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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71)화 (171/264)

욕실을 가겠다며 뛰쳐나간 휘아킨은 한참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한 시간까지는 잠자코 기다리던 애리얼도 두 시간이 넘어가자 낯빛이 변했다. 혹시 또 괴롭힘을 받는 건 아닌지. 아니면 다른 큰일이 생긴 건지.

걱정에 휩싸인 애리얼은 4층의 공용 욕실로 향했다. 욕실로 간다던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공용 욕실에 갔을 확률이 높았다. 설마하니 다른 방의 욕실에 가지는 않았을 테니까.

똑똑, 복도 끝의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자 지독한 적막이 귀를 감쌌다.

“블랑셰?”

조심스럽게 그를 불러 보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고요한 공간에 그녀의 목소리만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다.

어느 곳에서도 인기척이 없었다.

애리얼은 직접 욕실을 돌아보며 그를 찾았다. 샤워 부스도 하나하나 확인했지만 전부 비어 있었다. 다만 마지막 칸에는 누군가 쓴 흔적이 남아 있었다. 군청색 문양이 그려진 타일 바닥에 물이 고여 있다.

‘휘아킨이 여기 있었던 건가?’

애리얼은 물기가 아직 마르지 않은 부스 안을 보다가 몸을 돌렸다. 샤워 부스를 제외한 다른 곳에는 물기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꽤 지나서일까.

이동한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 아프거나 다친 건 아니겠지…….’

혹시 또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건 아닐지.

아찔한 가능성을 떠올리자마자 애리얼은 급히 휴대폰을 꺼내 켰다.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휘아킨 무하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을 자주 생각합니다. 당신을 따라다니는 일이 있습니다.)

▷현재 위치: 무하 공작저(거리가 멀어 정확한 추적이 어렵습니다.)』

의외의 알림과 함께 반 개 늘어난 하트가 그녀를 반겼다.

‘이게 언제 오른 거지……? 어젯밤에 오른 건가?’

한방을 쓴 것이 호감도에 영향을 미친 건가. 하지만 어젯밤의 그는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았었는데. 이해가 어려웠다. 눈빛이 조금 묘하던 게 이런 의미였나.

상승한 호감도에 당황해 본목적이었던 위치 정보는 나중에야 눈에 들어왔다.

무하 공작저.

늘어난 하트의 개수만큼이나 그녀를 당황스럽게 하는 장소였다.

아카데미서 무하 공작저까지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 차를 타도 세 시간 이상은 족히 걸리는 거리였다. 마력이 없는 그가 순간 이동을 한 것도 아닐 테고.

‘누가 데리러 왔나?’

애리얼은 물이 흥건한 샤워 부스와 바깥의 말끔한 타일 바닥을 번갈아 보며 추측했다. 누군가 샤워 부스로 그를 데리러 왔고, 그대로 순간 이동 했다고 한다면 상황은 깔끔해진다.

그렇다면 누가 그를 데리러 온 것인가. 동행인을 데리고 단박에 무하 공작저까지 이동하는 건 어지간한 마법사가 아니면 불가능했다. 무하 공작이 직접 아들을 데리러 온 것이 아니면…….

“……아리앨라.”

그녀는 무하 공자의 마저증을 치료하기 위해 고용된 마법사라고 했다. 심지어 아카데미 수석을 차지했을 정도로 뛰어난 마법사였다. 그녀라면 휘아킨을 데리고 먼 거리를 이동하는 것도 가능은 할 터.

문제는 그녀가 온 이유다. 아리앨라가 뛰어난 마법사라지만 장거리 순간 이동은 분명 부담이 큰 일이다. 어지간한 일로는 이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휘아킨의 몸에 이상이 생긴 건가?’

애리얼은 자신이 도달한 결론에 가슴이 철렁했다. 마저증이 크게 아플 수도 있는 병이었던가? 알아본 바로는 그저 떨어진 마력이 회복되지 않는 것뿐이라고 했는데. 혹시 모르는 증세가 더 있나…….

애리얼은 불안해하며 휴대폰만 바라보고 있다가 우선 욕실을 나왔다. 휘아킨에게 무슨 일이 있다고 한들 그녀가 해 줄 수 있는 건 당장 없었다. 일단 그가 무하 공작저에 있는 걸 확인했으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공작저에서 대처할 것이다. 상황이 더 악화할 일은 적다.

