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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77)화 (258/264)

기숙사 방 앞에 도착하고서야 애리얼은 브레이슬릿에 대한 걸 떠올렸다.

황후의 유품.

또 돌려주지 못했다.

생일 선물 외의 이유로 스카이라를 만나야 할 여지가 생긴 것이다.

애리얼은 그게 불편한 동시에 기꺼웠다.

그를 매몰차게 거절하고 온 주제에, 뻔뻔하게도 드는 양가감정에 구역감이 들었다. 저 자신이 싫어졌다.

입술을 깨물다가 애써 표정을 감추고서 문을 열었다.

가운을 입고서 침대에 앉아 있던 휘아킨과 눈이 마주쳤다.

눈이 번쩍 뜨였다.

애리얼은 급히 문을 닫고서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직도 마법이 안 듣는 모양이었다. 얼마나 저러고 있어야 하는 걸까. 우울한 와중에 그건 또 걱정되었다.

혹시 부작용이라도 있는 걸까.

“몸은…… 괜찮아?”

“네. 다시 위장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해서, 그것 빼곤 괜찮아요. 근데…….”

그가 말끝을 늘이며 애리얼에게 다가왔다. 조심스럽게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선배님은 괜찮아요?”

“나? 내가 왜? 어디 이상해?”

“어딘지 울 것 같은 얼굴이라서.”

“내 표정이 그랬어?”

애리얼은 얼떨떨하게 말했다. 눈물이라도 난 건가. 뒤늦게 눈가를 문질러 보았다. 다행히 묻어나는 건 없었다.

그런데도 휘아킨은 걱정스러워하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무슨 일 있었어요?”

“아, 별일 아니야.”

사실대로 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애리얼은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휘아킨은 어딘가 못마땅해하는 눈빛을 보냈다. 묘하게 서늘한 시선이 그녀의 얼굴을 샅샅이 뜯어보다가 천천히 다른 곳으로 돌려졌다. 그는 다시 침대로 돌아가 앉았다. 시트를 짚고서 상체를 젖히더니 들으라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선배님께 어리광 좀 부리려고 했는데, 글렀네요.”

“나한테 어리광 부리고 싶었어?”

“괜찮아요. 저보다는 선배님이 더 어리광 부리시고 그러셔야 할 것 같아서.”

애리얼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 설명도 해 주지 않았다. 그저 애리얼을 향해 다정히 웃고, 젖혔던 상체를 앞으로 당기며 양팔을 벌렸다.

“어때요? 저한테 어리광 부리실래요? 다 받아 드릴게요.”

해사한 미소였으나 애리얼은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벌어진 가운 사이로 쇄골이 다 보였다.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지금의 휘아킨은 위장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괜스레 방이 좁게 느껴졌다.

애리얼은 우물쭈물하며 문 앞에서만 서 있었다. 노골적으로 그의 존재를 의식하는 태도였다.

휘아킨의 눈꼬리가 영악하게 휘어졌다. 모르는 척 가운의 앞섶을 여미며 웃었다.

“선배님, 저 불편하세요?”

“아, 아니…… 응.”

애리얼은 부정하는 듯하다가 솔직하게 토로했다.

“아무래도 성별이 다르니까, 자꾸 의식하게 돼.”

“흠, 그러시구나.”

능청스럽게 일어선 그는 옷장에서 못 보던 옷을 꺼냈다.

“그러면 저는 옷 좀 갈아입고 올게요. 지금 이 차림은 선배님께 자극이 강한 거 같으니.”

장난스레 던지는 농담에 애리얼은 괜히 움찔거렸다. 그는 이 상황을 즐기는 게 분명했다.

휘아킨이 쿡쿡 웃음을 흘리며 욕실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색 남자 교복 차림으로 다시 등장했다. 제대로 옷을 갖춘 그는 뭇사람들의 마음을 홀릴 훤칠하고 아름다운 소년의 모습이었다.

“어때요? 잘 어울려요?”

그가 슬며시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전에 블랑셰의 모습으로 물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말투였다. 당당하다 못해 뻔뻔함이 느껴진다. 멀쩡한 옷이 있었으면서 계속 가운 차림으로 기다린 거였다니. 기가 막혔다.

