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애리얼은 숙인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잠시 고심했다. 머리 위로 시선이 쏟아지는 게 느껴졌다. 데본시아가 휴대폰을 못 봤을 확률은 없었다.
사지가 경직되는가 싶더니 벌벌 떨린다. 절벽 아래로 곤두박질하는 기분이었다. 발밑이 아득했다.
빨리 얼버무리든, 숨기든 해야 했다. 이렇게 시간을 끄는 것도 악수(惡手)였다.
‘차라리 뻔뻔하게 나갈까?’
애리얼은 오래 생각하지 않고 고개를 들었다. 입꼬리만 살짝 끌어 올린 데본시아가 보였다. 그와 눈을 맞추며 태연하게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순간 이동 하신 거예요?”
“어떻게 알았어?”
“주변에 기척이 전혀 없었으니까요.”
“그거 말고는?”
“…….”
“다른 정보가 있었을 것 같은데.”
그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애리얼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식은땀이 흐를 것 같다.
“그런 거 없어요.”
“그래? 왜 난 알 것 같지?”
가늘어진 데본시아의 눈동자가 애리얼의 교복 주머니를 향했다. 그 안에는 방금 그녀가 집어넣은 휴대폰이 들어 있었다.
정곡을 찔린 애리얼은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경직된 눈가가 파르르 경련했다. 데본시아는 분명히 알고 있다. 휴대폰이든 회귀든. 애리얼이 예상하는 그 이상의 정보를, 그는 가지고 있었다.
“황태자 전하.”
“좀 더 친근하게 불러 줘. 그래야 내가 못 할 말까지 다 할 텐데.”
데본시아가 살살 꾀어내는 특유의 어투를 취했다. 그녀가 꺼내려는 대화 주제를 이미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정보가 필요했고 진실을 원했던 애리얼은 그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데본시아.”
“응, 애리얼.”
그가 사르르 눈꼬리를 접으며 황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뺨까지 옅게 달아올라 있다. 애정이 담뿍 묻어나는 그 예쁜 얼굴에서 애리얼은 희미한 광기를 엿보았다.
이 순간을 아주 오래전부터 기다려 온 듯한 기대감 같은 것이 그의 눈에 깃들어 있었다.
위험하다.
본능이 호소했다. 이 사람은 위험해. 그러니까 아무것도 묻지 말고 도망쳐. 경고음을 울렸다.
하지만 몸을 물리려 해도 뒤꿈치가 벽에 막혀 있었다. 그녀에게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어차피 정면 돌파를 해야 할 상황이었다.
애리얼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가 날숨과 함께 입 안에서만 맴돌던 의문을 내뱉었다.
“혹시 전에 저하고 만나신 적 있으신가요?”
“있다고 하면?”
그가 애매하게 말끝을 올렸다. 만난 적 있는 것 같냐고, 반문하는 말투다.
애리얼은 입을 다물었다. 잠시 침묵하며 제 생각을 정리했다. 데본시아의 수를 읽는 건 어려우니, 정보라도 최대한 얻어 가는 게 중요했다. 이미 그는 애리얼이 회귀 전의 기억을 어느 정도 떠올린 것을 알고 있다. 구태여 숨기기보다는 정면으로 맞부딪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비슷한 상황을 반복하는 듯한 기시감이 종종 들어요. 가끔 떠오르는 기억들이…… 아직 겪지 않은 미래의 일 같아서, 혼란스러워요.”
“그래서, 내가 뭘 알려 주길 바라?”
“저는 회귀…… 한 건가요?”
단도직입적인 질문이었다. 잠시 정적이 이어지나 싶더니, 미소만 짓던 그가 미간을 좁히며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걸 나한테 묻는 거야?”
“……전하께서도 회귀하신 거 같아서요.”
“숨기질 않네. 이렇게 나한테 다 말하고 그래도 괜찮아?”
“전하께서는 이미 대부분 눈치채고 계실 테니까요. 제가 어떤 기억을 떠올린 것도, 전하를 의심하고 있는 것도 전부.”
“틀린 추측은 아니야. 근데…….”
그는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웃음기가 조금 가신 얼굴로 말을 끌었다. 애리얼과 눈을 맞춘 채로 고개를 숙여서 다가왔다. 시선이 마주하는 거리가 줄어들자, 애리얼이 경계심을 내비치며 손끝을 말아 쥐었다. 그러자 그는 더 다가오지 않고서 못다 한 말을 완성했다.
“이름으로 불러 주는 쪽이 더 좋을 거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어?”
사근사근한 음성에서 서운함이 느껴졌다.
애리얼은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발음했다.
“……데본시아.”
그 순간, 그의 분위기가 확연하게 달라졌다. 부드럽게 웃음기를 걸치며 입술이 그믐달처럼 휘어졌다. 그가 천천히 상체를 숙이며 고개를 틀었다. 애리얼이 어깨를 움츠리는 사이에 거리를 바싹 좁혔다. 그녀의 뺨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귀에다 속삭였다.
“맞아. 너도, 나도, 이번 일을 처음 겪는 게 아니야.”
밀어(密語)를 전하는 목소리가 녹아내릴 듯 부드럽다. 지금껏 감추어졌던 진실을 아찔하게 확인받는다.
애리얼은 눈을 감고서 심호흡을 했다. 이제 더 중요한 질문을 할 차례다.
“데본시아……. 당신이 이 회귀를 주도한 건가요?”
그가 애리얼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댄 채 작게 웃었다.
“그것까지는 알려 주지 않을 거야.”
