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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74)화 (255/264)

그가 쓰러지기라도 한 줄 알았는지 걱정이 가득한 검은색의 눈동자가 보였다. 블랑셰가 아닌 그의 본모습을 담고서 휘둥그레졌다. 당황한 듯 그녀의 입이 벌어졌다.

휘아킨은 그제야 자신이 문을 잠그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선반을 어정쩡하게 짚은 자세 그대로 그녀와 마주했다.

이 꼴을 들켰으니, 그녀가 얼마나 당황할지 우려스러웠다. 크게 분노할 수도 있었다.

그는 긴장한 채 세면대로 기울어 있던 상체를 천천히 세웠다.

애리얼은 표정도 없이 선 자리에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그러다 이내 정신을 찾았다.

“아, 미안.”

몹시 당황한 애리얼은 곧장 문을 닫고 나가려 했다.

하지만 휘아킨이 그녀를 제지했다. 빠르게 튀어 나가 닫히려는 욕실 문을 잡아 멈췄다.

문고리를 쥐고 있던 애리얼이 놀란 얼굴을 했다. 들킨 건 그인데, 오히려 그녀가 뭔가를 들킨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방금 남자인 그를 발견했을 때의 반응도 상당히 심심했다. 당황한 모습을 보이기는 했으나, 단순히 당황하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 될 모습이 아닌가. 솔직히 비명을 질러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애리얼은 그냥 당황하는 데 그쳤다.

‘블랑셰의 모습이 아닌 무하 공자로서의 모습을 했는데, 그럴 수가 있나.’

휘아킨은 묘한 의문에 사로잡혔다.

너무 당황해서 그렇다기엔, 이어진 반응이 도망치는 데 가까워서 의심스러웠다. 원래라면 그를 추궁해야 옳은 일이었다. 하다못해 의문이라도 가져야 했다. 블랑셰는 어디 가고 네가 있냐. 이게 무슨 상황이냐. 최소한 왜 그쪽이 여기에 있냐는 질문이라도 던져야 했다. 그런데 그녀는 무엇도 묻지 않았다.

오히려 미안하다고 말했다. 봐선 안 될 걸 보고 말았다는 듯이. 지켜 줘야 할 비밀을 들춰 버렸다는 양.

“뭐예요, 그 반응.”

“……뭘?”

애리얼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 왔다. 오히려 그녀가 추궁당하는 듯하다. 너무 놀라서, 당황해서, 그녀 쪽이 오히려 표정 관리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왜 저럴까. 속인 건 저인데.

그녀의 연흑색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보고서, 오히려 휘아킨이 의문을 가졌다. 그녀가 곤란할 질문을 던졌다.

“설마…… 알았어요? 나 남자인 거.”

확신하는 듯한 말투.

애리얼은 아무 반박도 없이 잠깐 침묵했다.

정답이었나.

완연한 소년으로 변모한 휘아킨의 얼굴이 유려한 미소를 지었다.

“알고 계셨구나?”

그가 장난치듯 한 발짝 다가왔다. 애리얼은 놀라서 문고리를 놓고 물러났다.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자 그가 웃으며 욕실 밖으로 따라 나왔다.

“언제부터 알았어요?”

“……몰랐어.”

“거짓말.”

휘아킨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아무리 부정한들 그는 도무지 믿어 줄 것 같지 않았다. 그럼에도 애리얼은 끝까지 시치미를 떼려고 했다.

“정말이야. 방금 알았어. 네가 그…… 신원을 숨기고 있었다는 거.”

“정말 몰랐다고요?”

애리얼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인정하면 어떻게 알았는지 역으로 질문을 받을 게 뻔하니까. 차라리 모르는 체하는 게 더 편하리라고 여겼다.

그러나 휘아킨은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훌쩍 높아진 시선으로 애리얼을 내려다보며 싱긋 웃는다. 블랑셰의 모습일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났다.

“선배님, 거짓말 되게 못하시네요.”

그는 확신에 찬 말투였다. 애리얼은 심장이 멎는 듯했다.

이제 어쩔까. 다 들통난 거짓말을 밀고 나가며 끝까지 그의 말을 부정해야 할지, 아니면 인정하고서 적당히 둘러댈지, 둘러댄다면 어떤 말로 둘러대야 할지. 그 짧은 순간에 오만 가지 생각이 그녀의 뇌리를 훑고 지났다.

