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적이 내려앉은 순간이 어색해서 견딜 수 없었다.
애리얼은 쫓기듯 말을 꺼냈다.
“일단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으로 가는 게 좋겠어요.”
“알았어.”
그 답과 함께 그가 왼쪽 손목을 느리게 돌렸다. 손등에 문양이 나타나며 아름드리나무 주위로 투명한 결계가 쳐졌다. 낙인화술이었다.
반구형의 결계가 훌륭하게 빗물을 막아 내자 레이신은 우산을 접었다.
애리얼은 황당하다는 눈으로 결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할 수 있었으면서 왜 굳이 비를 맞으며 기다렸단 말인가.
“결계를 치고 기다리시지…….”
“칠 필요를 못 느꼈어.”
“비가 오는데도요?”
“그게 뭐가 문젠데?”
역으로 질문을 해 오는 그 때문에 애리얼은 할 말이 없어졌다.
‘뭐가 문제냐니……. 비를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맞지 않나?’
그녀는 제 상식이 잘못된 건가 싶을 정도였다. 의아해하는 얼굴로 레이신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얼굴을 붉힌 채 물러났다.
“일일이 결계를 치는 게 귀찮기도 하고. 비 정도는 맞아도 괜찮다고 생각해서.”
“그럼 지금 친 결계는…….”
“네가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을 원하는 거 같아서.”
그는 잔디밭을 향해 몸을 틀고는 고개를 숙였다. 홍조를 띤 그의 얼굴이 흘러내린 금발 아래로 사라졌다.
애리얼도 그를 더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선명한 애정의 증거가 부담스러웠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래도 다음부턴 말도 없이 기다리고 그러지 마세요.”
“그럼 어떻게 만나?”
잔디밭을 향했던 그의 몸이 다시금 애리얼에게로 돌려졌다. 그는 바닥을 향해 숙인 그녀의 정수리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애리얼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말을 이어 갔다.
“시종을 보내 편하신 곳으로 약속을 잡아 주시면, 제가 찾아갈게요.”
“넌 그러는 거 싫어하잖아.”
그가 무거운 목소리로 그녀의 제안을 일축했다. 아무리 눈치가 없고 감정에 둔해도 이 정도는 안다는 듯.
“그렇게 계급으로 찍어 누르고 통보하는 거, 싫어하잖아.”
애리얼은 부정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몇 번이고 그런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이 세계의, 제국의 방식이 그랬다. 철저한 계급주의. 자신보다 한참 높은 계급인 공략 대상들을 상대하며 온종일 말조심을 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래야만 했다. 고위 계급에게 입 한번 잘못 놀리면 감옥에 들어갈 수도 있는 게 이곳의 법도니까.
그나마 그들의 마음에 들고 나서야 몇 번 배짱을 부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전까지는 고개조차 제대로 들 수 없는 게 그녀의 처지였다.
저라고 무슨 일을 겪든 순종적으로 입을 닫고 싶었겠는가. 당연히 싫다. 원세계의 민주주의와 평등의 개념이 머릿속에 남아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목적을 위해서 모두 참았다. 특별 엔딩을 맞아 기억을 찾고 돌아가기 위해서. 잊어버린 소중한 것들을 위해서.
그러니까 하대를 받는 건 크게 상관없었다. 이제는 익숙하기도 했다.
“……괜찮아요. 이렇게 기다리시는 게 더 불편해요.”
그렇게 말하자 줄곧 무덤덤하던 레이신의 낯빛이 흐려졌다. 그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연다.
“네가 날 좋아하지 않는 건 알아. 어쩌면 당연하다고도 생각해.”
“…….”
“근데, 그래도 난 네가 좋아.”
느닷없는 고백이었다. 결계에 둘러싸여 빗소리마저 멀어진 가운데 그의 목소리만 또렷하다.
“설령 네가 날 싫어해도.”
애리얼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레이신의 음성이 그녀를 통렬하게 관통했다. 그도 이 정도 눈치는 있다는 듯이, 그녀의 속내를 넌지시 파악하여 내뱉었다.
애리얼은 숙인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가 싫은 것까진 아니었다. 그렇다고 좋은가? 그것도 아니다. 친구로서라면 그럭저럭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서하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어요.’ 목구멍까지 거절의 말이 차오른다. 그럼에도 그녀는 차마 뱉을 수가 없는 처지였다. 특별 엔딩을 맞을 때까지는 절대.
“생일 케이크…… 감사했습니다.”
애리얼은 끝내 대답을 미루고 말을 돌렸다. 침착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고개를 들고서 레이신과 마주했다. 어렵사리 올려다본 그는 무표정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금색 눈동자가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그의 표정을 읽기 위해 애쓰며, 애리얼은 주 용건을 꺼냈다.
“그래서 저도 서하께 생일 선물을 드리고 싶어요. 다만 여름 휴학기 중에는 일이 있어서 미리 드려도 괜찮은지, 양해를 구하고 싶습니다.”
“미리 주는 건 됐어. 내 생일날 줘.”
“하지만 그날은 선약이 있어 제가 서하를 찾아뵙기 어렵습니다. 죄송합니다.”
“누구와 선약이 있는데?”
레이신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왔다. 애리얼은 무심코 렉시우스를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이건 말해도 되는 사안인가.
