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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69)화 (169/264)

그는 조수석에 수화기를 내려놓고 차에서 내렸다. 차 주변을 경계하고 보초를 서던 메튼이 그에게 다가왔다. 약간 다급한 기색이었다.

렉시우스가 눈썹을 치켰다.

“무슨 일 있어?”

“대공저와 아카데미를 잇는 통로를 통해 불시의 방문자가 한 분 계셨습니다.”

“아.”

그 방문자라는 게 누군지 바로 알아챈 그는 시큰둥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제1 기숙사 동과 가깝게 위치한 벽 너머, 차폐막을 두른 숨겨진 연결 통로에 누군가가 붙잡혀 있었다. 렉시우스가 걸어 둔 보안 마법에 걸린 모양이었다. 뒤로 수갑을 찬 듯한 자세로 무릎을 꿇고 있는 소년의 붉은 정수리가 보였다.

“우레우스.”

렉시우스가 혈기 넘치는 제 동생을 불렀다. 붉은 머리칼을 날리며 우레우스가 번쩍 고개를 치켜들었다. 뭘 잘했다고 잔뜩 성이 난 표정이다. 파란 눈동자에 반항기가 가득했다.

“렉시우스, 이 나쁜 놈아! 빨리 풀어 줘!”

“침입자를 뭘 믿고 풀어 줘.”

“그게 뭔……. 나는 정식 이용자잖아!”

“방문자? 난 널 허가한 적이 없는데?”

“가족은 당연히 포함되는 거지.”

“아니, 포함 안 되는데.”

“뭐? 그딴 게 어딨어? 지가 쓰라고 대공저에 통로를 뚫어 놨으면서!”

“그거 내 전용이야. 너도 써도 된다고 한 적 없어.”

저벅저벅 걸어간 그는 한 손으로 우레우스의 목덜미를 쥐고서 강제로 일으켰다. 우레우스가 몸을 비틀며 그의 손을 떨쳐 내려 애썼다.

“이거 놔!”

“뭐 하러 왔는지 안 물을 테니까 곱게 돌아가라.”

“싫어! 애리얼 보고 갈 거야!”

악을 써 대는 그 태도에 렉시우스는 즉각 눈썹을 구겼다. 우레우스의 입에서 튀어나온 그녀의 이름이 그토록 거슬릴 수가 없었다. 단박에 우악스러워진 손길로 우레우스를 제압하고서 통로로 끌고 갔다.

“이거 놔! 애리얼!”

“좀 닥쳐라.”

“왜, 나는 못 보게 하는 건데!”

“네가 걔를 왜 보고 싶은데.”

“……옆에서 적당히 호위해 줄 거야.”

“네가?”

“내가 아니면 누가 해. 눈깔 돌아 있는 형이 애리얼한테 언제 이상한 짓을 할지 모르는데.”

“정의의 기사 납셨네.”

“최소한 난 너처럼 음흉한 생각으로 가득 차지는 않았거든? 너 설마 벌써 애리얼한테 이상한 짓 한 거 아니야?”

우레우스를 통로로 집어 던지려던 렉시우스의 손이 멈칫했다. 우레우스가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일평생 본 적 없던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색하게 굳은 얼굴, 붉어진 뺨.

우레우스는 아연해졌다. 제 눈앞에 보이는 이는 렉시우스가 아니다. 그의 거죽을 뒤집어쓴 타인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신빙성 있을 정도로, 생소한 얼굴이었다. 마치 부끄러워하는 듯한…….

“뭐야, 너……. 정말 무슨 짓 했어?”

“…….”

“무슨 짓 했냐고 하잖아!”

“볼에 입 한 번 맞췄다. 됐냐?”

“뭐라……!”

우레우스는 말하는 도중에 연결 통로로 던져졌다. 그가 사라진 걸 확인하고서 렉시우스는 연결 통로를 닫고 새로 결계를 쳤다. 그 와중에도 달아오른 뺨은 쉽게 식지 않았다.

충동적으로 그녀의 볼에 입술을 눌렀다. 그 행동이 떠오를 때마다 이성이 날아갔다.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도 한 적 없던 행동이었다. 입술에 닿던 보드랍던 감촉을 떠올리자 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이를 악문 채 답지 않게 허둥거리며 적당히 결계를 마무리했다. 급해진 걸음으로 아카데미 벽을 뛰어넘어 기숙사 동으로 향했다.