하지만 상황은 그녀가 고민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우우우웅-

불행은 겹친다고 했던가.

하필이면 이런 순간에 휴대폰이 울렸다. 아마 접근 알림일 것이다. 문 너머에서 접근하는 발소리가 들렸으니까.

애리얼은 마른침을 삼키며 문 쪽을 곁눈질했다.

‘누구지?’

일정하면서도 약간 급한 듯이 빠른 걸음 소리가 정확하게 방으로 다가왔다.

휘아킨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문을 흘금거렸다. 하지만 애리얼과 다르게 긴장한 기색은 없었다. 들키면 더 곤란할 것은 그인데, 오히려 여유롭다. 올 테면 와 보라는 듯 느긋하게 팔짱을 끼고서 벽면에 기댔다.

“안 숨어?”

애리얼이 목소리를 낮춰서 물었다.

그러자 휘아킨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글쎄…… 그런다고 안 들킬까요?”

그의 시큰둥한 반박이 끝남과 동시에 바깥의 발걸음이 문 바로 앞에서 멈췄다.

보다 못한 애리얼은 여전히 숨을 기색이 없는 그를 욕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공교롭게도 저번에 렉시우스가 찾아왔던 때와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다만 이번에 숨는 쪽은 휘아킨이었다.

그는 애리얼의 손에 쉽사리 밀려나 욕실로 들어갔다. 그녀가 어떻게 할지 흥미를 느끼는 듯했다.

나오지 마. 애리얼이 소리 없이 입만 움직여 전했다.

똑똑똑.

노크 소리가 울리자 애리얼은 냉큼 욕실 문을 닫았다.

“누구세요?”

“애리얼.”

스카이라의 목소리였다. 왜 온 걸까. 애리얼은 눈동자를 굴리며 문고리를 쥐었다. 왼손으로 쥔 탓에 잊고 있던 브레이슬릿을 마주했다. 며칠 전 그에게서 받은 귀중한 물건.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남긴 유품. 너무 귀중해서 잃어버릴까 봐 감히 어디 빼놓지도 못했다.

애리얼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심호흡을 하고는 문을 열었다. 사람이라곤 사용인조차 없는 조용한 복도에 스카이라가 서 있었다.

“황자 저하를 뵙습니다.”

애리얼은 고개를 숙였다. 그 사이 스카이라의 푸른 눈동자는 그녀의 뒤쪽, 기숙사 방 안을 확인했다.

불안해진 애리얼은 급히 말을 꺼냈다.

“저하께서 여기까지 무슨 일이세요?”

“남자 목소리가 났어.”

스카이라는 애리얼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느라 혈안이 돼 있었다.

애리얼은 스카이라가 방 안으로 들이닥치기 전에 문을 닫고 복도로 나왔다.

스카이라의 눈은 여전히 방 쪽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눈빛이 아주 문을 뚫고 들어갈 기세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저하?”

애리얼은 대응에 조금 더 격을 갖추었다. 그제야 그의 시선이 애리얼에게로 와 닿았다. 그의 잘난 얼굴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그녀의 언행이 못마땅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기색을 얼굴에 그대로 드러냈다. 그녀가 예를 갖출수록 그는 더 싫어했다.

“누구야?”

“룸메이트예요.”

“남자 목소리였어.”

“룸메이트의 목소리예요. 비를 맞아서 감기가 든 것 같은데, 목소리가 갈라져서 그렇게 들린 건지도 몰라요.”

“내가 등신으로 보여?”

“아니요.”

애리얼은 담담한 얼굴로 끝까지 시치미를 뗐다. 여기서 들키면 휘아킨은 끝이었다. 마법으로 신원을 감추고 아카데미에 입학한 건 중징계가 내려질 사안이니까. 아무리 그가 제국 3대 공작가의 자제라 한들 처벌을 피하기는 어렵다. 설상가상 무하 공작가마저도 그를 외면할 가능성이 컸다. 아무렴 휘아킨이 따돌림을 당하는데도 손 놓고 있던 게 그들이었으니.

‘무슨 사연으로 위장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스카이라한테 들키는 건 막아야 해.’

애리얼은 당장이라도 문을 열어젖힐 것만 같은 스카이라의 손목을 잡았다.

갑작스러운 접촉. 그것도 흔치 않게 애리얼의 쪽에서 먼저 한 접촉이었다.