그럼에도 애리얼은 마음이 심란했다. 방금까지도 함께 웃고 이야기하던 룸메이트였다. 돌연히 뛰쳐나간 그가 쓰러지기라도 한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방으로 돌아와서도 안절부절못하는 마음은 나아지질 않았다. 억지로 책상 앞에 앉아 강의 서적을 폈으나 잘 읽힐 리 만무했다.

그렇게 한 시간.

툭, 투둑.

불규칙한 소음에 애리얼은 고개를 들었다. 굵은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툭, 툭, 투둑, 두두둑, 투두두둑, 솨아-

하나둘 늘어나던 빗방울들이 어느새 선을 이루고 장대비가 되어 쏟아졌다. 안개가 낀 듯 희끄무레하던 하늘은 시커멓게 흐려졌다. 이제 막 정오가 지난 참인데 창밖의 풍경은 밤이라도 된 듯 어두웠다.

애리얼은 제 걱정을 형상화한 듯한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내가 휘아킨을 걱정해서 어떡하려고…….’

어차피 자신은 특별 엔딩을 달성해 이 세계를 떠나려 하는 처지였다.

그리고 휘아킨은 무하 공작가의 독자다. 그의 건강은 공작가가 나서서 챙길 일이었다. 적어도 애리얼보다는 훨씬 대처를 잘할 것이다.

‘근데 막상 휘아킨이 아카데미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었는지를 생각하면, 그것도 썩…….’

생각이 길어지려는 찰나, 애리얼은 눈을 질끈 감았다. 또 그에게로 걱정을 기울이기 시작하다니. 세차게 고개를 저어 사념을 털어 냈다.

소란한 빗소리가 비워진 머릿속으로 밀려들었다.

애리얼은 턱을 괴고서 창밖을 보았다.

여름이 찾아오고 있었다. 첫 번째 실패 후 벌써 반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다.

특별 엔딩을 위한 호감도 조건은 완료되었다. 이제 중요한 건 모두에게 생일 선물을 받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공략 대상들의 생일을 챙길 필요가 있었다.

애리얼은 책을 덮고 노트와 펜을 꺼냈다. 챙겨야 할 날짜를 미리 적어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레이신 7월 17일

렉시우스 9월 10일

스카이라 11월 11일

데본시아 12월 31일」

백작에게 부탁해 알아낸 날짜였다. 거의 두 달에 한 번꼴로 생일이 찾아왔다.

‘가장 빠른 건 레이신. 7월 17일.’

오월의 막바지에 접어든 오늘, 슬슬 레이신의 생일 선물을 어떻게 건넬지 고민해야 했다.

레이신의 생일은 여름 휴학기가 시작하는 첫 주에 있었다. 하지만 애리얼은 이번 여름 휴학기에 렉시우스와의 약속으로 대공저에 가야하는 상황. 레이신의 생일과 대공저에 가 있는 기간이 겹칠 확률이 높았다.

그러니 이번 학기가 끝나기 전에 레이신을 만나야 했다. 그에게 생일을 늦게 챙겨도 괜찮냐는 양해를 구하든지 선물만이라도 미리 전하든지 해야 하니까.

‘……어디 있는지 찾아볼까?’

애리얼은 비 오는 창밖을 보다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화면을 켜고 레이신의 위치 창을 띄웠다.

『공략 대상이 근처에 있습니다.』

『레이신 디 솔렘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과 깊은 관계가 되고 싶어 합니다. 당신을 쫓아다니고, 붙잡고 싶어 합니다.)

▷현재 위치: 제3 기숙사 동 - 후원』

“후원?”

뜻밖에도 가까운 장소였다. 애리얼의 눈이 즉각 창밖으로 향했다. 굵은 빗줄기가 가득한 밖은 척 봐도 외출하기에 좋은 날씨는 아니었다. 심지어 갑자기 내린 비라서 피할 길도 마땅찮았으리라. 미리 우산을 챙겼다면 괜찮겠지만, 레이신의 성격상 그런 걸 일일이 챙기진 않았을 거다.

걱정이 서린 애리얼의 눈이 다시금 화면을 주시했다. 그의 초상화는 비를 피할 건물이라곤 없는 후원의 가장자리에 있었다. 그나마 아름드리나무가 있는 곳이라서 내리는 비를 고스란히 맞지는 않을 테지만, 나뭇잎에 고인 물이 떨어지면 결국 젖는 건 똑같다.