미지근한 숨결로 귓바퀴를 간질이며 소곤거렸다. 그러고는 느릿하게 물러나나 싶더니, 애리얼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애리얼이 움찔 놀란 순간에 그녀의 볼에다 제 입을 붙였다. 애리얼의 몸이 바싹 굳었다. 그는 슬그머니 입술을 벌리고 혀를 살짝 빼서 렉시우스의 입술이 닿았던 자리를 뭉근하게 핥아 냈다. 입을 맞추었던 흔적을 닦는 것처럼.
살갗에 닿은 물컹하고 뜨거운 감각에 애리얼이 파들파들 소스라쳤다.
“이게 무슨 짓……!”
데본시아는 바르작대는 그녀를 단단히 붙잡고서 쪽, 핥았던 볼에 입술을 붙였다 뗐다.
“좋아해.”
물러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떨리는 애리얼의 어깨를 천천히 놓아주며.
“렉스보다 훨씬 더.”
어느새 두 눈을 똑바로 맞춘 그가 나른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고했다.
애리얼은 그의 시선, 목소리에 움칠 떨었다. 데본시아의 언행이 머리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뺨에 입을 맞추는 것도 모자라 핥아 내고, 다 보고 있었다는 걸 티 내듯 렉시우스의 이름을 언급하며 애정의 우위를 자랑하고. 나열하기만 해도 혼미해지는 기행으로 질투를 드러냈다.
뒤늦게 그의 입술과 혀가 닿았던 뺨을 닦아 냈다. 촉촉한 감촉이 약간 남아 있다.
그 노골적인 촉감에 애리얼은 얼굴이 달아올랐다. 쿵 추락한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좋아해.”
“사랑해.”
방금 데본시아가 꺼낸 간지러운 고백. 작년, 쇳소리로 내뱉던 음험한 고백. 두 음성이 연달아 떠올랐다.
선두를 달리는 데본시아의 하트 개수는 그녀가 가장 잘 알았다. 그의 고백은 믿기가 어려울지언정 거짓은 아니다. 그래서 입을 열기가 어려웠다. 그에게 도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데본시아는 애리얼의 기겁한 표정을 보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넌, 내가 정말 싫은가 보다.”
자조인지 뭔지. 그는 별로 풀 죽은 기색도 없이 그런 말을 뱉었다.
애리얼은 그가 내린 결론을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공개 시험에서의 일 때문에 데본시아를 꺼리기는 하지만 못 견디게 혐오하는 건 아니었다. 솔렘의 시험을 겪고도 레이신을 그다지 미워하지 않았던 것처럼. 굳이 입을 열어 해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뿐이다. 해명은 오해를 부를 수 있고, 오해는 자칫 그에게 기대감을 느끼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러면 호감도가 상승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애리얼은 입을 다물었다.
데본시아도 말이 없었다. 나긋한 미소만 짓다가 먼저 자리를 떠났다.
벽의 그늘이 드리운 자리에는 애리얼만 남았다. 평화로운 고요가 머리를 명료하게 했다. 그와 대화를 나누며 얻은 정보들이 착착 정리되어 떠올랐다.
저도 데본시아도 회귀를 한 상태다. 그리고 데본시아는 그 기억을 전부 가지고 있다.
하지만 자신은 그 기억을 거의 잃었다. 극히 일부만 기억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어차피 돌아갈 수 없는데, 그냥 여기서 살아.”
선명히 떠오르는 기억의 조각에 애리얼은 눈을 꾹 감았다.
스카이라의 음성. 왜 하필 그게 먼저 떠오른 걸까. 실패와 절망, 최악의 감정이 뒤따르던 그 기억이…….
‘스카이라는 내가 전에 겪은 실패와 관련되어 있나?’
진실의 파편만을 맛본 탓에 자꾸만 의문이 배회한다. 의심과 추측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혹시 스카이라 때문에 실패한 건가? 스카이라가 오버히트를 맞아서……?’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그의 목소리로 인해 비롯된 기억. 그로 인해 유발된 감정이 얼마나 끔찍했는지를 떠올리면, 추측에 무게가 실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애리얼은 그 추측을 곧장 부정하고 싶어졌다.
설마, 아니겠지, 생각하며 그녀는 기껏 떠올린 추측에 스스로 변명을 만들어 냈다.
‘스카이라는 온건한 쪽인데. 아무리 회귀 전이라 해도 스카이라의 성격이 다르진 않을 테고, 극단적인 행동을 벌였을 것 같진 않아. 몇 번이고 도움을 줬었고, 약혼 제안을 하기는 했어도 아직 데본시아나 렉시우스에 비해 호감도도 낮고……?’
머릿속으로 열심히 스카이라를 변호하던 애리얼은 문득 의문을 느꼈다. 왜 그가 실패와 연결되지 않았을 거라는 추측의 근거를 자신이 찾고 있는가. 그냥 위험 요소로 치부하고 밀어내면 그만인데. 왜 굳이 예외를 두려고 하는지.
마치 그가 특별하기라도 한 것처럼.
“아…….”
애리얼은 탄식을 내뱉다가 입을 틀어막았다.
손끝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도리 없이 그에게 흔들리고 있는 자신의 상태를 자각했다. 설렘인지 단순히 의지하고픈 나약함인지. 현재는 구분할 수 없으나 어쨌건 스카이라에게 기울어진 제 마음만은 선명하게 느낀다.
애리얼은 불안에 질린 얼굴로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언제부터일까.
공개 시험에서 그가 저를 보호한 순간부터였나. 아니면 솔렘 공작령에서 등장한 그때였나. 혹은 그 전이었나.
잘은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제 막 움튼 이 감정은, 잘라 내야만 하는 불필요한 것이었다.
특별 엔딩에 도달하기 위해서.
다시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