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리얼은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나비 박제들을 보았다. 온갖 색으로 빛나는 갖가지 나비 날개. 눈이 따가울 정도로 화려했다. 그 아래, 마호가니 가구 위에 장식된 알 공예도 호화찬란했다.
황성의 별관, 황후가 생전에 자주 쓰던 방이었다. 하필이면.
그녀는 괜스레 왼 손목의 브레이슬릿이 신경 쓰였다. 사자(死者)의 물건을 품고 그 사자의 방에 있는 이 상황이 상당히 불편했다. 아무도 없는데 자꾸만 눈치가 보였다.
이곳으로 안내한 것도 이 브레이슬릿 때문일까.
“어쩌다 내가 여길…….”
애리얼은 주변을 구경하다가 멍하니 감상을 뱉었다.
스카이라의 손목을 잡고 나설 때까지만 해도 기숙사를 나설 생각은 없었다. 여기까지 오리라곤 상상치 못했다.
처음에는 그저 인적이 드문 곳에서 적당히 대화를 끝낼 생각이었는데, 일이 꼬였다. 가만히 붙잡혀 따라오던 그가 어느 순간 앞서 걷기 시작한 게 시발점이었다. 기숙사의 2층 복도에 도달했을 즈음이었다. 스카이라는 앞장서 그녀를 데리고 기숙사를 나갔다. 기다리고 있던 세단이 그녀를 태웠다. 세단은 그대로 황성으로 향했고, 애리얼은 내리자마자 여기로 안내받았다.
스카이라는 애리얼을 이 방에다 데려다 놓고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녀가 혼자 있는 동안 시녀가 차와 다과를 간단히 차려 왔다. 특별히 배가 고프지 않았던 애리얼은 다과에 손도 대지 않았다. 연분홍빛을 내는 찻물만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십 분 정도가 흐르자 스카이라가 응접실로 돌아왔다.
그는 건드린 흔적도 없는 다과를 보고 눈썹을 찡그렸다. 그래도 자리에 앉아 애리얼과 마주할 때는 인상을 폈다.
“다른 거로 내오라고 할까?”
“괜찮아요.”
“손도 안 댔잖아. 새로 준비할게. 좋아하는 거 말해 봐.”
“별로 먹고 싶지 않아요. 말씀은 감사합니다.”
애리얼의 거절에 그는 순간적으로 미간을 구겼다. 하지만 금세 무표정을 되찾았다.
“알았어. 나중에 먹고 싶어지면 말해.”
“네.”
그렇게 답하고 나자 잠시 대화가 끊겼다. 애리얼은 가만히 앉아서 그가 용건을 꺼내길 기다렸다. 아래 계급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경청의 자세였다.
스카이라는 계급에 맞추어 잘 처신하는 애리얼을 못마땅하게 느꼈다. 그녀가 제 이름을 부르고 반말까지 하던 때가 먼 과거 같았다. 못내 아쉬워서 테이블만 톡톡 두드리다가 입을 열었다.
“아까 방에서 들리던 목소리.”
그 주제를 말하자 애리얼의 안색이 잠시 흐려졌다. 이 이야기를 피하고 싶은 게 분명했다.
그래서 스카이라는 더 신경이 쓰였다. 그녀가 있던 방에서 들린 음성은 분명 남자의 것이었다. 여자 기숙사인데도 불구하고 그딴 목소리가 들렸다. 데본시아나 렉시우스는 아니었다. 레이신도 아니다. 들어 본 적 없던 미성이었다. 그래서 더 미칠 것 같았다.
대체 누구인가. 누구와 그 좁은 방에 함께 있던 건가. 질투심에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바른대로 말해.”
“…….”
“누구야?”
“룸메이트였어요.”
“블랑셰 멜로르?”
“네.”
애리얼은 순순히 긍정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스카이라는 두통이 이는 듯 이마를 짚었다. 블랑셰 멜로르라고. 걔의 목소리가 그런 소년 같은 음성이었나.
믿을 수가 없었다.
“근데 걔는 황족이 왔는데도 왜 얼굴 한번 안 비치고 있었던 건데?”
