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어떻게 감히 높으신 황태자 전하의 옥안에 손을 댈 수 있겠는가.
애리얼은 고개를 저으며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런 것이 아니라…….”
“뺨이라도 갈기고 싶어 하는 표정이네.”
조용히 애리얼을 훑던 렉시우스가 대뜸 말했다. 그녀의 속내를 완벽히 간파한 말이었다. 정말 눈치 하나는 더럽게 빠르다.
“아, 정말?”
데본시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애리얼을 바라보았다. 의외라서 놀란 건지, 뭔지. 묘하게 기대하는 것 같은 표정인 게 꺼림칙했다.
애리얼은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데본시아를 살폈다.
“갈기다니…… 그런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
“칠래?”
“네?”
“치고 싶으면 쳐도 돼. 뭐라고 안 할게.”
“아, 아뇨! 그런 행동은 안 해요!”
다급하게 손사래를 치며 부정하는데, 렉시우스가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끼어들었다.
“내가 대신 패 줄까?”
완전히 진심인 어투였다. 옆자리에 앉은 데본시아가 웃는 얼굴로 살기를 내비쳤다.
“렉스. 네가 하면 반역으로 취급할 거야.”
“그러면 치라는 소리는 왜 해?”
“쳐도 되니까. 너 말고 애리얼이.”
데본시아의 웃는 얼굴이 애리얼을 향했다. 순식간에 살기를 지운 그의 분위기는 온화하기만 했다. 한 대 맞아도 기껍게 웃을 것 같았다.
애리얼은 이 난감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말을 돌렸다.
“……그보다 두 분께선 무슨 용건으로 저를 찾아오셨나요?”
“일단은 이 수업에 관심이 있다는 걸로 해 둘게.”
데본시아가 뻔뻔하게 둘러댔다.
렉시우스는 그 정도 둘러대기도 귀찮은지 아무 말이 없었다. 상체를 젖히고서 금색 눈으로 애리얼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집요한 시선에 애리얼은 고개를 약간 숙였다. 테이블에 펼쳐 놓은 책만 보았다. 둘이 넌지시 던지는 사인들을 무시하느라 벌써 진이 빠졌다. 시선이 따갑다.
못내 불편한 순간이 이어지다가 교수가 등장했다. 전시실로 들어선 교수는 의외의 인물을 둘이나 발견하고는 온몸을 굳혔다. 그러다 이내 뻣뻣한 다리를 옮겨 전시실의 가장 안쪽으로 걸어갔다.
교수는 흑판을 뒤에 두고 서서 짧은 묵례를 하고는 담담하게 수업을 진행했다.
데본시아와 렉시우스는 의자를 비스듬히 돌리고서 수업을 들었다. 그다지 성실한 태도는 아니었다. 애초에 수업을 들으러 온 것이 아니니 당연했다. 그나마 듣는 척이라도 하는 게 가상하다면 가상하다고 해야 할까.
둘 때문에 애리얼만 괜히 눈치가 보였다. 드문드문 노골적으로 시선을 던져 오는 두 고위 계급 탓에 수업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숨을 참으며 고개를 숙였다가 눈가를 문지르고는 다시 정면을 보았다. 하필이면 계속 이쪽을 보고 있었던 듯한 데본시아와 눈이 마주쳤다. 예쁘장한 오드 아이가 부드럽게 휘어지며 웃는다. 나갈까? 그가 소리 없이 입술만 움직여 전했다.
애리얼은 못 본 체하며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렉시우스와 시선이 맞았다. 테이블에 팔을 세워 턱을 괴고 있던 그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나랑 나가자. 그 역시 데본시아처럼 소리 없이 입술만 움직여 전했다.
애리얼은 빠르게 고개를 젓고는 시선을 바닥으로 떨궜다. 이 시간이 얼른 지나가 버리기를 바랐다.
‘두 시간짜리 수업이니까 앞으로…….’
기둥 옆에 세워진 괘종시계를 곁눈질하던 애리얼은 손등에 느껴지는 낯선 촉감에 몸을 굳혔다. 희고 기다란 손가락. 매끈한 손톱이 보이는 검지 끝이 애리얼의 손등을 콕 찌르고 있었다.
