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숙사로 돌아온 애리얼은 잔뜩 기운이 빠져 있었다. 방에 들어가기 전, 문고리를 쥐고 서서 휴대폰을 확인했다.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스카이라 본 아이테르 르블레탄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에게 강한 애정을 느낍니다. 당신과 함께하는 데 더없는 기쁨을 느낍니다.)
▷현재 위치: 황성(거리가 멀어 정확한 추적이 어렵습니다.)』
하락했을 줄 알았던 호감도가 상승해 있다.
애리얼은 문고리를 쥔 채 가만히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왜…….”
의아함에 혼잣말이 새어 나갔다. 매몰찬 거절을 했는데도 호감도가 정체도 아니고 상승이라니. 스카이라마저도 오버히트에 근접했다.
이해할 수 없어 휴대폰의 액정만 바라보던 그녀의 눈에 문득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휴대폰을 쥔 왼쪽 손 아래, 손목에 걸린 은색의 고리. 스카이라가 준 브레이슬릿. 그의 어머니가 남긴 유일한 유품.
거절하는 걸 잊고 왔다.
“아…….”
절로 탄식이 터져 나갔다. 어쩌자고 이 중요한 걸 그냥 차고 나왔을까.
이걸 돌려주기 위해서라도 다시 그의 앞에 서야 한다.
애리얼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또 그를 마주하고서 흔들릴지도 모르는 자신이 두려웠다. 시녀를 통해 전하기에는 너무 중요한 물품이라 꼼짝없이 마주해야 하는데.
갖가지 사념과 걱정으로 그녀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였다.
갑작스럽게 문이 움직여 열렸다.
문고리를 쥐고 있던 애리얼은 속절없이 움직이는 문을 따라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열린 문 안에 선 휘아킨이 그녀를 맞았다. 애리얼은 여전히 문고리를 쥔 채 어리둥절하게 그 자리에 멈춰 그를 보았다.
“안 들어오고 뭐 하세요.”
“아, 들어갈게.”
애리얼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휴대폰부터 주머니에 넣었다. 들켰겠지. 불안감이 들었으나 애써 태연하게 굴었다. 다리를 움직여 안으로 들어가자, 그가 문을 탁 닫았다.
“내가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문밖에서 그렇게 한숨을 쉬고 혼잣말을 하는데 모를 수가 없죠.”
“들렸구나…….”
애리얼은 멋쩍어하며 볼을 긁적였다.
“황성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조금. 심란한 일이 있어서.”
“흐음…….”
휘아킨은 침대에 풀썩 앉더니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물었다.
“선배님, 혹시 황태자 전하랑 만나기라도 하셨나.”
“…….”
“그렇게 침묵하면 진짜 같으니까 하지 마요.”
“만나기는 했는데, 내가 심란한 건 황태자 전하 때문은 아니야.”
“네에.”
그가 입꼬리를 비죽거리며 몸을 뒤로 젖혔다. 풀썩 눕는 소리가 났다. 은빛 머리칼이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시트 위로 흐트러졌다.
애리얼은 그의 행동이 조금 의아했다. 착각이 아니라면, 휘아킨은 황태자를 못마땅해하는 것 같은데.
‘만난 적이 있는 건가?’
애리얼은 조금 궁금해졌다. 그 역시 데본시아를 편입 추천인으로 두고 있으니 만난 적이 있다 해도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대외적인 데본시아의 성격은 그리 나쁜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스카이라의 성격이 더 좋지 않다고 평가되었다. 어느 정도 친한 게 아니고서야 황태자에게서 나쁜 인상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내가 모르는 관계가 있나? 무하 공자일 때의 친분이라든가.’
생각이 깊어지려는 찰나, 점심부터 거른 배가 공복의 아픔을 호소했다.
그러고 보니 오후 일곱 시. 창밖은 노을이 지다 못해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저녁을 먹을 시간이 되긴 했다. 여섯 시에 학생들이 식당에 몰리는 걸 생각하면, 지금은 꽤 여유로운 식사가 가능한 시간대였다.
