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괜찮아.”
별로 안 괜찮은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녀의 어깨는 한껏 움츠러들어 있었다.
휘아킨은 흑발이 내려앉은 가느다란 어깨선을 가만히 보다가 제안했다.
“영 불편하시면 제가 다른 데 가서 잘게요.”
“괘, 괜찮아! 그러다 들킬 수도 있는데, 차라리 내가 다른 데 가서 잘게!”
애리얼이 고개를 홱 돌리고서 급히 외쳤다. 당장 곤란한 처지에 놓인 건 그인데, 자신이 그의 배려를 받을 수는 없었다.
휘아킨은 조금 얼떨떨하게 그녀를 마주했다. 그녀가 이렇게 격한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던 건지. 그러나 이윽고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왜 그렇게 비장하신 거예요.”
“네가 날 배려해 주려는 게 미안해서……. 내가 네 사정을 헤아리지 않고 혼자 너무 의식한 것 같아.”
“내가 그렇게 신경 쓰였어요?”
그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아차. 애리얼은 뒤늦게 제가 무슨 소릴 한 건지 알고 입을 막았다. 불편했다고 이실직고한 수준이었다.
“……아냐. 지금까지 같이 잘 지내 왔는데 성별 하나 바뀌었다고 뭐가 대수겠어. 괜찮아.”
얼른 무마하기 위한 말을 쏟아 냈다.
휘아킨은 별로 수긍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래도 웃음기는 띠고 있었다.
“무리하지 마요.”
“무리 안 했는데…….”
그는 다 안다는 듯 눈웃음을 흘렸다.
“곧 선배님께 익숙한 모습으로 돌아갈 테니까, 조금만 참아 주세요.”
풀려 있던 셔츠의 단추를 잠그며 그가 침대에 앉았다. 그녀가 염려하는 일은 결단코 없을 거라는 듯이, 옷을 불편할 정도로 여며 준다. 그러고는 어느새 무심해진 얼굴로 베개 옆에 놓아둔 소설을 집어 들었다.
그 태연한 태도에 애리얼도 고개를 돌리고 편한 마음으로 강의서를 읽었다. 그의 위장이 풀린 것은 잠깐의 해프닝에 불과했다. 굳이 방을 바꿀 필요도, 그를 필요 이상으로 의식할 필요도 없었다.
그가 안심시켜 준 덕분일까. 애리얼은 웬일로 글이 눈에 들어왔다. 다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휘아킨을 의식하던 마음이 옅어지자마자 스카이라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녀가 심하게 상처를 준 황자 저하. 매몰차게 잘라 낸 그. 이미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어야 할 그가 자꾸 떠올랐다.
죄책감인가, 아니면 동정심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애리얼은 저도 모르게 왼쪽 손목의 은색 브레이슬릿을 문질렀다. 은으로 만든 고리는 피부에 데워져 미지근했다. 타인을 통해 돌려줄 수는 없는 귀한 물건. 조만간 그와 한 번은 더 만나야 했다.
언제가 좋을까.
최대한 빨리 해치워 버리는 게 나았다. 이런 일을 오래 끌면 끌수록 독이 된다. 지금 이걸로 여지를 남기면 나중에 생일을 챙길 때도 문제가 될 것이다. 애정 관계는 적당히 끝맺고 최악은 아닌 상태로 인연을 끌어가야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가기가 싫지…….’
브레이슬릿을 돌려주러 갈 생각을 하니 명치가 묵직하게 불편해졌다.
스카이라를 마주하기가 부담스러워서뿐만은 아니었다. 이 연결 고리가 끊기고 난 뒤 변화를 맞을 관계. 그게 막연하게 거북했다. 두렵기도 했다.
차라리 그의 고백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왜 냉정하지 못했을까.
애리얼은 불편한 감정에 휘둘려 고민에 빠졌다. 차분했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런 그녀의 옆얼굴로 잿빛 시선이 닿았다.
휘아킨은 어느 순간부터 소설에서 눈을 떼고 애리얼만 보고 있었다. 한껏 예리해진 눈빛이 그녀를 파헤칠 듯했다. 이렇게 강한 시선을 보내는데도 그녀는 전혀 의식을 못 했다. 도대체 뭐에 골몰하고 있는 건지. 적어도 그 대상이 자신은 아니다. 그걸 눈치채자 심기가 꼬였다.
그는 책을 덮고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책상에다가 탁, 소리가 나도록 책을 내려놓았다. 느닷없는 소음에 애리얼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다른 생각에 빠져 초점이 흐렸던 두 눈에 그가 담겼다. 그제야 그는 만족스러워졌다.
