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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70)화 (170/264)

수업이 없는 날이었다. 그런데도 애리얼은 교복으로 갈아입고서 방 안을 서성거렸다. 침대에 앉았다가, 창밖을 내려다보았다가, 책상에 앉아 책을 폈다.

햇살을 느끼며 눈을 떴을 땐 휘아킨은 보이지 않았다. 누웠던 흔적만 남은 침대만 보였었다. 잠깐 어딜 나간 건가 싶었으나, 그는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생각보다 잘 잔 저와 달리 어디가 불편했던 건지. 아니면 밤마다 자리를 비우던 그 일과대로 나가 버린 건지.

후자라면 상관없으나 전자일까 봐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애리얼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강의 서적을 뒤적거리며 시간을 죽였다. 그렇게 한동안 책상 앞에 앉아 따스한 햇볕이나 멍하게 쐬고 있을 때.

달칵.

문 열리는 소리에 애리얼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격한 움직임에 휘아킨이 놀란 듯 움찔거렸다. 긴 은발이 가슴께의 리본을 스치며 찰랑거렸다. 언제 갈아입고 간 건지, 아니면 갈아입고 온 건지 그는 반듯한 교복 차림이었다.

그는 금세 태연한 얼굴을 하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털썩 침대에 앉는 그를 보며 애리얼이 걱정 어린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걱정했어요?”

“응. 일어나 보니까 없길래. 간밤에 불편했었나, 아니면 급한 일이라도 있나…….”

애리얼이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는데 그가 아하하 간드러진 웃음을 터트렸다.

애리얼은 어리둥절해하는 얼굴로 휘아킨을 보았다. 우스운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닌데 웃음이 터져 버린 그를 보고 있자니, 갑자기 조금 부끄러워졌다. 혹시 제 얼굴에 뭐라도 붙은 건가. 애리얼은 멋쩍은 손길로 제 얼굴을 더듬었다.

“죄송해요. 기뻐서……. 얼굴에 뭐 안 붙었으니까 걱정 마세요.”

휘아킨이 여전히 피식거리는 웃음을 입가에 매단 채 그녀를 안심시켰다.

애리얼은 얼른 손을 내리고서 어색함이 묻어나는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런데 기쁘다니…… 뭐가…….”

“선배님이 절 걱정해 주고 계셨다는 거요. 생각보다 많이 좋아서.”

모호하게 다가오는 말이었다. 애리얼은 자꾸만 이상한 쪽으로 생각이 되어서 내심 당황하고 있었다. 차분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은 척 받아넘기려고 노력했다.

“당연히 걱정하지. 우린 룸메이트고, 친구니까.”

“친구요?”

그가 무슨 의미냐는 듯 두 눈을 깜박이며 시선을 향했다.

친구라는 말을 하기엔 아직 일렀던 걸까. 애리얼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바쁘게 해명했다.

“같이 뭐 먹고, 이야기하고. 그러니까 친구 같아서. 앞서 나갔다면 미안해…….”

“아니에요. 친구, 나쁘지 않죠.”

“그래? 다행이다.”

애리얼은 안도하는 동시에 마음 한편에 들어차는 불안감을 느꼈다. ‘좋다’가 아니라 ‘나쁘지 않다’. 그 말이 왜인지 모르게 마음에 걸렸다. 몇 주간 함께 지내며 알게 된 그의 성격상 ‘나쁘지 않다’는 평은 말 그대로 나쁘지 않다는 거였다. 해도 상관없고 안 해도 아쉽지 않은 정도.

제가 걱정해 준 게 기쁘다고까지 말한 것치고는 미적지근한 반응이 아닐 수 없었다.

‘아니면 혹시…….’

위험한 가능성이 애리얼의 뇌리를 쿡 찔렀다. 절로 휴대폰을 향해 손이 갔다. 주머니 속에 든 휴대폰의 매끄러운 액정으로 손가락을 미끄러트렸다.

‘알림이 왔었나?’

어느새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는 휘아킨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그의 호감도 개수를 헤아렸다.