애리얼은 곧장 식당으로 향하려다 잠시 멈추었다. 문고리를 돌리려다 말고 몸을 돌렸다. 그녀는 잠들 기세로 누운 휘아킨에게 말을 걸었다.
“배 안 고파?”
“그냥 적당히 고파요.”
휘아킨은 눈을 감고서 대충 대꾸했다. 그래도 아예 먹을 생각이 없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어쨌건 배고프다는 표현을 하긴 했으니.
“같이 저녁 먹으러 갈래?”
애리얼의 권유에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조금 고민하는 듯 몇 초 동안 천장만 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네, 가요.”
생각보다 흔쾌히 응하는 휘아킨의 모습에 애리얼은 조금 당황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 그래.”
어색하게 문을 열고 앞서는 그녀를 휘아킨이 천천히 뒤따랐다.
층계를 내려가는 동안 마주친 몇몇 학생들이 둘을 향해 놀란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곧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피했다. 일전에 애리얼이 한 선언 덕분인 듯했다.
한차례 식사 인원이 다녀간 식당은 한산한 편이었다. 이곳의 몇 안 되는 학생들이 애리얼과 휘아킨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호기심 어린 시선이 둘에게 모였다. 휘아킨은 무심한 얼굴로 접시를 들고서 먼저 음식들이 놓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에게 닿았던 시선들이 빠르게 돌려졌다. 애리얼이 그의 뒤를 따라가자 아예 자리를 뜨는 이들도 여럿 있었다.
휘아킨은 접시에다 빵과 고기를 산더미처럼 쌓아 들고 와서 테이블에 앉았다. 애리얼도 그 맞은편에 앉아서 함께 식사를 했다.
휘아킨은 며칠은 굶은 사람처럼 많은 양의 음식을 입에 밀어 넣었다. 격식은 갖추면서도 쉬지 않고 먹는 게 조금 신기했다. 적당히 배고프다더니 거짓말이었던 건가 싶다. 아니면 원래 먹는 양이 많든가.
대화는 없었고, 식사만 조용히 이어졌다.
휘아킨은 애리얼이 한 접시를 비울 동안 네 접시를 비웠다. 그의 먹성이 신기할 정도였다.
“많이 배고팠어?”
“별로…….”
애리얼의 물음에 그는 눈을 굴리며 그렇게 답했다. 거짓말 같진 않은데, 의외였다.
식당을 떠날 때도 그는 후식용으로 준비되어 있는 초콜릿을 한 움큼 쥐고 나왔다.
방에 돌아와서도 둘은 크게 대화를 하지 않았다. 애리얼이 수업 내용을 복습하는 동안 그는 침대에 누워 초콜릿을 까먹었다. 그녀가 대충 복습을 마쳤을 땐 시각이 밤 열한 시에 다다라 있었다. 집중하느라 몰랐는데 책상의 가장자리에 초콜릿이 몇 개 올라와 있었다.
“나 주는 거야?”
“네. 당 떨어졌을 때 드시라고요.”
“고마워. 나중에 책 볼 때 먹을게.”
짧게 대화를 주고받은 뒤, 애리얼은 먼저 씻겠다는 얘기를 하고 욕실로 들어갔다. 몇십 분 후, 젖은 머리칼을 수건으로 말리며 나오자 옷을 갈아입은 그가 보였다. 흰 레이스가 달린 귀여운 원피스형 잠옷 차림이었다. 연한 물빛이 나는 긴 치맛자락이 눈길을 끌었다. 블랑셰의 모습인 터라 어색함은 없었지만, 그가 본래 남자인 것을 아는 애리얼은 묘한 감상을 느꼈다.
휘아킨이 방의 한중간에 서서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보였다.
“나 잘 어울려요?”
문득 던져진 질문에 애리얼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응, 예쁘다.”
순수한 칭찬이었다. 휘아킨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침대에 앉았다. 다리를 꼬아 앉으니 요염한 느낌도 물씬 풍겼다. 여자이든 남자이든 사람의 눈길을 확 잡아 끄는 외모였다. 망국의 공주처럼 가련하게 보이는 청초한 미인상. 전체적으로 처연한 인상을 풍기는 가운데 살짝 올라간 눈꼬리는 어쩐지 조금 야한 느낌도 있었다.
