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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73)화 (254/264)

몇 시간 전.

휘아킨은 비상용 마도구를 써서 아리앨라를 불렀다. 이윽고 좁은 샤워 부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그는 비척비척 움직여 문을 열었다.

아리앨라는 온통 젖어 있는 휘아킨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이.

“일단은 저택으로 가요. 상태가 아주 나쁘신 것 같으니 연결 통로까지는 순간 이동 할게요.”

휘아킨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공작저의 별관에 들어서자마자 이어링을 제거했다. 욕실에 들어서기도 전에 교복을 반쯤 벗어 냈다. 갑갑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냉수로 얼굴을 씻어 내고 대충 가운만 걸친 채 아리앨라와 마주했다.

“이렇게 살기 싫어요.”

그가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본심을 내뱉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리앨라는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가 설득을 위한 설명을 얼른 덧붙였다.

“상대방의 인식까지 저해하려면 어쩔 수 없어요. 이것보다 부작용이 덜한 마도구는 위장의 수준도 떨어져서 그만큼 들킬 확률이 높으니까요.”

“알아요. 그래서 싫다는 거예요.”

평소답지 않게 신경질적인 말투였다. 아리앨라는 더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눈을 내리깐 채 심호흡을 하다가 침실로 들어갔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가 흘렀다.

한 번 제거한 이어링의 재사용 대기시간이 충분히 지났다.

어느 정도 진정된 휘아킨은 다시 복귀할 준비를 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리도 싫어하던 이어링을 채우고 블랑셰의 모습으로 변해 교복을 입었다.

아리앨라에게는 휘아킨의 정신력이 경이롭게 느껴지는 동시에 미련하게도 보였다.

“그냥 방을 바꾸시는 게 어때요?”

“싫어요.”

단호히 답한 그는 차분히 가라앉은 얼굴로 별관을 나갔다. 연결 통로를 지나 기숙사의 방으로 돌아오자 룸메이트인 선배는 없고 책상 위에 펼쳐진 노트만 보였다.

「레이신 7월 17일

렉시우스 9월 10일

스카이라 11월 11일

데본시아 12월 31일」

솔렘 공자, 대공자, 황자, 황태자를 줄줄이 이름으로 표기해 놓은 옆에 적힌 날짜. 무하 공작가에서도 챙기던 고위 계급들의 생일이다.

휘아킨이 펼쳐진 페이지를 손끝으로 꾹 눌렀다. 날짜의 의미를 알게 되자 기분이 묘해진다.

애리얼은 이걸 챙기기 위해서 적은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의미가 있을까.

노트를 뚫어지게 보던 휘아킨의 미간이 좁아졌다. 저를 쏙 빼놓은 것에 심통이 나서 펜을 들었다.

「4월 5일」

그는 날짜 앞에 제 이름을 적어 놓지 않았다. 블랑셰라고 적고 싶지는 않은데 휘아킨이라고 적을 수도 없어서. 당당히 적힌 이름들 아래에 유령처럼 날짜만 남겨 놓았다.

비참한 기분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속이 역해지는 느낌. 또다시 가슴이 갑갑해져서 이어링을 만지작거렸다. 이대로 있으면 안 된다.

휘아킨은 이마를 세게 문지르며 생각을 날리려 애썼다. 이 상태로 또 선배와 마주하면 아까와 같은 상황이 반복될 것이다. 차라리 나가는 게 좋겠다.

그는 곧장 방문을 박차고 나서서 밖으로 향했다. 지나다니는 길목마다 시선이 집중되는 게 불쾌했다. 출입문에 놓인 우산 중 하나를 적당히 뽑아 들고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했다. 마침 후원이 조용해 보여서 그쪽으로 갔다. 순전히 우연이었다.

아름드리나무 아래 나란히 선 애리얼과 솔렘 공자를 발견한 것도 우연이었다.

휘아킨의 눈동자가 세차게 떨렸다. 그 둘을 발견한 순간 그의 가슴은 질투로 들끓었다. 이어링이 감정을 억누르려고 부하를 걸었다. 어느새 숨이 가빠졌다. 그럼에도 그는 멈추지 않고 나아갔다. 눈에 뵈는 게 없어진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선배와 붙어 선 솔렘 공자가 싫었다. 떼어 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갑자기 펼쳐진 결계가 그의 접근을 막았다. 겉보기론 유리처럼 투명하나 외부의 인기척까지 지우는 결계였다. 내부에서 보면 풍경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선배는 저를 보지도 못할 터였다.

휘아킨은 떨떠름한 얼굴로 걸음을 멈추었다. 마저증만 아니었어도 이따위 결계, 깨 버리는 거였는데.

호흡이 불규칙하게 씨근거렸다. 그럼에도 그는 결계 안을 노려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도무지 발길을 돌릴 수 없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 왜 저러고 있는 걸까. 설마 좋아하는 사이인 건가.