‘아마도 한 개 반……. 아니, 두 개였었나?’

히든 캐릭터이다 보니 그의 호감도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하트가 두 개일 때, 다른 공략 대상들은 약혼을 말하곤 했었다. 그 정도로 호감도가 확연하게 짙어지는 단계다.

시선을 느낀 휘아킨이 슬그머니 애리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잿빛 눈동자가 어젯밤 침대에서처럼 그녀를 보았다.

애리얼은 긴장으로 굳어지는 몸을 느끼고서 얼른 고개를 돌렸다. 책상에 앉아 괜히 읽던 책을 마저 보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자 침대에 앉아 있던 휘아킨이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왔다.

평소에는 이런 적이 없었는데. 의외의 행동에 그녀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요동쳤다.

휘아킨이 애리얼의 뒤에서 상체를 기울여 밀착하고는 고개를 들이밀었다.

“뭐 봐요?”

“그냥, 강의서.”

애리얼은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그녀의 어깨로 휘아킨의 은빛 머리칼이 흘러내렸다. 꽃과 과일이 섞인 듯한 달콤하고 은은한 향기가 풍겼다. 분명하게 동성이라고 인식되는데, 실상은 아니다. 여자아이의 모습으로 위장을 하고 있지만 휘아킨은 확실하게 남자였다.

그 간극이 긴장감을 더욱 고조시켰다.

어떻게 대해야 자연스러운지 모르겠다.

어깨를 넘어온 그의 손이 책의 페이지를 넘겼다.

“좀 희한한 과목인 거 같은데……. 술식에 남은 마력 재활용? 그게 가능해요?”

“시전자가 술식을 발동시키고 잊어버렸을 때, 사용을 다 한 술식에 잔여 마력이 남아 있는 경우에만.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어.”

“뭐야, 그게. 선배님 진짜 이상한 거 들으시네요.”

가벼운 웃음소리를 따라 은발이 잘게 흔들렸다. 애리얼의 손과 비슷한 크기의 가늘고 흰 손이 페이지를 주르륵 넘겼다. 그걸 보고서 애리얼은 조금씩 차분해졌다.

지금까지 사실을 알고도 잘 지냈는데 굳이 의식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닥친 다른 상황들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 그러니 신경 쓸 필요 없어.

그의 웃음소리를 따라 애리얼도 작게 웃었다.

“응. 이상해. 들어도 들어도 계속 모르겠어.”

“네? 선배님 이거 시험 칠 때 어쩌시려고.”

“그래도 시험은 쉽대.”

“그래요? 이것도 책 보고 시험 쳐요?”

“응. 작년에는 오엑스 형식으로 출제했었대. 난도도 엄청 낮아서 대부분 만점 가까이 맞았다던데?”

“생각보다 날로 먹는 과목이네요.”

“응.”

애리얼은 기뻐하며 방긋 웃었다. 안 그래도 엉망으로 채운 시간표인데 수업에 이어 시험까지 어려우면 큰일이었다. 다행히 시험만큼은 무척 쉬운 과목이라 낙제를 받을 가능성은 없으니 망정이지.

“선배님 이번에는 공개 시험 안 치셔도 되겠네요.”

“무서운 소릴…….”

“시험 쉬운 거 듣고 싶으시면 제가 추천해 드릴까요?”

“어? 정말?”

애리얼이 고개를 휙 꺾어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생각보다 거리가 가까워 애리얼의 이마에 그의 입술이 살짝 스쳤다. 그러나 당장 날로 먹을 쉬운 수업에 관심이 팔린 애리얼은 의식하지 못했다. 휘아킨만 잠깐 스친 살결의 감촉에 놀라 물러났다.

애리얼이 물러나는 그를 따라 다시 고개의 방향을 틀었다. 뒤를 돌아보고서 재차 물었다.

“오엑스 시험으로 치는 수업이 또 있어?”

“그런 것도 있고, 객관식만 쉽게 내는 것도 있고…….”

“후학기 수업이야?”