게다가 장소는 또 하필이면 제3 기숙사 동의 후원.

몇 주 전에 애리얼이 그와 만났던 장소였다.

‘설마 날 기다리고 있는 건가?’

단박에 심각해진 애리얼은 방을 나섰다. 기숙사에 비치된 상비 우산을 펼쳐 들고서 후원으로 향했다. 습기 찬 공기를 헤치고 그의 초상화가 머무르는 아름드리나무 아래로 나아갔다. 잔디밭에 맺힌 물방울이 다리에 스쳤다. 구두가 축축하게 젖었다.

거무칙칙한 풍경, 진녹색 잎사귀를 늘어트린 거목 아래 유난히도 눈에 띄는 금발 머리가 보였다. 애리얼은 그대로 직진했다.

거대한 나무의 그늘 속으로 들어가자 빗소리가 조금 잦아든다.

애리얼은 우산을 조금 젖히고 살짝 위를 올려다보았다. 젖은 머리칼을 넘기던 레이신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비를 직격으로 맞은 외양이었다. 늘 부스스하게 일어나 있던 금발이 물기에 착 가라앉아 있었다. 셔츠는 속이 비칠 정도로 축축하게 젖었다.

애리얼은 팔을 들어 그의 머리 위로 우산을 기울여 주었다. 그러자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애리얼이 하는 양을 보다가 그녀에게서 우산을 빼앗아 들었다.

그의 손에 넘어간 우산이 높게 들리는 동시에 애리얼에게로 치우쳤다. 우산에서 반쯤 벗어난 그의 어깨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애리얼은 그에게로 우산대를 기울이려고 했으나, 그의 손에 막혀 꿈쩍도 하지 못했다.

“공자 서하, 비 맞으시는데…….”

“난 이미 다 젖었잖아.”

“……일단 기숙사로 가셔서 옷도 좀 갈아입으시고 하세요.”

“괜찮아.”

“안 괜찮아요. 감기 들어요.”

“그런 거 안 걸려.”

“그럴 리가…….”

“걸려 본 적 없어. 걸려도 치료술 쓰면 돼.”

틀린 말이 아님에도 반박하고픈 마음이 드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애리얼은 반박하는 대신 그에게로 다가섰다. 거리가 좁혀지자 애리얼에게 치우쳐 있던 우산이 서서히 수평을 맞추었다. 이제야 겨우 그의 어깨가 우산 그늘 안으로 숨겨졌다. 우산이 꽤 커서 다행이었다.

좁혀진 거리만큼 애리얼은 고개를 젖혔다. 상당한 장신인 그와 눈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그녀의 행동에 호응해 주듯 레이신도 천천히 상체를 숙였다. 그 탓에 얼굴이 꽤 가깝게 맞붙었다.

빗소리조차 뚫고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애리얼의 시선이 그의 얼굴을 피해 비스듬히 사선을 그리며 바닥을 향했다.

무덤덤하던 레이신도 이런 거리에는 면역이 없는지 뺨이 발그스름해졌다. 그의 금색 눈 역시 애리얼을 피해 비스듬하게 엇나갔다.

그 상태로 이야기가 이어졌다.

“비도 오는데, 왜 나와 계셨어요?”

“너 보려고.”

매우 솔직한 발언이었다. 허공만 보던 애리얼의 눈이 곧장 그에게로 돌아왔다.

“……설마, 매일 여기에 나와 있으셨던 건 아니죠?”

“매일 있었어. 네가 언제 와 줄지 몰라서.”

“왜 그러셨어요…….”

“여기 말고 다른 데서는 네가 만나기 싫어할 거 같아서.”

“그렇다고 이렇게 무작정 기다리시는 건……. 전언이라도 보내시지 그러셨어요. 이렇게 기다리는 거 많이 힘드셨을 텐데.”

“안 힘들어. 너 기다리는 거니까…… 안 힘들어.”

레이신은 여전히 그녀의 시선을 피한 채로 대답했다. 구리색을 띤 피부가 발긋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는 가까워진 거리에 전혀 면역이 없는 반응을 보였다. 그 탓에 애리얼도 덩달아 이 좁은 거리가 의식되었다. 그의 얼굴에서 화끈거리는 열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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