선배의 노트에 솔렘 공자의 이름이 가장 위에 올라와 있었던 게 떠올랐다.

질투가 극에 달해 구역감이 밀려왔다. 갑갑함에 심장이 멎는 듯하다. 버티다 못한 휘아킨은 잔디밭으로 고꾸라졌다. 놓쳐 버린 우산이 휘이잉 날려 저 멀리 떨어졌다. 무방비하게 노출된 그에게로 비가 쏟아졌다.

그는 축축한 땅에 무릎을 꿇고서 연신 숨을 몰아쉬었다. 얼른 선배를 봐야 하는데……. 휘아킨은 온 힘을 다해 겨우겨우 숨을 고른 뒤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미 애리얼은 그 자리에서 사라져 있었다. 대신 노란색 눈을 빛내는 솔렘의 공자만이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과 마주하자 휘아킨은 오히려 감정이 식는 걸 느꼈다.

폭발적인 충동은 매개가 있어야 타오른다. 당장 애리얼이 없는 지금은 질투보단 적의가 강했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적의는 질투보다는 냉정한 감정이었다. 차갑게 변모한 그는 표정 없이 레이신을 주시했다.

블랑셰의 모습을 한 탓에 레이신은 그의 신원을 알지 못했다. 하긴, 원래의 모습을 했어도 레이신이 휘아킨을 알아볼 확률은 거의 없었다.

레이신이 무심한 것과 별개로, 휘아킨은 사교계에 얼굴을 비친 적이 없었다.

무하 공작은 마저증인 아들을 창피하게 여겨 그를 외부로 내보낼 땐 신분과 성별까지 위장시켰다. 공작저의 사람들은 그걸 두고 과보호의 일종이라고 둘러댔으나, 어쨌건 정상적인 행동은 아니었다. 그녀는 아들을 사람이 모이는 자리에 데려가지 않았다. 휘아킨은 위장 신분인 블랑셰 멜로르로만 밖을 다닐 수 있었다.

그래서 누구도 블랑셰가 휘아킨이라는 걸 알아보지 못했다. 위장 신분 아래의 본체인 휘아킨이 어떤 인물인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레이신이 빗속에서 우산을 쓴 채 그의 가까이 다가왔다. 휘아킨은 고개조차 숙이지 않고 능청스럽게 그를 대했다.

“솔렘 공자 서하를 뵙습니다.”

“애리얼의 룸메이트…….”

“예, 맞습니다, 서하.”

“이런 빗속에 뭐 하고 있는 거지?”

“지나가던 길이었습니다.”

“처량한 꼴인데.”

레이신의 말투에는 가시가 박혀 있었다. 다분히 견제하는 어투였다. 여자의 모습을 했는데도 저러고 나온다니. 휘아킨은 킥 웃음을 흘렸다.

“불쌍하면 우산이라도 빌려주시죠?”

“안 돼. 이건 애리얼이 나한테 준 거라서.”

그 와중에 이름까지 언급하면서 소유욕을 드러냈다. 그를 바라보는 휘아킨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질투로 드러난 선명한 적의를 숨기지 못했다.

그 시선을 정면으로 맞닥뜨린 레이신은 조금 당황스러워졌다. 왜 저런 눈을 하지? 꼭 스카이라처럼…….

“너, 애리얼 좋아해?”

레이신이 묻자, 휘아킨은 푸핫, 웃음을 터트렸다.

“아, 미친. 그렇게 티 났어요?”

“…….”

“하긴 책에서도 질투는 숨기기 어렵다고 하던데, 나도 그런가 보네.”

하하, 웃어 대는 그 모습에 레이신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여자도 홀리는 건가.”

그 소리를 듣고서 휘아킨은 웃음이 뚝 멈췄다. 멍하니 얼이 빠졌다. 그러나 이내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여자라…….

“내가 정말 처량한 꼴이긴 하네요.”

휘아킨의 높은 목소리가 공허하게 빗속으로 퍼졌다. 이 목소리조차 제 목소리가 아니었다. 경쟁자로 인식되지도 못하는 신세. 아하하, 허탈하게 웃고는 먼저 몸을 돌렸다. 레이신을 뒤에 내버려 두고서 기숙사로 향했다. 경쟁자로도 인식되지 못해 기분이 바닥을 쳤다.

그는 전신이 다 젖은 채 기숙사 계단을 올랐다. 복도에 물방울을 뚝뚝 흘리며 방으로 직진했다. 그대로 문을 열었다.

노트를 보고 있던 애리얼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물을 뚝뚝 흘리며 서 있는 그를 보고서 안 그래도 커다래진 두 눈이 더 크게 뜨였다.

“……블랑셰?”

그는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서 애리얼에게로 걸어갔다. 애리얼이 걱정스러워하며 그를 살폈다.

“누가 괴롭혔어?”

“……네.”

힘없이 대답하자 그녀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서 괴롭힌 인물을 대신 처단해 줄 듯이.

