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66)화 (166/264)

순식간에 애리얼이 사라지고, 그녀를 안내하던 시녀만 남았다.

안절부절못하는 시녀와 텅 비어 버린 복도. 그 공허한 광경을 보다가 데본시아는 미간을 찡그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

평소답지 않게 큰 소리를 내어 웃는 황태자의 모습에 황성의 사용인들이 바짝 긴장했다. 분노할 상황에서 얼굴을 찌푸리는 대신 웃어 버리는 그 행동에 광기가 느껴졌다. 웃음소리가 뻗어 나갈수록 공간에는 긴장감이 팽팽해졌다. 제라온은 물론 호위 기사와 시녀들까지 모조리 숨을 죽이고 있었다.

데본시아는 허리까지 숙이며 한바탕 웃더니 이윽고 완전한 무표정을 지었다.

“놀고 있네.”

조소하듯 내뱉은 그는 곧장 순간 이동으로 사라졌다.

졸지에 상관과 떨어진 신하들만이 빈 복도에 남아 얼빠진 채 서 있었다.

***

순식간에 눈앞의 장면이 전환되었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복도가 사라지고, 군청색 벽지의 생소한 방이 나타났다.

애리얼은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파악했다.

방은 둔탁해 보이는 검은색 가구로만 채워져 있었다. 벽지와 조화롭기는 하나 지나치게 어둡다는 느낌이 컸다. 집무실이나 회의장처럼 딱딱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그나마 바닥에 깔린 하얀 양털 러그가 방의 칙칙한 색감을 중화시켜 주고 있었다.

‘침대가 있는 걸 보면 침실이기는 한데.’

애리얼은 여전히 제 손을 잡고 있는 스카이라를 돌아보며 물었다.

“여기가 어디예요?”

“내 방.”

무심한 답변에 애리얼이 조금 놀란 사이 그는 손을 놓고 책상으로 걸어갔다. 그는 미리 준비해 둔 듯한 물건을 집어 들고서 몸을 돌렸다. 애리얼은 괜스레 긴장한 눈으로 방을 한 번 더 훑는 중이었다.

“신기해?”

“아, 아뇨!”

애리얼은 방 이곳저곳을 보던 시선을 빠르게 갈무리하고서 고개를 숙였다.

“보고 싶으면 더 봐. 갖고 싶은 거 있으면 가져가도 되고.”

“말씀은 정말 황송하지만, 괜찮습니다.”

“그래?”

스카이라는 손에 쥐고 있던 흰 케이스를 테이블에 내려놓고서 소파에 앉았다.

“앉아서 잠깐 얘기나 하자.”

평소 자주 하던 앉으라는 명령 대신 그는 그렇게 말했다.

애리얼은 긴장한 얼굴로 그의 곁에 나란히 앉았다. 연흑색 눈이 바닥에 닿았다가 흘금 문을 보았다.

“여기엔 강한 결계가 쳐져 있어서 데본시아라도 못 들어와.”

그가 애리얼을 안심시키듯 설명을 덧붙였다. 애리얼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스카이라의 입에서 나올 용건을 기다리는 자세였다.

스카이라는 잠시 고민하다가 테이블에 놓인 케이스로 손을 뻗었다. 애리얼의 두 눈이 그의 손끝으로 향했다. 반지가 들어갈 정도 크기의 흰색 케이스가 왜인지 그녀의 눈에 익었다.

스카이라가 일전에 약혼 제안을 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설마 저거…….’

그녀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술렁거렸다.

그에 스카이라는 테이블로 뻗던 손을 거뒀다. 대신 손목에 감긴 은색 브레이슬릿을 풀었다. 이음새의 도드라진 부분을 누르자, 찰칵, 소리가 나며 브레이슬릿이 반으로 갈라졌다. 강으로 던져졌었던, 그의 어머니가 남긴 유품. 그 고리가 벌어져 안쪽에 새겨진 글자를 노출했다.

[니카 드 르블레탄]

스카이라의 어머니, 그러니까 전 황후의 이름일 글자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황비일 시절 사용했던 호칭이 고쳐지지 않아 ‘본’을 받지 못한 그 이름.

그는 애리얼이 잘 볼 수 있도록 브레이슬릿을 내밀며 말했다.

“옛날이야기 하나 해 줄까?”