애리얼이 눈을 빛내며 그를 응시했다. 그녀는 후학기 시간표를 수월하게 짜 날로 먹을 생각에 가득 차 있었다.

휘아킨은 당황해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애리얼의 눈동자가 물러나는 그를 빠르게 따라왔다. 그녀는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다시금 질문을 던졌다.

“후학기 수업 위주로 알려 줄 수 있어?”

“어, 네. 근데 잠시만…… 욕실 좀.”

휘아킨은 경직된 얼굴로 몸을 휙 돌렸다. 문을 열고서 도망치듯이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제대로 닫지도 못한 문이 문틀을 툭툭 치며 흔들거렸다.

“방 안에도 욕실 있는데…….”

애리얼이 그가 사라진 자리를 보며 멍하니 말했다.

휘아킨은 4층을 달려 복도 끝에 보이는 공용 욕실로 들어갔다. 가장 안쪽에 있는 샤워 부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뜨거운 물이라도 부은 듯 속이 들끓었다. 그는 오른쪽 귀에 걸린 백금 이어링을 쥐고서 헐떡거렸다.

저를 억누르는 마도구가 너무 갑갑했다. 기도가 조여 숨 쉬는 것도 버거웠다. 명치에 커다란 돌덩이를 얹은 느낌이었다.

이어링을 빼고 싶어서 손이 부들거렸다.

하지만 지금 남자로 돌아가면 들킬 위험이 너무 컸다. 한번 떼어 낸 이어링의 마법이 다시 시전되기까지는 한 시간 가까이 걸렸다.

그는 이어링에서 손을 떼고 가슴팍을 부여잡았다. 한 손으로는 벽을 짚은 채 고개를 숙였다. 갑갑한 폐부, 날뛰는 심장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하아, 하…….”

조금 진정되었다가도 입술에 스쳤던 감촉을 떠올리면 다시금 폐부가 옥죄었다.

네가 감히 가져선 안 될 감정이라고 호통을 치는 것 같았다.

짜증이 나서 아예 샤워기를 틀어 버렸다. 찬물이 솨아, 쏟아져 내리며 그의 온몸을 적셨다. 블라우스가 투명하게 비칠 정도로 젖고 나서야 겨우 머리가 맑아졌다. 가슴팍을 누르던 답답함도 점차 사라졌다.

휘아킨은 짜증이 나서 인상을 썼다.

친구라는 소리에 괜히 기분이 상해서 오기를 부렸다. 애리얼 허클리가 자신을 친구라고 명명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괜히 밀착해서 설렘에 흐트러지는 호흡을 감추며, 되지도 않는 유혹을 저질렀다. 그녀에게 자신은 동성으로만 보일 텐데.

아니나 다를까, 조금 의식하는 것 같다가도 금세 침착해진 그녀가 고개를 치켜들었을 때, 그녀의 이마에 제 입술이 스친 찰나, 그 감촉에 동요한 건 그 혼자뿐이었다.

그가 터질 것 같은 심장 박동을 견디고 있을 때, 애리얼 허클리는 눈을 빛내며 수업에 관한 것만 궁금해했다. 그는 이렇게나 그녀에게 동요하고 있는데.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떨리는데.

그녀는 저를 그저 친한 동성 후배 정도로 여길 것이다.

이런 것이 애정인가.

책에서 본 사랑스러운 로맨스와는 전혀 다르다. 설레기는커녕 비참했다.

이렇게 본래 모습을 감추고 감정을 가지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하는 그가 가지기엔 사치인 감정이었다. 성별을 감추고 이름마저 가짜를 쓰는 그에게는 그 달콤해 보이던 첫사랑도 고통만 될 뿐이었다.

<로제트>에서 첫사랑이 쓴 초콜릿의 맛이라고 했었나.

그래서 쓰기는 해도 어떻게 단맛은 있을 줄 알았지. 독약을 삼킨 거나 다름없이 아플 줄은 몰랐다.

물에 젖은 바닥에 풀썩 주저앉은 그는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비소를 지었다.

“어머니, 제가 이 꼴로 살기를 바라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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