“그 옷은 원래 있던 거야?”

“아뇨. 선배님 오시기 전에 집에서 가지고 왔어요.”

“직접?”

“그럴 리가요. 저한테도 따르는 시종 정도는 있어요, 선배님. 일단은 저도 공자니까요.”

“아…… 그렇지. 미안.”

사과했더니 그가 또 키득거리며 웃었다. 웃음이 헤픈가 싶을 정도다. 휘아킨은 장난기 넘치는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다 제 목에 걸린 넥타이를 만지작거렸다.

“아무튼, 잘 어울려요?”

“응. 잘 어울려.”

“흐음……. 그래요?”

그는 묘한 반응을 흘렸다. 애리얼의 칭찬이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인지 표정도 애매했다.

저러니까 또 애리얼만 괜스레 눈치가 보였다. 혹시 말실수라도 한 건가.

“……왜 그래?”

조심스레 의중을 묻자, 그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전에 잠옷 얘기를 할 때보다 열의가 없는 것 같아서요.”

“…….”

“선배님은 제가 여자인 게 더 좋으신가요?”

“뭐…… 같이 지내기엔 그쪽이 더 편하지.”

“남자인 저랑은 같이 안 지내 봤으니 모르는 거 아니에요?”

“애초에 이성이면 같은 기숙사 방을 쓸 수 없는걸.”

“그러니까 이번 기회에 같이 지내 보고 한번 비교해 봐요. 블랑셰가 나은지, 휘아킨이 나은지.”

그가 싱글거리며 궤변을 흘렸다.

당연하게도 애리얼은 몹시 당황했다. 같이 지내고 비교하다니.

“아니, 왜 굳이?”

“다시 위장하려면 시간이 걸려서요.”

새로 위장하는 게 그렇게 오래 걸리나. 도대체 며칠이나 저러고 있을 건지, 애리얼은 겁부터 났다.

“다시 위장하려면 얼마나 걸리길래 그래?”

“글쎄요? 아마 한 이틀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는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진실을 모르는 애리얼은 근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이틀이라니, 주말 내내 휘아킨 무하의 모습으로 지낼 생각인 건가.

애리얼은 벌써 바깥 눈치가 보였다. 슬그머니 문 쪽을 곁눈질하며 우려를 전했다.

“그러다 들키면 어쩌려고……. 가문에 도움을 요청하는 게 좋지 않을까?”

“저도 그러고는 싶은데, 제 위장 마법을 주관하시는 클라우스 백작님께서 연락을 안 받으셔서요.”

그가 아리앨라에 관해 언급했다. 연락을 받지 않는다는 부연 설명에 애리얼은 가슴이 철렁거렸다. 죄책감이 들었다. 아리앨라의 연락이 끊긴 것은 황성의 재판 탓이 클 테니까. 애리얼의 책임도 있었다. 죄책감에 이어 책임감이 뒤따랐다.

애리얼은 그에게 아리앨라가 처한 상황을 설명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괜히 사실을 알렸다간 휘아킨까지 휘말릴 위험이 있었다.

“알았어. 일단은 최대한 조용히 지내면서, 이번 주말만 잘 넘기자.”

“네에.”

휘아킨이 별 긴장감 없이 대답했다. 뭘 믿고 저리 여유로운지.

애리얼은 아랫입술을 잘근대며 초조함을 표현했다. 그와 어떻게 한방을 써야 하나. 당장 오늘 밤부터 걱정됐다. 꼼짝없이 함께 지내야 할 상황이었다.

그녀는 마땅한 방도를 고심했다.

‘차라리 내가 다른 방에서 잘까?’

하지만 그러면 돌발 상황에 대처할 사람이 없었다. 휘아킨은 방 밖으로 모습을 드러낼 수 없으니까. 사감이라도 오면 큰일이었다. 외부의 도움은 크게 기대할 수 없었다.

그나마 희망적인 건 수업이 없는 주말이라서 온종일 방에만 있을 수 있다는 점.

온 힘을 다해 이번 주말만 적당히 넘길 수 있다면 괜찮다.

애리얼은 책임감을 불태우며 당장 오늘분의 대책부터 세웠다. 휘아킨의 거짓말에 넘어간 줄도 모르고.