애리얼은 얼결에 브레이슬릿을 받아 들고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스카이라는 허공을 보고 있다가 천천히 이야기의 첫머리를 꺼냈다.

***

르블레탄 제국의 황후인 여자는 손익 계산이 철저하며 자기방어가 무섭도록 강한 사람이었다. 제 안위를 위해서라면 자식도 패(牌)로서 거침없이 이용할 사람이었고, 실제로 그랬다.

두 형제를 자식으로 둔 황후는 패로서 더 쓸모가 있는 장남, 데본시아를 아꼈다. 덤이나 다름없던 차남, 스카이라는 자연스레 방치되었다. 모든 좋은 것들은 데본시아의 차지였다.

스카이라는 쓰고 남은 것만 가질 수 있었다. 당연히 데본시아에게 황태자의 자리가 넘어갔고, 남은 황자 자리가 그의 것이었다. 어머니의 관심도 예외는 아니었다. 황후는 데본시아에게만 온종일을 할애하고, 아주 가끔 스카이라에게 눈길을 던졌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빈도였다.

이렇듯 황후가 데본시아를 아끼게 된 이유는 복잡한 듯 단순했다.

두 형제의 어머니였던 여인은 여신의 환생이라 일컬어질 만큼 무척 아름다운 이였고, 그 덕에 황제의 눈에 들어 황비가 되었다. 황후가 되려는 욕심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정쟁에서 떨어져 복잡할 거 없이 안정적이고 호화로운 황비 생활을 좋아했다.

그런데 어느 날 문제가 일어났다.

국혼을 3일 앞둔 날, 원래 황후가 될 예정이었던 왕녀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사망한 것이었다. 이미 제국의 전 귀족과 각국의 왕들에게 초대장을 보낸 상황. 결혼에 무심했던 황제는 준비한 것이 아깝다며 결혼식에 차질이 없도록 곧장 상대를 바꿨고, 그리하여 황비였던 그녀가 왕녀의 대체재로 국혼을 치르게 되었다. 운 좋게 황후의 지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황후가 된 것을 행운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전쟁으로 쇠락한 후작 가문 출신인 그녀는 황성 내 입지가 좋지 않았다. 당연히 그녀를 보는 시선도 곱지 않았다. 일련의 사고로 황후 자리에 오른 그녀가 사실은 사고의 주모자가 아니냐 하는 소문이 무성했다.

그럴듯하고 자극적이었던 소문은 금세 들불처럼 번졌다.

소문이 진실인 양 호도되고 과열되는 와중에, 황제는 그녀를 제대로 보호해 주지 않았다. 그녀의 가문은 그런 소문을 막기에는 힘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지켜 줄 새 권력을 찾았다. 황비일 시절 낳은 아들, 데본시아. 그녀가 황후로 즉위하며 황태자로 책봉된 그는 아직 어렸으나 확실한 권력이었고, 명확한 아군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데본시아에게 매달렸다. 그가 두각을 나타낼수록 황후인 자신의 처지도 안락하고 안정적이게 변해 갈 테니까.

데본시아는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구명줄이었다.

그리고 데본시아는 그녀의 기대만큼 특별하고 우월하게 자라났다. 스카이라 역시 뛰어난 재능을 갖추고 눈부시게 성장해 갔으나 데본시아에 비할 바는 되지 못했다.

“이번 종합 평가에서 태자와 같은 점수를 받으셨더군요, 키라.”

“예, 황후 폐하.”

“점수가 역대 최고치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그다음은 되더랍니다. 학장은 당신이 고작 열두 살이라는 것에 높은 평가를 했습니다. 성년이 지나 스물에 이르러 치르는 시험에서 이 정도의 점수를, 고작 열두 살에 받은 것은 분명 뛰어난 재능이라고……. 맞습니까?”

“과찬이십니다.”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

“데브는 이 평가를 열 살에 받았거든요.”

“더 분발하겠습니다.”

“아닙니다. 키라, 저는 당신에게 그런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

“제가 괜히 당신을 키라라고 부르겠습니까?”

스카이라의 별명, 키라. 그 이름은 재 가루를 이르는 고대어와 발음이 같았다.

타고 남은 찌꺼기.

고귀한 본명을 하찮은 것으로 줄여 낸 별명. 그게 황자인 그를 이르는 말이었다.