그 얼굴을 보고 있으니, 휘아킨은 제 속에 들끓던 질투와 비참함이 조금 가시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약한 척을 해서라도 저 관심을 독차지하고 싶었다. 저 선의를 오로지 자신만 누릴 수 있도록.

“누구야? 또 기숙사 애들이 그랬어?”

“아뇨, 선배님.”

휘아킨은 한껏 심각해진 애리얼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섰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걱정으로만 가득 차서 그를 염려했다. 그가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른 채.

“화내실 필요 없어요. 그냥…….”

기운 없는 목소리를 내며 지친 표정을 지으니, 그녀가 약해졌다. 휘아킨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팔을 벌렸다. 축축하게 젖은 몸으로 그녀를 꽉 껴안고, 그녀의 가녀린 목과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애리얼의 몸이 놀란 듯 굳어졌다.

휘아킨은 조금이라도 거절당할까 겁을 내는 것처럼 악착같이 달라붙었다.

“조금만 안아 주세요.”

애처롭게 조르며, 동성의 후배로서 부릴 수 있는 어리광을 부렸다. 그러자 그녀는 조금 망설이는 듯하다가 그의 등을 감싸 안았다.

휘아킨은 마주 안아 주는 그 팔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충만감을 느꼈다. 동시에 온 신체가 감전된 듯 찌르르 울리는 느낌을 받았다. 책에서 봤던, 짜릿하다고 표현하는 그런 감각.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그 직후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의 갑갑함이 그를 덮쳤다.

최근에 자주 겪은 지긋지긋한 이어링의 부작용.

휘아킨은 힘겨워지는 호흡을 억지로 감추며 매달리다시피 그녀를 붙들어 안았다. 놓고 싶지 않았다. 조금만 더 안고, 선배를 누리고 싶은데.

으윽, 고통에 찬 신음이 목구멍에서 억지로 삼켜졌다.

‘아직 싫어. 조금만, 조금만 더.’

그러고 버텼더니 사지가 가늘게 떨려 왔다. 숨이 거의 쉬어지지 않았다.

애리얼마저 느낄 정도였다. 그녀가 놀란 얼굴로 그의 등을 조심스럽게 쓸어 주며 물었다.

“괜찮아?”

“…….”

“왜 이렇게 자꾸 떨고……. 어디 아픈 데 있어? 보건실에 데려다줄까?”

“…….”

“일단 옷부터 갈아입을래?”

“……네.”

그는 힘겹게 그 한마디를 뱉어 내고는 애리얼에게서 떨어졌다. 비틀거리는 걸음이 위태로워 보였다. 애리얼이 부축해 주려고 손을 뻗었으나 그가 밀어냈다.

“괜찮아요.”

말과 달리 그는 전혀 괜찮지 않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겨우 꺼낸 목소리도 볼품없이 떨렸다.

휘아킨은 누가 봐도 도움이 필요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그는 애리얼이 건네는 손을 한사코 거부하며 욕실로 들어갔다. 문을 닫자마자 곧장 세면대의 수전을 틀었다.

떨어지는 물소리에 휘아킨은 막혔던 숨을 토해 냈다. 허억, 헉. 호흡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돌이라도 든 것같이 무거워진 가슴팍을 부여잡았다. 아리앨라 클라우스를 부를까. 고민하며 쥐어뜯듯이 리본을 빼내고 셔츠를 찢듯이 벗었다. 뜯겨 나간 단추가 타일 바닥을 굴렀다.

그는 그대로 옷을 벗어 내고는 벽면에 걸린 가운을 걸쳤다. 학생용으로 1인당 하나씩 배부되는 가운이었다. 앞섶을 여미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딱 죽을 만큼이었다. 손이 신경질적으로 이어링으로 향했다. 망설임 하나 없는 동작으로 이어링을 뺐다. 호흡이 막혀서, 순전히 본능에 따른 행동이었다.

이어링이 떨어져 나감과 동시에 폐부를 짓누르던 압박감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기다랗던 머리칼이 짧아지고, 가녀리기만 하던 몸은 확연한 남자의 것으로 변모했다. 진한 해방감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아, 흐으…….”

흐느낌과 같은 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부작용을 꽤 오래 견딘 탓에 순간적으로 힘이 빠졌다.

무너지려는 몸을 지탱하기 위해 세면대를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손이 엇나가며 옆에 있던 선반을 세게 치고 말았다.

쾅!

약한 선반이 그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큰 소음을 내며 기울었다. 위에 있던 각종 세면도구가 우르르 떨어졌다. 개중에는 양치용 유리컵도 있었다.

와르르르, 챙그랑! 챙강!

갖가지 것들이 요란하게 쏟아지고 유리 깨지는 소음이 시끄럽게 울렸다.

그리고 그때, 욕실 문이 열렸다.

“블랑셰!”

사색이 된 애리얼이 욕실로 들이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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