애리얼은 그 손가락의 주인에게로 눈을 향했다. 데본시아가 그녀를 향해 살갑게 웃어 주었다. 애리얼은 이도 저도 하지 못한 채 얼어 버렸다. 그와 눈을 마주하는 동안 손등을 누른 그의 손가락이 천천히 아래위로 움직였다. 관심을 조르듯이 부드럽게 피부를 마찰했다.
나하고 같이 가.
그가 조용히 입술을 움직이며 그녀를 채근했다. 느릿느릿 그녀의 손등을 문지르며 조른다. 반복해 일자를 그리는 그의 손끝이 애리얼의 온 신경을 앗아 갔다.
유난히 조용한 전시실. 교수의 말소리마저 희미하게 들렸다.
그녀와 마주한 오드 아이가 예쁘게 반달로 접혔다. 데본시아가 자랑하는 특유의 눈웃음이었다. 시각적 효과에 압도되어 애리얼은 마른침을 삼켰다. 데본시아에게 시선을 빼앗기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사이 심통이 난 누군가에 의해 발끝이 툭 건드려졌다.
애리얼은 움찔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손등에다 턱을 괸 렉시우스와 눈이 마주쳤다. 어느새 미소를 지워 무표정해진 얼굴이 눈썹을 치켰다. 불만이 있어 보였다. 이유는 빤했다. 왜 데본시아에게만 관심을 주느냐는 거겠지.
유치한 이유로 토라진 렉시우스가 애리얼의 구두코에 제 발끝을 맞대고 있다가 슬그머니 방향을 비틀어 뻗었다. 스윽, 구두의 옆면끼리 마찰하며 그의 다리에 애리얼의 복사뼈가 스쳤다. 그 찰나의 접촉에 렉시우스는 눈을 휘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가지런한 치아가 입술 새로 슬쩍 존재감을 드러냈다. 웃는 모습이 양아치가 따로 없다. 데본시아가 우아하다면 그는 위협적이었다.
애리얼이 렉시우스와 시선을 오래 마주하자 이번에는 데본시아가 심통이 났다. 검지로 슬그머니 문지르는 짓을 그만두고 손을 뻗었다. 손바닥을 펴서 그녀의 손등을 지그시 눌러 잡는다.
“애리얼.”
데본시아가 조용히 낮춘 목소리로 속삭였다. 테이블 위에서 그의 손바닥이 선사하는 미적지근한 온기가 그녀의 손등을 완전히 감쌌다.
그 순간, 애리얼은 벌떡 일어났다. 쾅! 급한 동작에 무릎이 테이블에 부딪쳐 큰 소리를 냈다. 검은 눈동자가 곤혹스러워 발발 떨렸다.
전시실의 이목이 모조리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데본시아와 렉시우스도 마찬가지였다. 웃음이 가신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
“무슨 일인가요, 학생?”
교수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애리얼은 곧장 고개부터 숙이고서 말했다.
“갑자기 속이 좋지 않아서……. 수업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급하게 사죄를 전하고 빠른 걸음으로 제1 전시실을 빠져나갔다. 테이블에 부딪친 무릎이 얼얼했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복도를 달리다시피 지나 특별관의 정문으로 직진했다. 그렇게 건물을 나서기 직전에 어깨를 붙들렸다.
“천천히 가.”
묵직한 음성에 걸음을 멈추자 몸이 휙 돌려졌다. 어느새 여기까지 쫓아온 렉시우스와 얼굴을 마주했다.
“너무 빨리 가면 도망치는 거 같아서 화나니까.”
금빛 눈이 싸하게 빛났다. 그의 말투는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애리얼은 난감해하는 얼굴로 그를 마주하다가 손에 얼굴을 묻고서 마른세수를 했다.
“대공자 저하.”
“선배라고 불러.”
“……선배.”
마른세수하던 손을 내리고 렉시우스를 보았다. 그는 애리얼의 눈높이에 맞춰 상체를 조금 기울이고 있었다. 속내를 감춘, 표정이 별로 없는 얼굴이 애리얼과 눈을 맞췄다.
“싫었어?”
“네. 곤란했어요.”
“어, 그래.”