그의 처지였다.

“당신을 아끼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도 저의 아이니까요.”

“…….”

“하지만 키라, 당신은 굳이 빛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이미 더 빛나는 것이 있는데.”

“…….”

“주제를 알고 자리를 지키세요. 그대에게 노력은 필요 없는 것입니다.”

데본시아와 같은 점수를 받은 날 스카이라가 들은 이야기였다. 노력조차도 필요 없다는 말. 아무리 노력해도 제 형인 데본시아보다 사랑받을 수는 없다는 소리였다.

태생적인 차별이었다.

어머니에게서 비롯된 그 무수한 차별들이 켜켜이 쌓여 스카이라의 열등감을 유발하고 자존심을 깎아 먹었다. 차라리 노력의 끝을 달려서 기어코 데본시아를 꺾어 내면 좋아하실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스카이라는 노력을 그만두지 않았다. 무관심한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의 애정마저 빼앗기고 싶지는 않아서.

그렇게 시간이 흘러 형제가 열넷, 열셋이 되었을 때 제국에 일이 터졌다.

남부의 왕국 연합이 반기를 들어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 초 왕국 연합은 다섯 개 왕국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전쟁의 규모도 거대했다. 적군에는 단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는 르젠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 봐야 공격의 규모는 크지 않았다. 제국이 함락될 가능성은 추호도 없었다. 그 사실을 간파한 황제는 침착했으나, 제국의 분위기는 안팎으로 꽤 어수선했다. 그래서 황제는 전쟁 초기에 승기를 확실히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 소모전으로 끌고 가면 제아무리 르젠이라도 천년만년 버틸 수는 없으리라.

그리하여 황명이 내려졌다. 대공을 비롯해 열넷밖에 되지 않은 대공자가 전쟁터로 차출되었다.

하지만 그 명령에 수도는 오히려 혼란에 빠졌다. 얼마나 전세가 팽팽하기에 제국의 대공과 대공자가 전장의 최전선에 선단 말인가.

첫 번째 승전보가 울리기 전, 황성의 분위기는 엉망이었다.

자신의 자식마저 차출될까, 불안에 잠긴 고위 귀족들의 항의가 이어졌다. 그러나 감히 제국의 정점에게 토를 달 배짱은 없었고, 그들의 불평불만은 그 아래의 약자를 향했다. 역대 가장 빈약한 가문 출신의 황후, 니카 드 르블레탄. 아니, 남루한 후작가의 공녀였던 니카 텔로. 그녀와 그녀의 가문이 하찮았던 탓에 황실이 얕보여 전쟁의 빌미가 되었다는 소문이 빗발쳤다.

황제는 그 소문을 신경 쓰지 않았다. 소문은 사실이 아니었으나, 구태여 나서서 정정하지는 않았다. 당장 제국의 국정을 돌보기에도 시간이 빠듯했다.

송곳과 같은 날카로운 소문과 항의는 그대로 황후에게 꽂혔다. 원래부터도 나약했던 가문은 이번에도 별 힘이 되지 못했다.

황후를 새로 맞아야 한다는 소리가 정식 안건으로까지 올라오는 지경에 이르렀다. 문제는 그러는 것이 실제로 제국에 도움이 될 가능성이 컸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황후는 계속 불안에 떨었다.

그녀는 황후가 되기 전까지 평생 이런 비난과는 마주한 적이 없던 사람이었다. 나약한 정신력을 지닌 온실 속의 화초는 갑작스레 제게 불어닥친 돌풍을 견디지 못했다.

황제는 여전히 그녀의 방패가 되어 주지 않았다. 못한 것이 아니라 하지 않은 것이었다. 황태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신경 쓸 만큼 중요한 안건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철저히 방치된 황후는 어설픈 암살 시도마저 겪게 되었다. 황후에게 올라갈 다과상에서 독이 검출된 것이다. 물론 독살이 성공하는 일은 없었다. 황성의 철저한 보안과 검색에 범인은 황후가 상을 받기도 전에 색출되었다. 일련의 상황은 간단하게 정리되어 황후의 귀에 짧게 보고되었다.

그때부터였다.

황후가 별 시답잖은 이유로 제 사용인들을 의심하고 괴롭히며 감옥으로 보내기 시작한 것은.

