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리얼은 오후 수업도 집중하지 못했다. 거의 반쯤 정신을 빼고 들었다. 오전에 너무 많은 걸 겪고, 알게 되었다.
회귀, 감정, 애정, 입맞춤, 렉시우스, 데본시아, 스카이라.
복잡하게 얽힌 정보와 거기에서 파생된 생각들이 끊임없이 머리를 괴롭혔다. 수업 내용은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듣는 둥 마는 둥 자리만 지키다가 기숙사로 복귀했다.
방문을 열자 로맨스 소설을 침대맡에 쌓아 두고 누운 휘아킨이 보였다. 자다 일어났는지 나른하게 풀어진 표정이었다. 그는 가늘게 뜬 눈으로 애리얼을 포착하고는 느릿느릿 상체를 일으켰다.
“수업 끝났어요?”
“응. ……혹시 나 때문에 깬 거야?”
“아니에요.”
그가 헝클어진 머리칼을 대강 정리하며 대답했다. 그동안 애리얼은 책상의 책꽂이에다 교재를 꽂아 두고 무너지듯 털썩 침대에 앉았다.
그녀를 좇던 휘아킨의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났다.
“수업이 어려웠어요?”
“응? 아니?”
“그런데 왜 심란한 표정이에요.”
“아……. 내 표정이 그랬어?”
“표정도 그렇고 분위기가 조금. 티 날 정도는 아니고요.”
“티 날 정도가 아닌데 알아봤어?”
“제가 선배님한테 관심이 많아서요.”
그 말에 나름대로 차분하던 애리얼의 표정이 흐트러졌다. 커다래진 눈이 무슨 소리냐는 듯 그를 향했다. 휘아킨은 고개를 기울이더니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그게…….”
“……?”
애리얼은 이어질 그의 해명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운을 떼는 듯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잿빛 눈동자가 이리저리 부유하다가 다시 애리얼에게로 고정되었다.
똑똑똑.
마침 그가 입을 떼려는 순간에 노크 소리가 난입했다. 둘의 시선이 동시에 문을 향하고, 휘아킨이 물었다.
“누구세요?”
약간의 신경질이 섞인 목소리였다.
“황성에서 보낸 시녀입니다. 허클리 공녀님께 황자 저하의 전언을 전하기 위해 왔습니다.”
문밖의 시녀가 매우 차분하게 용건을 전했다.
‘황자 저하’라는 단어에 애리얼은 곧장 침대에서 일어났다. 휘아킨은 이유를 모르게 열받은 얼굴로 문 쪽을 쳐다보았다.
애리얼은 그의 반응이 조금 의아했으나 당장은 황자로부터 온 전언이 더 중요했다. 몇 주 잠잠하던 스카이라가 대관절 무슨 연유로 시녀까지 보낸 건지. 그녀는 휘아킨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문을 열고 나가서 시녀를 마주했다.
“무슨 일인가요?”
힘겹게 용건을 물었다. 목구멍이 꺼끌꺼끌하게 느껴졌다.
“황자 저하께서 공녀님을 황성으로 초대하셨습니다. 정문 앞에 차가 대기하고 있으니 제 안내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짧게 묵례로 말을 마친 시녀가 앞장서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애리얼의 거절을 염두에 두지 않는 단호한 태도였다. 전언조차도 그랬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초대해서 불시에 그녀를 이끌고 갔다.
피할 길이 없다.
애리얼은 그대로 시녀의 뒤를 따라 황성으로 가는 차에 올랐다.
***
데본시아는 정말 끔찍할 정도로 기분을 잡친 상태였다. 그는 오후 일정을 소화하는 내내 말 한마디 없었다. 회의를 진행하는 동안 대신들은 안건의 내용을 읊기보다 황태자의 눈치를 보는 데 급급했다. 중요 회의에서 황태자가 이렇게 조용한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회의는 진전이 없었다.
알맹이 없는 이야기만 겉핥기식으로 오갔다.
황태자의 무표정이 깨어져 매끈하던 미간이 팍 구겨졌을 때는 그것마저 하지 못했다.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침묵으로 가라앉은 회의장에서 데본시아는 불편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애리얼의 볼에 입을 맞추던 렉시우스. 그리고 그 장면보다 더 거슬렸던, 기겁한 얼굴의 애리얼. 그녀의 침묵.