뒤따라오던 메튼이 기숙사의 뒷문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말을 걸었다.

“저하, 주제넘는 질문 하나 해도 됩니까?”

말해 보라는 듯 렉시우스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메튼이 눈을 내리깔고서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처음이셨습니까?”

렉시우스는 얼굴에 피가 몰리는 걸 느꼈다. 제 보좌관이 뭘 묻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그 질문을 듣는 순간 제가 표정 관리를 심각할 정도로 못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보좌관이 넌지시 알려 줄 정도이니 말 다 했다.

렉시우스는 몸을 휙 돌려 메튼을 등지고서 말했다.

“그래.”

그러고는 빠르게 성큼성큼 다리를 옮기며 기숙사로 들어갔다.

불이라도 붙은 듯 벌겋게 단 귓바퀴가 밤의 그림자에 가려져 다행이었다.

***

새벽이 찾아왔다. 커튼을 투과한 달빛이 은은하게 방 안을 비추었다.

오랜 시간을 뒤척거리던 애리얼은 어느새 새근거리며 잠들어 있었다.

자는 척 눈을 감았던 휘아킨은 가늘게 눈을 뜨며 몸을 일으켰다. 시트가 밀리는 소리조차 내지 않고 조용하게 침대를 빠져나왔다. 천천히 애리얼의 침대로 다가간 그가 잠든 그녀를 향해 눈을 내리깔았다.

“잘 주무시네요. 그렇게 의식할 땐 언제고.”

나지막하게 침잠한 목소리가 토라진 것처럼 속삭여졌다. 그는 애리얼의 얼굴을 첨예하게 훑다가 고개를 돌렸다. 옷장에 걸린 교복을 꺼내 들고 방을 나섰다. 쥐 죽은 듯 고요한 기숙사 복도를 거침없이 지나 밖으로 빠져나왔다.

새벽 세 시의 쌀쌀한 공기가 맨다리를 훑고 지나갔다. 달빛을 받은 은발이 밤바람에 휘날렸다. 제3 기숙사 동의 도서관을 뒤쪽으로 돌아 좁은 벽 틈에 위치한 장소로 다가갔다. 연결 통로를 가려 놓은 차폐막이 느껴졌다. 익숙하게 몸을 들이밀자 투명한 결계가 그를 삼켰다. 그대로 직진해 연결 통로로 들어갔다.

회색 벽면이 사라지고 널찍한 공작저의 정원이 나타났다.

공작저에는 잔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리앨라가 우산을 쓰고 나와 그를 맞았다.

“공자님, 오늘은 늦게 오셨네요?”

“네.”

휘아킨은 무뚝뚝하게 답하며 그녀의 우산 아래로 들어갔다. 곧장 공작저의 별채로 들어갔다.

조용한 내부에는 시종조차 없었다. 그를 뒤따르던 아리앨라가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가 준비를 마칠 때까지 기다리기 위해서 였다.

휘아킨은 교복을 테이블에다 올려 두고 욕실로 들어갔다. 오른쪽 귀에 걸린 마름모 모양 이어링을 제거하며 긴 숨을 토해 냈다. 위장 마법이 풀리며 길던 머리칼이 짧게 줄어들고 체형이 변했다. 키가 커지고 울대뼈가 도드라졌다. 크게 입은 잠옷이 갑갑하게 조여 왔다.

그는 제 몸에 걸쳐진 잠옷을 찢듯이 벗어 바닥으로 던졌다. 대충 나이트가운을 걸치고 찬물에 세수를 했다.

갑갑함이 조금 가시자 그는 세면대를 짚고서 물방울이 튄 거울을 보았다. 소녀가 아닌, 영락없는 소년의 얼굴이 비쳤다. 신경질이 난 듯 살짝 올라간 눈꼬리가 평소와 다른 날카로운 인상을 자아냈다. 그는 눈가를 문지르며 미간을 찌푸렸다.

침대에 누웠을 때, 생각보다 감정의 동요가 컸다.

조용한 방. 나란히 누운 채 마주하던 시선. 뒤척이며 나는 자잘한 시트의 마찰음. 좁은 공간에 울리던 규칙적인 숨소리.