***

오후 여덟 시 삼십 분. 가끔 야식을 요구하는 학생들을 위해 식당은 아직 열려 있었다.

애리얼은 층계를 내려가 몇 가지 음식을 주문했다. 핫 샌드위치 여덟 개와 수프 세 그릇. 따끈한 요리들을 트레이에 담아 들고 4층으로 올라갔다. 트레이가 상당히 무거워서 팔이 후들거렸다. 닫힌 문을 발로 툭툭 건드리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휘아킨이 문을 열었다. 애리얼은 재빠르게 방으로 쏙 들어갔다. 휘아킨이 곧장 문을 닫고는 그녀에게서 트레이를 받아 들었다.

“뭘 이렇게 많이 가져왔어요.”

“저번에 보니까 먹는 양이 꽤 되길래.”

“많이 먹을 때는 많이 먹는데, 늘 그만큼 먹는 건 아니에요.”

“그, 그래? 그럼 다음부턴 얼마나 가져올까?”

“선배님이 안 힘드실 만큼만 가져와요. 괜히 힘들게 만든 거 같아서 미안해요.”

그는 테이블에다 음식을 놓고 포장을 풀었다. 우선은 먹기 좋게 자른 샌드위치부터 꺼내 애리얼에게 건넸다.

“드세요.”

“……응, 그래.”

애리얼은 샌드위치를 들고서 휘아킨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제야 그도 자리에 앉아 남은 음식의 포장을 뜯었다. 먹음직하게 잘 차려진 따뜻한 저녁 식사였다.

“이러고 있으니까 신혼 같지 않아요?”

주변을 쓱 훑은 그가 당혹스러운 평을 남겼다.

애리얼은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다가 그대로 굳었다. 안 그래도 잠은 어떻게 자야 할지 고민 중이었는데. 그가 이 묘한 상황에 기름을 부었다.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휘아킨은 쓴웃음을 지었다.

“미안해요. 농담이었는데, 불편하게 했나 보네요.”

“아냐, 그냥…… 예상 못 한 말이라 놀라서.”

“아, 선배님은 그런 상상 안 해 봤어요?”

룸메이트를 대상으로 그런 상상을 왜 하지? 애리얼은 의아해하며 흘금 그를 살폈다. 휘아킨은 폭탄 같은 소리를 던지고는 태연하게 샌드위치를 씹고 있었다.

“……안 해 봤어.”

“흠, 그러셨구나.”

무심한 척하는 휘아킨의 얼굴에서 약간의 불만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금세 그 기색을 숨기고 웃었다.

“죄송해요. 제가 요즘 소설을 너무 많이 봤나 봐요. 잊어버리세요.”

“아니야, 그럴 수도 있지. 나야말로 너무 진지하게 반응해서 미안해.”

“네에.”

본래 말투인지 뭔지, 그는 가끔 저런 식으로 말을 늘였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나오는 버릇 같았다.

애리얼은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았다. 너무 딱딱하게 반응해서 그런가. 그의 기분이 틀어진 명확한 이유를 잘 알 수 없었다.

그리하여 대화 없이 식사만 이루어졌다.

평소 먹는 양이 그렇게 많지 않은 애리얼은 샌드위치 반 개와 수프 한 그릇을 겨우 먹었다. 나머지는 전부 휘아킨이 해치웠다. 뒷정리 역시 그가 했다.

식사가 끝났을 때 시간은 아홉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애리얼은 책상 앞에 앉아 강의서를 보는 척했다. 밤이 깊어 갈수록 상황이 주는 압박감이 강해졌다. 하필이면 그가 신혼 같다는 소리를 던져서 더 그랬다. 그녀는 초조하게 페이지를 만지작거렸다. 차라리 밤샘 공부를 할까.

뒷정리를 마친 휘아킨이 블레이저를 벗어서 침대 위로 던졌다. 풀썩, 옷감이 내려앉는 소리가 났다. 애리얼은 어깨를 흠칫 떨었다. 뒤이어 그는 스르륵 넥타이까지 풀어서 던졌다.

애리얼만 이 상황을 의식하고서 숨을 죽였다.

그 뒷모습을 보고서 휘아킨이 태연하게 물었다.

“내가 신경 쓰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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