레이신의 행동력을 생각하면 섣불리 언급하기가 망설여졌다. 자칫하면 그가 렉시우스에게 혹은 대공저에 찾아갈지도 모를 일이니.
“그건…… 말씀드릴 수 없어요.”
애리얼은 답변을 피했다. 그러자 그가 웬일로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황태자야, 황자야, 대공자야?”
“말씀드릴 수 없어요.”
“……알았어.”
더 집요할 것 같았던 레이신은 의외로 쉽게 수긍했다.
애리얼은 안도하며 선물을 건네기 위한 일정을 잡으려고 했다.
“그러면 일주일 뒤, 이 자리에서 선물을…….”
“그럴 필요 없어. 선물은 내 생일날, 내가 알아서 받으러 갈 테니까.”
애리얼이 말하는 도중, 그가 의미심장한 소리를 던지며 우산을 펼쳐 들었다. 그와 동시에 결계가 사라지며 빗소리가 쏟아졌다. 어느새 빗줄기는 더 거세져 있었다.
쏴아아-
세찬 빗방울이 우산 안쪽으로 조금 튀었다. 작은 물방울들이 애리얼의 흑발을 적시고 얼굴까지 닿았다.
그 탓에 애리얼은 그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네? 언제 받으러 오신다고요?”
레이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한 손으로 우산을 쥐고서 다른 손으론 그녀의 뺨에 묻은 물방울을 조심스럽게 훔쳐 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애리얼이 흠칫 몸을 빼려고 한 순간이었다.
“질투라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그의 저음이 아득히 울리고, 애리얼의 시야가 전환되었다.
우레처럼 사납던 빗소리가 한풀 꺾였다. 대신 투두둑,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깥보다 확연하게 옅은 습도. 익숙한 책상과 침대가 보였다. 2인용의 기숙사 방.
‘순간 이동…… 한 거구나.’
그것도 레이신에 의해서, 자신만.
애리얼의 눈이 절로 창밖을 향했다. 저 거센 빗발 속에 아직 레이신이 있을까.
『레이신 디 솔렘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과 깊은 관계가 되고 싶어 합니다. 당신을 쫓아다니고, 붙잡고 싶어 합니다.)
▷현재 위치: 제3 기숙사 동 - 후원』
혹시나 해서 켠 휴대폰 화면에는 여전히 그대로인 그의 위치가 떠올랐다. 그나마 그의 손에 우산이 들려 있다는 게 위안이었다.
혼자 남아 뭘 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할 즈음 그의 초상화가 움직였다. 천천히 후원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느리게 이동하는 그의 초상화를 보며, 애리얼은 조금 전의 상황을 상기했다.
“그럴 필요 없어. 선물은 …… 받으러 갈 테니까.”
말의 중간, 결계가 사라지며 쏟아진 빗소리 탓에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문장. 중요한 부분이 뚝 끊겨 의미를 알 수 없게 되었다. 결계를 거둔 타이밍이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받으러 가다니, 어디로?’
머리를 굴려 보아도 명확한 결론이 도출되지 않았다.
‘설마 백작저로 오겠다는 건가?’
애리얼은 그의 성격을 고려해 추측을 이어 나갔다. 얼추 짐작은 가능했으나,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전후 대화를 정리해 보면 추론이 쉬워질까…….
“난 네가 좋아.”
“설령 네가 날 싫어해도.”
머리를 굴리자 대화 내용 중 가장 난감한 것부터 떠올랐다.
마음이 복잡해진 애리얼은 화면을 끄고 그의 초상화를 시야에서 지웠다.
‘이미 알고 있었잖아.’
그녀는 냉정해지려고 했다. 하트 세 개를 채우기 위해서 ‘호감도 피버 타임’까지도 사용하지 않았었나. 레이신이 적극적으로 나올 것은 어느 정도 예상한 바였다. 그러니 동요할 필요는 없다. 특별 엔딩을 위해선 상대가 어떻게 나오든 무덤덤해질 필요가 있었다.
애리얼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서 눈을 돌렸다. 시커먼 하늘처럼 그늘진 방. 적막이 그녀의 주변을 쓸쓸하게 에워쌌다.
휘아킨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혹시나 하며 애리얼은 잠시 문을 주시했다. 그러다 이내 시선을 책상으로 옮겼다. 급히 나가느라 노트를 펼쳐 두고 갔던 것이 뒤늦게 생각났다. 고위 계급의 인물들을 이름으로 지칭해 적은 것이 마음에 걸렸다. 페이지를 따로 처리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애리얼은 책상 위로 손을 뻗어 글자가 적힌 페이지를 쥐었다. 그대로 찢어 버리려는데 문득 못 보던 것이 눈에 띄었다.
「레이신 7월 17일
렉시우스 9월 10일
스카이라 11월 11일
데본시아 12월 31일
4월 5일」
정자로 또박또박 쓰인 글씨 아래, 필체가 확연히 다른 글씨가 보였다. 필기체로 우아하게 쓴 ‘4월 5일’이라는 날짜. 공략 대상들의 생일이 주르르 나열된 아래, 강조하듯 한 줄을 띄우고서 적혀 있다.
누가 쓴 것인지, 또 무슨 날을 의미하는 날짜인지, 오래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블랑셰…….”
아니, 휘아킨.
그리고 4월 5일.
그의 생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