빠각.
데본시아의 손에 쥐어져 있던 결재용 나무 도장이 부러졌다. 대신들의 눈이 일제히 황태자에게로 모였다. 데본시아는 두 동강이 난 도장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는 일어났다.
“오늘은 이걸로 마무리하지.”
황태자의 음성에 대신들이 나란히 일어났다. 오후 회의는 아무런 득도 없이 파했다.
데본시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양쪽에 보좌관과 호위 기사를 데리고서 걸었다. 집무실로 향하기는 하겠으나 잡념이 많아 일을 마무리할 수 있을지 애매했다. 애리얼을 만난 것이 악수가 되었다. 그녀가 부르는 제 이름에 취해 비밀로 해도 될 이야기까지 다 까발렸다.
이제 애리얼이 어떻게 나올까.
그녀에게 말한 진실은 도박수로 작용할 것이다. 회귀라는 사실을 알게 된 애리얼이 자신을 아군으로 여길지, 적으로 여길지. 그녀의 경계심으로 보아 아군으로 여길 확률은 낮겠으나, 그는 그 낮은 확률에라도 기대고 싶었다.
걸음을 재촉하던 그는 복도에서 마주친 광경에 움직임을 뚝 멈추었다.
흑발을 살랑이며 복도를 지나가던 애리얼도 같은 타이밍에 다리를 멈추었다. 그를 보고서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데본시아는 평정이 깨어지려는 걸 애써 숨기며 웃었다. 예상외의 방문이었다. 그는 저 자신이 그녀의 방문 사실을 미처 몰랐다는 것에 화가 났다. 애리얼이 황성에 오면 반드시 자신을 먼저 통하게 하라고 일러뒀을 텐데. 누군가 내통자라도 있는지 정보가 들어오지 않았다.
누가 손을 쓴 것인지.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데본시아는 여유로운 척 부드러운 어조로 물으며 애리얼에게로 걸어갔다. 데본시아가 다가오자 애리얼의 곁을 지키던 시녀가 곧장 서너 걸음 물러났다.
애리얼은 고개를 숙인 채 공손히 답했다.
“황자 저하께서 초대해 주셨습니다.”
황자 저하. 스카이라를 뜻하는 직위에 그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초대? 무슨 이유로?”
“그건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초대를 받자마자 곧장 왔습니다.”
“그랬구나.”
애리얼은 고개를 끄덕이는 척 그대로 바닥으로 시선을 향했다.
데본시아는 침착함을 가장한 그녀의 표정에 서린 미묘한 어색함을 보았다. 오전에 있었던 일 때문에 그와 마주하는 게 껄끄러운 듯했다. 그에게서 가도 좋다는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데본시아는 그녀의 정수리를 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내내 좋지 않았던 기분이 아예 바닥으로 처박혔다.
“고개 들어, 애리얼.”
차갑게 명령했다. 다정함이 유지되지 않았다.
애리얼의 고개가 곧장 들렸다. 평소와는 다른 그의 대응에 놀랐는지 긴장감을 잔뜩 머금은 얼굴이었다.
그 반응마저도 데본시아는 화가 났다.
차라리 막 대하고, 반말하고, 뺨을 때리면 기쁠 것 같았다. 자꾸만 꺼리고 피하며 버릴 것 취급하는 것에 진절머리가 났다.
가만히 저를 바라보고 선 애리얼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가느다란 손목을 쥐자 까만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진다.
울리고 싶을 정도로 가지고 싶은 눈.
데본시아는 애정인지 애증인지 모를 가학심이 솟아오르는 걸 느끼며 그녀를 당겼다. 바르작대며 버티는 애리얼을 억지로 자신의 품에 끌어왔다. 두 팔로 강하게 감아 기어코 움직이지 못하게 옥죄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몸을 온전히 안고 나자 심장이 발작하듯 뛰었다.
때마침 복도로 들어서는 스카이라가 보였다. 그의 청색 눈이 커다랗게 확장되었다.
