기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전시실의 그 누구도 소리를 의식하지 못했다.

오로지 그녀에게만 들리는 소음이었다. 그녀만이 알 수 있는 정보였다.

곧 이곳에 들이닥칠 인물이 누구인지는…….

애리얼은 책상 아래로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

『공략 대상이 근처에 있습니다.』

『데본시아 본 엘리오스 르블레탄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현재 위치: 아카데미 특별관 - 1층 복도』

『공략 대상이 근처에 있습니다.』

『렉시우스 크레시앙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에게 강한 애정을 느낍니다. 당신과 함께하는 데 더없는 기쁨을 느낍니다.)

▷현재 위치: 아카데미 특별관 - 1층 복도』

제1 전시실에 근접한 두 사람의 초상화가 보였다. 하필이면 가장 오버히트에 근접한 공략 대상들이었다.

애리얼은 마른침을 삼켰다. 제1 전시실의 출입문은 오직 하나. 이래서야 자리를 피하기도 여의치가 않았다. 문을 나서다가 마주칠 게 뻔했다.

도망칠 길이 보이지 않았다.

물러날 곳이 없는 애리얼은 묵묵하게 책상 앞을 지키고 버텼다. 어차피 호감도만 올리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요주의 2인이 문 앞까지 당도한 것을 확인하고서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조용한 분위기를 가르며 문고리가 돌아갔다. 달칵, 전시실의 유일한 출입구가 열리는 소리였다.

강의실의 몇몇 학생들이 고개를 돌려 보았다가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더니 황급하게 고개를 숙이며 저마다 예를 갖췄다.

등장한 인물의 무게감에 강의실의 공기가 얼어붙는다.

묵직한 존재감이 애리얼이 있는 책상 곁으로 다가왔다. 그 존재감의 주인들이 비어 있는 맞은편 자리의 의자를 뺐다. 모두가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까마득한 지위의 주인, 황태자와 대공자.

왼쪽 의자에는 렉시우스가 털썩 걸터앉았고, 오른쪽 의자에는 데본시아가 소리도 없이 다리를 꼬고 앉았다. 하얀 교복을 입고서 애리얼을 향해 나란히 미소를 지었다.

“안녕.”

“2주 만에 보네, 우리 후배님.”

데본시아와 렉시우스가 차례로 인사를 건네 왔다. 애리얼은 곧장 고개를 푹 숙이고서 대답했다.

“황태자 전하와 대공자 저하를 뵙습니다.”

누구든 절로 거리감을 느낄 경직된 말투였다. 그들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그라졌다. 저마다 못마땅해하는 눈빛으로 애리얼을 응시했다.

그 따가운 시선에도 애리얼의 두 눈은 계속 책상만 향했다.

“뭘 그렇게 숙이고 있어. 내 얼굴 좀 보면 누가 죽이기라도 한대?”

렉시우스가 우스갯소리로 툭 던졌다.

애리얼은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여전히 시선은 아래로 향한 채 고개만 가로저었다.

렉시우스는 미간을 구겼다. 그녀의 반응이 영 시원찮아 못마땅한 듯했다.

“계속 그러고 바닥만 볼 거야?”

짜증이 난 듯한 그의 태도에 애리얼은 마지못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찌푸렸던 미간을 폈다.

“뭐 하러 여기까지 와서 쓸데없는 걸 듣냐.”

“……그냥 궁금해서요.”

“웃기고 있네.”

렉시우스는 그녀의 거짓말을 단박에 간파해 쳐 내고 추궁하는 눈빛을 던졌다.

“누구를 피하려고 이래?”

“사람…… 이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미묘한 대답에 렉시우스가 눈썹을 치켜올리는 사이, 데본시아가 한마디 했다.

“사람이면 우리도 포함인데.”

“…….”

“우리랑 놀기 싫어?”

데본시아의 물음에 애리얼은 이를 깨물었다. 어쩌면 이렇게 사람을 난감하고 처신하기 어렵게 만들까. 그녀는 방긋 웃음 짓는 저 얼굴을 한 대만 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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