황후는 언제 제거당할지 모른다는 걱정으로 정신이 쇠락해 갔다.

불안 증세에 시달리는 황후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고, 그럴수록 그녀의 신경은 더더욱 예민해졌다. 아주 사소한 것도 참지 못해 시녀들에게 중벌을 내리고, 매질을 했다. 급기야 고위 귀족에게도 손찌검을 하고 고성을 지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제 안위를 지키기 위해 날뛰는 황후의 평판은 바닥을 기었다. 광기에 물든 악인이다. 저주를 받아 제국을 파멸로 몰고 갈 인간이다. 혹은 괴물이나 악마 등 이것저것 흉하고 추악한 것들이 그녀에게 빗대어졌다.

최악으로 치닫는 평가는 당연히 그녀의 아들인 황태자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황후의 피를 이어받은 아들이니 비슷한 것이 아니냐는, 그런 소문들이 슬슬 일어났다. 한동안은 황태자가 무척이나 뛰어난 탓에 문제 삼지 않았던 그 혈통이, 도를 넘은 황후의 패악에 기어코 그의 평판마저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데본시아는 제 황태자 자리를 지키기 위해 직접 나섰다.

제 부모의 잔혹함을 유독 강하게 물려받은 황태자는 무척 냉혹한 인물이었다. 그는 제가 황제가 되는 데 방해가 되는 요소를 가차 없이 잘라 냈다. 그것이 설령 혈연일지라도 예외는 없었다.

황후는 그렇게나 아꼈던 황태자에 의해 별관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입에 재갈이 물려지고 기둥에 묶여 가축 취급을 받았다. 그러다가 매일 독한 진정제를 주입받게 되었다.

황후는 그제야 조용해졌다. 조용히, 천천히 죽어 갔다.

오랜 불안 증세를 견디지 못한 몸은 점점 쇠약해져 갔고, 쇠약해진 몸은 지독한 진정제를 견디지 못했다.

황제와 황태자는 그런 그녀를 방치했다. 황자만이 그녀를 찾아갔다.

그녀가 임종을 맞는 순간에도 황자만이 그녀의 곁을 지켰다.

그런 황자에게, 그녀는 어머니로서의 온전한 애정을 입에 담았다. 황제에게도 데본시아에게도 남기지 않은 유언을 오로지 그에게만 남겼다.

“저는…… 당신이 경쟁력이 없는 경쟁자라 좋았습니다. 그러면 눈에 띄는 일 없이 죽지 않을 수 있잖아요. 당신이 죽지 않아서…… 저는 기쁩니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사셨으면 합니다.”

당부였을까, 걱정이었을까, 아니면 충고였을까.

애매한 말에는 분명 애정이 배어 있었다. 그게 도리어 스카이라의 가슴을 할퀴었다. 계속 노력해 온 그를 너무나 비참하게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애정에 기반한 말이었기에 스카이라는 입을 닫았다.

황후는 약물로 인해 까맣게 변색된 손톱, 볼품없이 마른 파리한 손을 뻗었다. 스카이라에게 유품이랍시고 그녀의 손목에 걸린 것을 건넸다.

은색의 브레이슬릿이었다.

“이건 황비였던 시절…… 폐하께서 주신 나의 부적입니다. 특별히 신경 쓸 것 없는…… 온실 속 화초로, 황비로 살 수 있어 좋았습니다. 당신도 꼭…… 그렇게 사세요, 스카이라……. 아무것도 탐내지 말고, 과분한 것은 놓아 버리고…… 그렇게…….”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저와 처지가 비슷한 스카이라에게, 부디 자신처럼 되지 말고 행복하게 살라는 충고. 그러나 어찌 보면 그의 입장은 조금도 헤아리지 않고서 하는 충고였다. 제 아들인 스카이라에게 자기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서 하는 이기적인 말이다.

그럼에도 스카이라는 그것이 그녀의 진심임을 알기에, 저를 생각해서 꺼낸 말이라는 걸 알기에, 그녀의 모든 말을 뇌리에 깊게 박아 새겼다. 오랜 열등감과 함께 그에게 남은 저주였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살기가 싫어. ……싫어졌어.”

긴 이야기를 마치며 스카이라는 그리 덧붙였다. 애리얼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파랗게 타올랐다.

스스로 타올라 죽을지언정 남은 재 가루같이 살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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