렉시우스는 알겠다는 듯 곧장 답을 내놓았다. 하지만 오늘과 같은 일을 하지 않겠다는 소리는 없었다. 그는 느긋한 기색으로 상체를 세우고 높은 천장을 받치는 흰 기둥에 기대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서는 무심한 눈으로 애리얼을 응시했다.
“올여름에 대공저로 오는 거 잊지 마라.”
무심히 당부한 렉시우스가 척척 걸음을 옮겼다. 누구 하나 잡아먹을 듯한 기세였다. 위협을 느낀 애리얼은 제자리에 선 채 어깨를 움츠렸다. 렉시우스는 개의치 않고 출입문으로 향했다. 그의 팔이 그녀의 어깨에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바닥으로 길게 뻗은 그의 그림자가 보였다.
렉시우스의 기척이 등 뒤로 멀어지자 애리얼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미약한 호흡에 서린 감정은 안도였다.
그러나 찰나의 안도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대로 지나치는 줄 알았던 렉시우스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생각난 게 있는 것처럼 몸을 돌리고 애리얼을 향해 다가와 상체를 숙였다.
갑작스럽게 가까워진 거리에 놀란 애리얼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틀었다. 하지만 그를 마주하기 전에 턱을 잡혔다. 렉시우스의 손에 그녀의 고개는 벽면을 바라보도록 비스듬하게 고정되었다.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선배, 무슨 짓…….”
애리얼은 말을 끝내지 못했다. 그의 입술이 귓가를 스치며 다가와 뺨에 지그시 닿았다. 자늑자늑한 온기가 보드랍게 피부를 눌렀다.
손등에 하는 것과는 달랐다.
애리얼은 저항하지 못했다. 그대로 얼었다. 사고조차 중지되었다.
이대로 시간마저 모조리 멈추는 것은 아닐까. 1초가 아득하게 느껴질 즈음 그가 입술을 뗐다. 곧장 멀어지지 않고 그녀의 턱을 쥔 채 나지막한 호흡을 뱉었다. 묘하게 거칠어진 저음으로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잊지 말고.”
나직하게 내뱉은 그의 말, 한 자 한 자가 애리얼의 뇌리에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낙인과도 같은 고백을 남기고서 렉시우스는 상체를 물렸다. 턱을 쥐었던 그의 손이 떨어져 나가고, 곧이어 그의 기척마저 멀어졌다. 뚜벅뚜벅, 발소리가 천천히 희미해졌다.
렉시우스가 출입문을 빠져나가 완전히 자취를 감출 때까지 그녀는 계속 얼어 있었다. 그러다 저 멀리 다른 전시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수업을 마친 학생 서너 명이 복도로 나왔다. 애리얼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출입문 밖으로 나갔다.
드문드문 지나가는 학생 몇 명이 애리얼을 알아보고 슬쩍 시선을 던졌다.
애리얼은 쫓기듯 걸음을 빨리했다. 특별관 건물을 옆으로 돌아가 인적이 드문 장소를 찾았다. 창문도 없는 건물의 벽면이 긴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그 아래에 서자 굳었던 사고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선배가 내 뺨에…….’
제대로 인식하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느닷없이 접촉을 당했던 뺨이 뒤늦게 화끈거린다.
애리얼은 렉시우스의 입술이 닿았던 곳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당황스럽다가도 부끄럽고, 회피하고픈 욕구가 치밀었다. 이미 주변에는 시선이 없는데도 더 외진 곳으로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손등 말고 다른 데 한 적은 없었는데…….’
다시금 아까의 상황을 상기하자 얼굴이 달아올랐다. 면역이 없는 일이었다. 떨리기도 하고 무섭기도 해서 심장이 진정되질 않았다. 뺨에 닿았던 입맞춤이 오버히트의 방아쇠가 되는 건 아닐까.
애리얼은 괜스레 진동음이 울리지도 않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지이이잉-
절묘한 타이밍에 휴대폰이 울렸다. 그대로 화면에 떠오른 알림을 확인했다.
『공략 대상이 근처에 있습니다.』
“뭘 그렇게 봐?”
이어지는 목소리에 애리얼은 등줄기가 선득해졌다.
아직 휴대폰을 숨기지 못한 채로, 데본시아의 목소리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