“시간이 늦었어요.”
휘아킨이 조용히 시간을 알렸다.
애리얼은 반사적으로 책상에 놓인 탁상시계를 훑었다. 시침이 열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평소 취침 시각이 열한 시 언저리였다는 걸 생각하면 크게 늦은 시각은 아니었다. 휘아킨도 그리 일찍 잠들지는 않는 거로 아는데…….
“피곤해?”
“네. 그만 불 좀 꺼도 될까요?”
“벌써?”
“죄송해요. 제가 지금 좀 졸려서요.”
“아, 그랬구나. 난 괜찮아. 불 꺼도 돼.”
애리얼은 주위가 어두워질 것을 대비해 스탠드를 켜고서 각도를 조절했다. 그러자 휘아킨이 조용히 덧붙였다.
“전부 꺼도 될까요? 제가 비를 맞은 것 때문에 많이 피곤한 상태라서.”
“어…… 응. 알았어.”
그녀가 마지못해 스탠드를 끄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휘아킨이 싱긋 웃었다. 그의 눈동자는 그녀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좇아가고 있었다.
그 시선에 압박감을 느낀 애리얼은 주춤거리다 침대로 향했다. 꼼짝없이 취침해야 할 상황이었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그의 행동이 몹시 당황스러웠다. 하루 정도는 밤을 새울 생각도 했는데, 그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교복을 갈아입지도 못하고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사실 잠옷으로 갈아입을 배짱도 없었다. 이성인 그와 한 방에서 가벼운 차림으로 있는 건 상당히 꺼려지는 일이었다.
이불을 덮고 가만히 누운 그녀의 머리맡으로 휘아킨이 다가왔다.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시선을 맞춰 왔다.
“안녕히 주무세요, 선배님.”
그가 지나칠 정도로 살갑게 굿 나이트 인사를 건넸다. 반달 모양이 된 그의 눈이 애리얼을 담았다. 장난스럽게 살짝 웃음기를 머금은 표정. 평소 블랑셰일 때도 종종 보여 주던 표정인데, 느낌이 전혀 달랐다. 남성의 모습을 해서일까. 이상하게 유혹하는 듯한 느낌이 났다.
그를 의식하지 않으려 애썼던 걸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드는 표정이었다.
당황한 애리얼은 졸린 척 눈을 감으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너도 잘 자.”
“네.”
그가 바닥에서 일어나 조명을 껐다. 순식간에 어두워진 방에는 달빛만 희미하게 새어 들어왔다.
조용한 방 안, 그가 침대에 눕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르륵, 스륵. 시트가 마찰하는 소음이 유독 선명했다.
애리얼은 며칠 전보다 배로 긴장되었다. 블랑셰로 위장했을 때는 겉모습이라도 동성이었지, 지금은 안팎으로 전부 영락없는 남자였다. 혹시라도 그와 눈이 마주칠까, 벽면을 보고 모로 돌아누웠다.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휘아킨은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애리얼은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던 그를 떠올렸다. 졸린다고 먼저 나서서 불을 끄던 그의 얼굴은 태연하다 못해 여유가 넘쳤었다. 그녀를 두고도 태평하게 낮잠을 청하던 평소처럼.
그는 지금 상황을 별로 특이하게 여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겉모습이 블랑셰일 때도 속은 휘아킨인 그대로였을 테니. 그에게는 지금 상황이 이전과 별반 다르게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 긴장이 풀렸다.
애리얼은 천천히 몸에서 힘을 뺐다. 긴장감을 덜어 내자 서서히 졸음이 몰려왔다. 생각 외로 금세 잠이 들 수 있었다.
색색, 조용한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났다.
휘아킨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얼굴을 쓸어내리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심장이 쿵쾅거려서 조금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
좁고 어두운 방 안, 가까워진 그녀와의 거리가 생각 이상으로 자극적이었다. 감정을 억눌러 줄 이어링도 빼 둔 상태여서 망상이 아주 날개를 달았다. 소설에서도 본 적 없는 온갖 상상을 다 했다.
도무지 잠을 청할 수 없었다.
그는 새근새근 고른 호흡을 하는 그녀의 머리맡으로 다가갔다. 달빛에 비친 하얀 얼굴, 길게 드리워진 속눈썹. 실물은 언제나 그의 상상보다 더 아름다웠다.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듯이 가슴팍을 누르며 천천히 상체를 기울였다. 그녀의 얼굴 위로 자신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깊은 수면에 빠진 그녀는 조금도 알지 못한다. 지금의 본인이 얼마나 무방비한지…….