스카이라가 몹시 당황하여 뺨을 붉혔다. 고작 이 정도 접촉에도 저리 동요할 줄이야. 애리얼마저 덩달아 부끄러워져서 고개를 숙였다.

“이곳은 여학생 기숙사입니다. 일단은 장소를 옮겨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떻습니까, 저하.”

“……응? 아, 어, 그래.”

그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애리얼은 그를 이끌고 잰걸음으로 층계를 내려갔다.

그렇게 두 사람분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휘아킨은 욕실을 나왔다. 젖은 교복을 세탁물 바구니에 넣고는 침대에 앉았다. 이어링은 다시 착용한 상태였으나 아직 소년의 모습이었다. 위장 마법이 재차 발동되려면 사오십 분은 더 지나야 했다.

곤란한 상태에 놓였을 애리얼을 도우러 갈 수는 없었다.

하릴없이 방에 갇힌 그는 방금의 상황을 상기했다. 문득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감기에 들어서 목소리가 갈라진 것 같다고?’

다시 생각해 봐도 어이가 없었다. 황자를 상대로 누가 들어도 거짓말 같은 해명이라니.

그의 거짓말을 알고서도 그를 위해, 그런 식으로 나서 줄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선한 건지, 호구인 건지. 그는 애리얼 허클리가 신기했다. 황자에게 잘하지도 못하는 거짓말을 어설프게 늘어놓는 그녀를 떠올리자 가슴이 찌릿해졌다.

이런 거로도 기분이 좋을 수 있구나.

애정은 참 솔직하고 단순한 감정이었다. 심지어 맹목적이기까지 하니 바보가 되기 딱 좋았다.

그래서 황자도 그런 건가.

황자는 애리얼 허클리의 허접한 거짓 해명을 알고서도 추궁을 멈췄다. 한술 더 떠 자리를 바꾸자는 그녀의 요구에 순순히 응하기까지 했다. 눈치도 꽤 빠른 인간이 압도적인 지위를 갖추고도 저리 흔들리다니.

잠깐의 상황 속에서도 누가 감정의 우위에 있는지가 여실히 드러났다.

‘선배님, 생각보다 인기가 많구나.’

휘아킨은 한쪽 다리를 세우고 무릎에 턱을 괴었다. 흐음, 미묘한 신음이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황자가 애리얼 허클리에게 자비로운 것은 그녀에게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황자가 이 방에 몇 번 찾아왔던 것도 사심 때문이었던 건가?

휘아킨은 일전의 일을 상기하며 스멀스멀 불쾌감에 휩싸였다. 황자는 그가 낮잠을 자는 시각에 이 방으로 종종 시녀나 보좌관을 보냈었다. 몇 번은 직접 찾아오기까지 했다. 황자가 그렇게나 집요했던 이유를 알게 되자 기분이 말도 못 하게 더러워졌다.

‘몰랐는데…… 내가 생각보다 질투가 강하네.’

저도 모르게 어금니를 사리물던 휘아킨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솔렘 공자도 싫고 황자도 싫다. 그들이 저보다 먼저 애리얼 허클리를 좋아했다는 게 너무 거슬렸다. 특히나 지금도 그녀와 함께하고 있을 황자가 더없이 신경 쓰여서 짜증이 났다.

그는 신경질을 부리듯 인상을 찌푸렸다. 오른쪽 귀의 이어링을 만지작거리다 뽑아냈다.

적어도 오늘은 온전히 휘아킨 무하로 있고 싶었다. 그는 뽑아낸 이어링을 손안에서 굴리며 고민했다. 아예 이번 주말까지 남자로 지내면 어떨까. 방 밖으로만 나가지 않으면 그만이고, 정 급하면 다른 마도구를 써도 되고.

곤란해하며 저를 신경 쓸 선배님을 독점하고 싶었다.

저를 걱정하며 안절부절못할 그녀를 떠올리니 기이하게도 쾌감이 몰려왔다. 대외적으로는 블랑셰라는 가짜 신분을 지녔기에 누릴 수 있는 그만의 특권이었다. 솔렘 공자나 황자는 할 수 없는 일이다.

휘아킨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성별까지 바꿔야 했던 자신의 처지가 서러웠는데, 지금은 또 이렇게 이득이 된다.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선배님께 어떻게 어리광을 부릴까.’

휘아킨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그녀를 난처하게 할 거짓말을 상상하니 가슴이 설레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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