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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67)화 (167/264)

결기에 찬 청색의 눈과 마주한 애리얼은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다. 스카이라의 과거사를 듣고서 감히 위로를 건넬 수 없었다. 그의 선언에 동조할 수도 없었다. 그는 제 삶과 태도에 대한 이해를 바라지 않았다. 그는 이미 결정했고, 오롯하게 이행할 생각뿐이었다.

다가올 결정은 애리얼에게 큰 영향을 미칠 터였다. 그녀와 관련되어 있을 게 뻔하니까.

‘이를테면 약혼.’

그의 감정을 아는 애리얼은 섣부르게 행동할 수 없었다. 그의 과거에 너무나 안타깝고 마음이 아팠으나, 그렇다고 감히 동정으로 그를 헤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섣불리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여 시선만 마주한 채였다. 긴장감이 켜켜이 쌓여 고조된다.

스카이라는 테이블로 팔을 뻗어 흰 케이스를 쥐었다. 어떻게 할까. 그는 얼어 굳은 듯 입술을 꾹 다물고 있는 그녀를 보다가 겉옷의 안주머니에 케이스를 넣었다. 한 수 접어주듯이 물러났다.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브레이슬릿마저 다시 가져왔다. 애리얼은 그제야 안심하는 기색이었다.

“지루한 얘기 듣느라 수고했어.”

스카이라가 무심한 얼굴로 소파에서 일어났다.

애리얼도 뒤따르듯 소파에서 일어났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바로 갈 거야?”

“아, 네.”

“그러면 잠깐만.”

이대로 헤어지는가 싶은 순간에 스카이라가 애리얼의 왼손을 끌어왔다. 소매를 살짝 밀어 걷고는 희게 드러난 손목에다 벌어진 브레이슬릿을 가져갔다. 찰칵, 소리와 함께 은빛의 브레이슬릿이 그녀의 손목에 채워졌다.

차가운 감촉에 애리얼은 흠칫 몸을 떨며 제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검은색의 고리 대신 은색의 고리가 그녀의 왼 손목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전과는 다르게 아무런 마력이 없는, 그냥 브레이슬릿이다. 그런 동시에 황후의 유품이라는 엄청난 의미를 지닌 중요품이기도 했다.

브레이슬릿을 빤히 바라보던 애리얼의 두 눈이 해명을 요구하듯 스카이라를 향했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머니께서 남기신 유품은 내가 데본시아에게 빼앗기지 않은 유일한 물건이었어.”

그 한 문장으로, 애리얼은 그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곧장 이해했다.

브레이슬릿은 상징이었다. 온전히 그의 것인, 데본시아에게 빼앗기지 않은 것. 너무나 소중한 것. 그걸 애리얼에게 투영하여 그녀의 손목에 채웠다. 그녀도 그렇게 만들 것이다. 빼앗기지 않겠다.

그게 단순히 각오인지 아니면 흘러넘친 소유욕인지는 모른다.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애리얼은 묘한 기대감에 휩싸인 자신을 느끼고 소스라쳤다. 그가 도망칠 듯이 꿈틀대는 그녀의 손을 꽉 붙잡았다. 애리얼의 눈동자가 세차게 튀었다. 저를 붙잡는 힘이 강해질수록 심장이 아프게 뛰어 댔다.

뿌리치고 싶은 동시에 붙잡고 싶은 양가감정이 들었다. 이상하다. 왜 이렇게 느끼는 걸까.

“저하…….”

브레이슬릿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다시 돌려드릴게요.

저를 지켜 주세요. 붙잡아 주세요.

튀어나오려는 상반된 요구에 애리얼은 황급히 이를 깨물었다.

아무리 단단히 각오해도 스카이라의 앞에 서면 마음이 나약해졌다. 주체할 길 없이 마구 흔들렸다. 솔렘에서의 시험에서처럼, 공개 시험에서처럼. 한 치의 거짓도 없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순수한 얼굴로. 그렇게 나를 잡아 주지 않을까. 구해 주지 않을까.

스카이라가 흔들리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애리얼, 나는 널…….”

조금씩 떨려 오는 그의 목소리. 발갛게 달아오르는 뺨. 고조되는 긴장감.

아, 무엇을 말하려고. 무슨 감정을 내뱉으려고.

숨기지 못하는 그의 그 순진한 표정이 모든 것을 드러내려고 했다.

덩달아 고조된 애리얼은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듣고 싶다. 듣고 싶지 않다. 상반된 감정이 마구 교차하며 의식을 어지럽혔다. 그가 비치는 투명한 애정이 판단력을 죽였다. 사정없이 흔들리는 나를 잡아 줬으면…….

약해진 의지가 추락하며, 주머니 속의 휴대폰이 깜박깜박 점멸했다.

『스카이라의 엔딩으로 진입 ……』

그 순간이었다.

“……아!”

저를 부르는 커다란 음성이 혼란한 뇌리에 섬광처럼 번쩍였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누군가. 자신이 잊어버리고 만 기억.

너무나 소중한…….

애리얼은 발작하듯이 스카이라의 손을 뿌리쳤다. 색색, 높아진 숨을 불규칙하게 몰아쉬며 뒷걸음질을 쳤다.

불시에 손이 뿌리쳐진 스카이라가 놀란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애리얼?”

“어차피 돌아갈 수 없는데, 그냥 여기서 살아.”

그녀를 부르는 현재의 음성과 과거의 음성이 충돌했다. 교사 동 1관에서와 같다.

두 번째 겪는 일, 두 번째로 겪는 두통이 엄습했다.

애리얼은 벌벌 떨리는 몸을 억지로 수습하려고 애를 썼다. 차분하게 감정을 억누르고 표정을 갈무리했다. 전처럼 기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죄송합니다.”