“그렇게 잘 어울려요?”
애리얼의 관심 어린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능청스레 물었다. 그의 올라간 입꼬리를 보며 애리얼은 뒤늦게 부끄러워져서 시선을 돌렸다.
“응. 그래서 나도 모르게 계속 시선이 갔나 봐.”
“고마워요. 선배님도 잠옷이 잘 어울리시네요. 잘 때 입기엔 아까울 정도예요.”
“고마…….”
감사를 전하다 말고 애리얼은 상황을 파악했다.
시계의 초침과 분침이 자정을 향했다.
그러고 보니 그와 이 시간까지 함께 있는 건 처음이었다. 여태까지는 그가 늘 밤마다 자리를 피해 줘서 큰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었는데…….
갑자기 긴장감이 확 치솟았다. 애리얼은 건너편의 휘아킨을 살피며 제 침대에 앉았다. 영락없는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사실은 남자다. 그 사실이 평정을 잃을 정도로 강하게 의식되었다.
룸메이트가 되고서 처음으로 함께 방을 공유하며 잠들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애리얼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손만 모으고서 앉아 있었다.
“……고마워.”
아까 하다 만 말이라도 끝맺었다. 그러자 휘아킨이 푸흡 웃음을 터트렸다.
“뭘 그렇게 긴장했어요.”
“그, 그냥…… 다른 사람이랑 한방에서 자는 게 처음이라서 그래.”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보다 좋은 변명이 떠오르지 않았다.
휘아킨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몸을 기울여 시트 위로 풀썩 누웠다.
“한 침대에서 자는 것도 아닌데요, 뭐.”
“그건, 그래…….”
애리얼도 어색함을 지우려는 듯이 침대에 모로 누웠다. 그랬더니 그와 일직선으로 눈이 마주쳤다. 서로를 마주 보고 누운 자세였다. 잿빛 눈동자가 묘한 눈빛으로 애리얼을 응시했다. 그는 말도 없이 애리얼을 가만히 뜯어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그의 시선에 애리얼은 손가락이 말려들었다. 환한 조명 탓에 제 표정이 적나라하게 보일 터였다. 긴장으로 입술이 꾹 다물렸다.
무표정한 휘아킨은 감정을 쉽사리 내비치지 않았다. 그는 긴 속눈썹을 팔랑거리며 잠시 눈을 깜박이더니 어딘지 분위기가 달라진 눈빛을 했다. 재색 눈동자에 묘한 기류가 형성되었다. 도무지 룸메이트를 바라보는 눈길이 아니었다.
애리얼은 견디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불, 끌게.”
차라리 보지 않으면 편할 것 같았다.
스위치를 내리자 방 안이 어둠에 잠겼다. 애리얼은 그를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침대에 누웠다. 등을 돌리면 너무 티가 날 테니, 천장을 바라보고 똑바로 누웠다.
“……잘 자.”
어렵사리 그에게 굿 나이트 인사를 건넸다.
휘아킨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어둠 속에서 그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괜스레 기분이 더 어색해진 애리얼은 눈을 꽉 감았다. 잠을 청하려 했으나 쉽지가 않았다.
극도로 고요해진 방 안에 제 숨소리가 들릴 듯해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
한밤의 달빛에 보닛에 박힌 은사자상이 도드라졌다.
대공저에서 보낸 차 안, 렉시우스는 빈 운전석에 기대어 수화기를 들고 통화를 했다.
“네, 여름 휴학기 때 오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고작 두 달 후입니다, 대공자.
“문제 있습니까?”
-네. 당연히 있고말고요.
“…….”
-기어코 그 짓거릴 할 겁니까?
“어머니.”
-이럴 때만 어머니라고 부르지 말거라. 난 그런 짓을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어머니께서도 그 아이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그건 그랬지. 하지만…….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대공비 전하.”
그가 단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한참이나 답이 없었다. 렉시우스는 끈기 있게 기다렸다. 대공비는 아무런 답을 주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렉시우스는 그게 답이라는 걸 알았다. 대공비는 그의 의견에 따라 움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