예민해진 오감이 모든 것을 명확하게 포착하였다.

아무리 여장을 했어도 사춘기 소년의 정서를 지닌 그에게는 자극이 상당했다. 아직도 진정을 못 한 가슴이 묵직하게 쿵쿵 울리는 소리를 냈다.

소설에서는 설렘뿐인 것처럼만 표현되더니, 실상은 이토록 불편한 거였나.

한 번 더 찬물에 얼굴을 적시고 수건으로 닦아 냈다. 두 번의 냉수마찰에 겨우 머리가 가라앉는다.

그는 남자일 때의 치수에 맞춰 준비된 셔츠와 바지를 걸치고 욕실을 나왔다. 블랑셰의 모습이 씻은 듯이 사라진 온전한 휘아킨 무하의 모습으로 아리앨라를 보았다.

“같이 못 있겠어요.”

“룸메이트랑요?”

“네.”

아리앨라가 흥미롭다는 얼굴을 했다.

그가 찼던 마름모 모양 이어링은 남성성을 누르는 마도구였다. 외관을 바꿀 뿐 아니라 혹시나 있을 타인의 의심도 잠재운다. 하지만 남성으로서의 감정의 동요가 크면 마법이 가하는 압박이 커지는 부작용이 있었다. 속이 갑갑하고 심할 경우 숨 쉬기도 버거워진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가 룸메이트인 애리얼을 이성으로 느끼는 모양이었다.

“숨이 막히실 텐데요.”

“그래서 힘들어요.”

“못 견딜 정도예요?”

“네.”

그러자 아리앨라의 보라색 눈동자가 휘둥그레 커졌다. 이어서 그녀의 입꼬리가 미끄러지듯 상승했다.

“제 사촌의 외관이 누구에게나 동요를 일으킬 만은 하죠.”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러면요? 설마 좋아해요?”

“그런 거 같아요.”

휘아킨은 망설이지도 않고 그렇게 답했다.

아리앨라가 기함하듯이 입을 벌리고 놀랐다.

“진심이세요?”

“네.”

그가 재차 긍정했다.

아리앨라는 어안이 벙벙해 있다가 급히 정신을 차리고서 대처 방안을 꺼냈다.

“방을 바꾸게 할까요?”

“아뇨.”

불편할 게 분명한데, 그는 단칼에 거절했다.

“왜…….”

“좋아하는 거 같다고 했잖아요.”

“…….”

“같이 있고 싶어요.”

그의 고집스러운 말에 아리앨라는 당황하여 연신 입만 뻐금거렸다. 부작용을 참지 못해 결국 오밤중에 공작저로 돌아와 놓고 저런 소리라니.

“피곤해서 그러는데, 한 시간만 자고 올게요. 잔 만큼 훈련 강도를 올려 주셔도 돼요.”

휘아킨은 무심한 태도로 말을 전하고는 침실로 향했다.

아리앨라는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소파에서 일어났다.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가 말을 쏟아 냈다.

“하지만 그러면 마도구의 부하가 심해질 거예요. 견디기 힘든 수준일 텐데……. 지금도 힘드시잖아요. 앞으로 점점 더 심해질 거예요. 어지간하면 방을 바꾸시는 게…….”

“버텨 볼게요.”

문고리를 쥐던 휘아킨이 아리앨라의 걱정을 잘라 내며 그렇게 일축했다.

“많이 힘들 거예요.”

“상관없어요.”

그는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만류의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으나 아리앨라는 그냥 물러났다. 그도 모르는 것은 아닐 터다. 직접 겪는 입장이니까 그 누구보다 잘 알겠지.

그런데도 그는 견디겠다는 거였다.

휘아킨은 무표정한 얼굴로 문고리를 돌리고 침실로 들어갔다.

새벽의 막바지로 향하는 밤의 달이 휘영청했다.

지이이잉-

진동음이 애리얼 홀로 잠든 기숙사의 고요함을 깼다.

서랍 안에 든 휴대폰이 새로운 알림을 띄우며 환해졌다.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휘아킨 무하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을 자주 생각합니다. 당신을 따라다니는 일이 있습니다.)

▷현재 위치: 무하 공작저(거리가 멀어 정확한 추적이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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