“비를 맞는 바람에 욕실에서 씻고 있었어요. 차마 나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물소리도 없었는데, 왜 자꾸 거짓말해?”
“몸을 닦고 있었나 봐요.”
하, 그가 어이없다는 한숨을 탁 내쉬며 고개를 젖혔다.
“아주 그냥 변명이…….”
“스카이라.”
애리얼은 추가적인 의심을 피하고자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제야 스카이라가 짜증을 부리던 입을 다물었다. 이마를 짚던 손이 얼굴을 쓸고 내려와 화급히 입을 가렸다. 올라간 입꼬리를 감추기 위해서였다.
고작 이름 한번 불렸다고 저렇게나 노골적으로 반응한다.
이때다 싶어서 애리얼은 얼른 화제를 돌렸다.
“무슨 일로 내가 있는 기숙사까지 온 거야?”
내친김에 반말로 질문을 하자 그는 좋아 죽는 얼굴이었다. 괜스레 애리얼만 가책을 느꼈다. 그의 감정을 이용한 꼴이 되어 미안했다. 휘아킨의 존재를 추궁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지만, 양심에 찔렸다.
스카이라는 히죽 올라간 입꼬리를 간신히 수습하고서 용건을 말했다.
“혹시 클라우스 백작이라고 만난 적 있어?”
“응. 내 사촌이야.”
“무슨 일로 만났는데?”
“그냥…… 사촌이니까…….”
애리얼은 하마터면 마법을 가르쳐 준 스승이라고 말할 뻔했다. 아리앨라는 아카데미에서 영구 제명을 당한 인물이었다. 가까스로 둘러대서 망정이지, 함부로 언급했다간 애리얼은 물론이고 무하 공작가까지 의심을 받을 수 있었다. 지금의 애리얼은 고위 계급의 주변에서 두 번이나 폭발을 일으킨 특별 감시 대상이기에. 그냥 사촌이라면 몰라도 스승이라면 애리얼을 지원한 혐의를 받게 되니까. 아리앨라가 마법사로서 몸담은 무하 공작가도 자연스레 의심의 대상이 된다.
그러니 아리앨라의 이야기를 할 때는 말을 잘 골라야 했다.
“그런데 클라우스 백작님에 대한 건 갑자기 왜 물어?”
“그 백작이 오늘 황성에서 재판을 받았거든.”
“재판? 무슨 일로?”
애리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물었다.
“네게 통칭 ‘파멸의 기원’을 지원하여 테러 행위에 준하는 폭발 사건에 일조한 혐의로 불려 왔어.”
“파멸의…… 기원?”
“총의 형태를 한 마도 병기. 총신은 검고 개머리판 부근은 흰색으로 되어 있어. 살상력이 지나치게 높아 제국에서 금지한 무기야. 소유하는 것만으로도 처벌을 받을 수 있고.”
그의 설명에 애리얼은 헛숨을 들이켜다가 입을 틀어막았다. 총신이 검고 개머리판이 백색인 저격 총. 솔렘의 시험 때 아리앨라가 건네주었던 마도구였다. 애리얼의 마력에 어울리는 총이라며 가져왔던 거였고, 실제로도 잘 맞아서 큰 도움을 받았다.
그런데 그게 금지된 무기였다니.
손가락이 뻣뻣하게 굳고 낯빛이 흐려졌다. 식은땀이 흐를 것 같았다.
마도구는 담을 수 있는 마력량이 한정되어 있다. 그래서 마력을 얼마나 담을 수 있는지, 술식을 몇 개까지 버틸 수 있는지, 그걸로 마도구의 수준이 판가름 난다. 많이 담고 많이 버틸수록 가치가 높다.
보통의 마도구는 술식을 하나 정도만 버텼다. 그렇기에 마도구는 단 한 가지 용도로만 사용되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파멸의 기원이라 명명된 총은 달랐다.
쉽게 망가졌던 공개 시험에서의 총과 달리, 아무리 마력을 불어넣어도 완전히 받아 내 온전하게 변환하던 내구성과 효율. 변모할 수 있는 형태만 해도 열 가지에 달하는 유연성과 다양성. 온갖 방어 장치를 달아도 부작용 없이 어우러지던 포용성.