데본시아는 충격에 물든 제 동생의 얼굴을 보고서 웃었다. 기분이 좋아서 웃는 게 아니었다. 이번에도 결국 제 형제가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 같아서.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자신보다 뭐 하나 잘난 것 없는 한 살 차이의 동생이, 기어코 제게 열등감을 선사하는 것이 화가 나서. 평생 스카이라의 것이었을 열등감을 씁쓰레하게 곱씹으며 제라온을 향해 내뱉었다.
“애리얼 허클리 백작 공녀를 내 황태자비 후보로 승격시킬까?”
데본시아의 품에 갇힌 애리얼이 흠칫 소스라쳤다.
한 걸음 물러나 뒤를 지키던 제라온이 고개를 숙이며 의견을 내놓았다.
“반발이 꽤 있을 것으로 보이나, 당장이라도 가능은 합니다.”
“그래?”
그저 말만 꺼냈을 뿐인데 스카이라의 눈동자가 분노로 형형해진다. 파란 두 눈이 증오심에 불타고 있었다. 품속에 가둔 애리얼은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며 저항했다.
데본시아의 비틀린 입꼬리가 조소를 자아냈다.
반은 만족스럽고 반은 불쾌했다. 이렇게라도 애리얼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이 기뻤고, 이렇게밖에는 소유하지 못해서 화가 났다.
그래도 어쨌든 지금은 애리얼이 제 손안에 있으니까, 나쁘지는 않은가.
“데본시아.”
스카이라의 냉랭한 목소리에 애리얼의 몸이 뻣뻣하게 경직되었다. 데본시아의 가슴팍을 밀어내던 그녀의 손이 달달 떨려 왔다. 스카이라를 향하는 그녀의 반응은 참으로 명확했다. 신뢰를 지키고 싶어 하는 반응. 오해라도 생길까 안절부절못하는 기색. 애리얼은 스카이라를 염려한다.
‘아.’
개 같네.
데본시아는 눈을 가늘게 좁히며 싸늘하게 표정을 굳혔다. 이대로 어디 먼 곳에 가서 애리얼을 가두기라도 할까. 그런 고민이 수차례 그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하지만 결국 지금은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무력으로 찍어 누르는 짓 따위는 언제든지 가능하니까.
데본시아는 들끓는 욕망을 잠재우고서 팔을 풀었다. 억지로 가두었던 새가 한순간에 날아가듯이 애리얼이 그의 품을 벗어났다. 서너 걸음 뒷걸음질을 치더니 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면, 이만 가 보겠습니다.”
빨리 벗어나고 싶어서 초조해하는 것이 다 표가 나는데도 끝까지 예를 갖춘다. 그 행동이 또 데본시아의 심기를 건드렸다. 곤란하게 만들고 싶었다. 동요를 보이고, 화를 내고, 감정을 드러내고, 차라리 뺨을 쳐 줬으면 한다.
“가도 된다고 허락하지 않았어.”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의 희망을 잘라 냈다. 그녀가 동요하는 기색이 제가 있는 곳까지 뻗어 오는 듯했다. 데본시아는 부드럽게 미소를 머금고 다시 애리얼과의 거리를 좁혔다. 이대로 더 곤란하게 만들어서 그녀가 아예 울음을 터트렸으면 했다.
조금만 더 힘들게 만들어서 애리얼이 더는 냉정하게 굴지 못하기를. 무너져서 민낯 그대로의 감정을 드러내고 자신을 대하기를. 그러기를 바랐다.
“애리얼.”
데본시아가 음산하게 느껴질 정도로 가라앉은 음성을 냈다.
애리얼이 곤란함에 어깨를 움츠리자, 줄곧 가만히 빠져 있던 스카이라가 팔을 확 뻗었다. 그는 애리얼의 손을 낚아채듯 쥐었다. 그대로 그녀를 당겨 뒤에서부터 끌어안았다.
“저……!”
애리얼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스카이라가 그녀를 안고서 마력을 내뿜었다. 파랗게 타오르는 눈으로 데본시아를 노려보며, 애리얼을 데리고 순간 이동을 했다. 예전에 데본시아가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