겨우 침착해진 애리얼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게 무엇에 대한 사과인지 알게 된 스카이라는 끔찍하게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녀에게 뿌리쳐진 손가락이 잘게 경련했다. 무너져 버릴 듯한 얼굴로 절망한다. 그러다 곧 주체할 수 없는 집착에, 질척한 감정에 잠식되어 눈동자가 시커멓게 변색해 갔다.

싫다고 하면 억지로라도 쥐어야겠다.

충동에 휩싸인 그는 손을 뻗으려다 움츠러드는 애리얼의 어깨를 보고서 멈추었다. 벌벌 떨리는 손가락을 말아 쥐고서 가까스로 팔을 거두었다.

그는 두려웠다.

혹여라도 그녀가 자신을 괴물처럼 바라볼까 봐. 교사 동 1관 2층 복도에서처럼.

“……그래. 가 봐.”

스카이라는 어금니를 사리물었다가 억지로 작별을 토해 냈다.

우우우웅-

하릴없이 울리는 진동음. 호감도 상승인가, 하락인가.

“초대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애리얼은 줄곧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그의 상처받은 표정을 피하고 싶어서였다. 보면 또다시 의지가 흔들릴까 봐. 눈을 질끈 감고서 고개를 든 뒤 곧장 몸을 돌렸다. 그대로 문으로 돌진하듯이 걸어가선 방을 빠져나갔다.

스카이라에게 붙잡히는 일은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다행…….’

호감도가 떨어진 걸까.

애리얼은 또다시 섭섭함과 서운함이 드는 것을 느꼈다. 저 자신이 선택한 일임에도. 모순임을 알면서도. 이런 감정이 들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아는데도.

스스로 그의 감정을 거절한 주제에 무참히 흔들린다. 그의 앞에서. 그의 선택 때문에.

스카이라 때문에.

깊은 한숨이 차올라 입 밖으로 뱉어졌다.

위험한 감정이다. 잘라 내지 않으면 실패하고 만다.

애리얼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말하려던 것이 무엇이든 미련을 두지 않아야 했다. 스카이라는 이제 잘라 낸 사람이었다. 이전처럼 그저 공략 대상으로서만 대우하고 하트 세 개만 유지하면 그만이다.

목표는 오로지 특별 엔딩.

겨우 마음을 다잡은 애리얼이 막 몸을 틀었을 때였다. 문 옆의 복도, 그림자 진 벽면에 조용히 기대선 인물이 보였다.

결 좋은 금발 아래의 화려한 이목구비, 색이 다른 눈동자의 소유자가.

“무슨 이야기를 했어?”

데본시아의 차분한 음성이 우아한 발음으로 질문했다.

그와 마주한 애리얼의 머릿속에 스카이라가 말해 주었던 과거사가 좌르륵 펼쳐졌다.

자신의 어머니를 별관에 가두고서 죽을 때까지 찾지 않았던 인물. 독한 진정제를 투여해 제 어머니가 목숨을 잃게 되는 빌미를 제공한 자.

“적어도 나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들은 건 아닌 것 같네.”

그가 애리얼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그림자가 걷히고, 미끈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보였다.

“네 표정을 보니까.”

“황태자 전하.”

“내 패륜에 대해서라도 들은 모양인데?”

“아닙니다.”

애리얼이 떨지도 않고 단호히 부정하자 데본시아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정말로 못 들었어? 내가 황후 폐하를 가두고 독한 진정제를 투여해서 방치한 거.”

“…….”

“진짜 몰랐어?”

그가 어느새 한 걸음 거리로 다가와서 애리얼의 왼 손목을 톡 건드렸다. 정확하게는 그녀의 손목에 걸린 은색의 브레이슬릿을.

“근데 왜 이렇게 겁먹은 얼굴이야, 애리얼.”

장난치듯이 구는 그를 코앞에 두고서, 끝내 애리얼의 평정이 흐트러졌다.

데본시아는 지금 화가 나 있었다.

본능적인 두려움이 밀려왔다. 경고등이 붉은 빛을 뿌리며 가쁘게 점멸하는 수준의 위협을 느꼈다.

애리얼은 그에게서 재빨리 물러났다. 뒤쪽에 있는 문이 쿵, 둔탁한 소리를 내며 열린 것은 그때였다. 누가 나온 건지는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뭐 하는 짓이야, 데본시아.”

잔뜩 성이 난 목소리가 무거웠다.

데본시아는 픽 바람이 빠지는 듯한 소리를 냈다. 비웃음 같았다. 그는 애리얼 너머의 스카이라를 노려보다가 억지 미소를 지었다. 그것마저도 소름 끼치게 정아(精雅)했다.

“애리얼, 넌 가 봐도 좋아.”

“정문에 차가 와 있어. 빨리 가.”

데본시아와 스카이라가 연달아 말했다.

애리얼은 묵례만 남기고는 조용히 물러나 복도를 바쁘게 달렸다.

심장이 쿵쿵 뛰어 댔다. 그녀가 복도를 돌아 빠져나가는 동안 고성이 울리는 일은 없었다. 애리얼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두 형제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서로를 주시하는 두 눈에 차오른 오랜 증오만이 소란스럽고 맹렬했다.

애리얼의 잔상이라고는 발소리조차 남지 않았을 때, 데본시아가 먼저 입을 뗐다.

“그거 알아, 스카이라?”

“…….”

“널 죽이고 싶어졌어.”

“그래? 잘됐네.”

스카이라가 차갑게 말했다. 미끄러질 듯 고아한 미소를 걸친 데본시아와는 다르게 조금의 웃음기도 없는 얼굴로.

“나도 널 죽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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