다시금 생각해 보면 오싹할 정도로 고기능이었다. 어느 정도 마도구를 다루고 그에 관한 지식을 습득한 지금, 더 여실히 느낀다.
눈에 띄게 당황한 그녀를 보고서 스카이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단순히 사촌이라서 만났다는 거, 거짓말이지?”
“……응.”
애리얼은 사실대로 이실직고했다. 일이 재판까지 진행된 이상, 스카이라도 실상을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이 일에 관해선 아는 게 하나도 없었나 보네.”
“응……. 전혀 몰랐어.”
“뭐부터? 네가 썼던 총이 금지된 거였다는 것부터?”
“응.”
애리얼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줄줄이 다 인정했다. 숨겨서 될 일이 아니었다.
‘금지된 무기로 고위 계급의 주변에서 테러에 준하는 폭발 행위를 벌인 혐의…….’
아리앨라가 지원을 했다면 애리얼은 그 지원을 토대로 행위를 주도한 주체였다.
감옥에 들어가지 않고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는 게 신기할 정도의 죄목이었다. 그래도 엄연히 폭발이 허용된 시험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어쩌면 고위 계급이 직접 용인한 행위이기에…… 이렇게 봐주고 있는 걸까.
‘아니, 그래도 이해가 어려워. 아리앨라는 저렇게 불려 가서 고생을 하는데, 내가 전혀 몰랐다는 게 말이 안 돼.’
아무리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다지만, 이러한 일련의 사실조차 몰랐다는 건 도를 넘었다. 고작 특별 감시를 받는다고 끝날 일이 아니었다. 적어도 한 번 이상은 재판에 갔어야 했다.
애리얼은 저 없이 홀로 재판에 불려 간 아리앨라가 걱정되었다. 마법과 마력에 반쯤 돌아 있는 그녀가 파멸의 기원이라는 병기를 제공한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방대한 마력에 어울리는 완벽한 무기를 쥐여 주고 싶었던 거겠지. 선을 모르는 열정과 탐구욕으로, 그녀에 딴에는 최선의 것을 맞추어 주려고 한 것이다.
애리얼은 아리앨라의 그 열정 덕에 도움을 받았다. 그것만큼은 분명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
“클라우스 백작의 변호라도 해 주게?”
“응. 할 수만 있다면, 그래서 클라우스 백작님께 도움이 된다면 뭐든 할게.”
애리얼은 결연해 보였다. 어차피 맞닥뜨려야 할 일임을 아는 듯 보였다.
스카이라는 고민하는 듯 이마를 문지르다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럴 필요 없어.”
“벌써 처분이 내려진 거야?”
“처분은 내려지지 않았어. 사건 자체를 덮었어. 재판은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지. 황태자가 직접 백작의 변호에 나서서 법관도 토를 달지 못했고.”
황태자.
이미 데본시아의 손에 일이 마무리가 되었다는 소리다.
애리얼은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스카이라는 들이켠 숨을 허탈하게 토해 내며 말했다.
“나도 오늘 알았어.”
분한 걸 참는 듯한 음성이었다. 그는 화가 나 있었다.
애리얼은 그의 분노가 무엇 때문인지 알았다.
애리얼의 죄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특별 감시 대상이었다. 아리앨라의 혐의는 적당히 무마되었으나, 그건 전부 황태자의 말 덕분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황태자가 말을 번복하는 순간 다시 살아날 죄라는 거였다. 데본시아는 애리얼에게 빚을 남긴 것이다. 아리앨라의 목숨까지 더한 목줄이었다.
애리얼은 파리하게 변한 얼굴을 아래로 떨궜다. 왼쪽 손목을 슬쩍 확인했다. 검은색이 아닌 은색의 고리가 걸려 있었다. 데본시아의 검은색 브레이슬릿이 떨어져 나간 지 한 달이 훌쩍 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데본시아에게 종속된 기분이었다.
숨이 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