“그렇게 의식해 놓고 잘도 주무시네요.”
볼멘소리로 낮게 중얼거렸다. 이토록 곤히 잠든 그녀가 조금 원망스러웠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에게 입을 맞추고 싶어졌다.
본능에 이끌린 고개가 천천히 그녀에게로 기울여졌다. 흘러내린 까만 앞머리를 걷고 둥근 이마에 살짝 입술을 대었다. 입에다 맞춘 것도 아닌데 손이 덜덜 떨렸다. 이어링을 착용하고 있었다면 부작용으로 죽어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이 모습으로 당신을 골려 주려고 했는데, 실패했네요.”
불순한 의도로 위장을 풀고 있는 내심도 모른 채 그를 그저 안타깝게만 여기니.
“불편하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선배님.”
그는 몸을 일으켰다. 창문가에 서서 잠든 그녀를 한 번 더 바라보다가 욕실로 향했다.
휘아킨은 욕실 벽에 기대어 고조된 감정을 가라앉혔다. 심장 박동이 제 궤도를 찾아 일정해지자 이어링을 착용했다. 마도구의 술식이 활성화되며 순식간에 블랑셰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휘아킨 무하라는 정체성이 순식간에 감추어진다. 이렇게 쉽게.
그는 길어진 머리칼을 손가락에 감으며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체형이 가늘어지며 셔츠가 흘러내렸다. 거울에 비친 제 외관을 보고 있자니 피식, 비웃음이 났다.
이성으로서 의식해 달라고 말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가슴팍이 갑갑해졌다.
욕실 옷걸이에 걸어 둔 여자 교복을 입는데, 말도 못 하게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이름이나 한번 불러 달라고 할걸.’
그는 아쉬움을 느끼며 조소했다. 블랑셰 말고 휘아킨으로, 한 번이라도 불렸으면 좋았을 것을. 씁쓸함을 삼키며 욕실을 나왔다. 조용히 잠든 그녀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짝사랑이 생각보다 더 힘든 거였구나.
휘아킨은 소리 없이 웃으며 잠든 애리얼을 두고 방을 나갔다.
***
깊은 밤, 황성의 응접실에서는 황태자와 아리앨라 클라우스가 대면 중이었다.
늦은 시각에도 단추 하나 풀지 않고 엄격한 복장을 한 데본시아는 삼라만상을 제 아래로 내려다보듯 오만하게 눈을 떴다. 그 차림, 그 눈빛은 상대에게 지나칠 정도의 거리감을 선사했다.
아리앨라 역시 로브까지 입은 정장 드레스의 차림으로 고개를 숙였다. 약간의 미소를 지은 그녀의 얼굴은 완벽하게 예를 갖추고 있었다.
‘파멸의 기원’에 관한 건을 손쉽게 무마시켜 준 절대 권력. 은인이나 다름없는 황태자의 앞에서도 그녀는 별다른 감사를 표하지 않았다. 그가 이 일을 철저하게 빚으로 달아 둘 것임을 알아서다.
그러니 필요한 것은 감사보다도 앞으로의 처신을 묻는 것.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어떻게 할 수는 있고?”
데본시아가 빙긋 웃었다. 아리앨라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입꼬리만 살짝 끌어 올려 가장한 옅은 미소가 어린 얼굴 그대로다. 과연, 신성 술식에 손대고도 뻔뻔했던 만큼 배짱이 훌륭했다.
“휘아킨 무하의 신원은 황실 행정부도 모른다. 언질이 없으면 그 둘이 룸메이트가 될 가능성이 컸지. 마저증인 힘없는 학생과 붙여 놔야 공모의 소지가 적어 애리얼을 감시하기도 편할 테니까.”
“꼭 테러리스트를 지칭하듯이 말씀하시네요.”
“아카데미를 비롯해 상층부는 그렇게들 여겨. 너무 강한 것은 두려움을 일으키니까. 특히나 잃을 게 많은 기득권 놈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지.”
“그래도 전하께서는 알고 계셨으니 막을 수 있으셨을 텐데요. 알고도 묵인하셨나요?”
“그랬지. 언질을 주면 정보가 새어 나갈 위험이 있으니까.”
“무하와의 의리를 택하신 건가요?”
“의리라기보다는 일종의 보은이야. 그쪽에는 개인적으로 고마운 게 많거든.”
“그렇군요. 설명에 감사드립니다.”
아리앨라는 깊은 사정을 묻지 않았다. 아무리 무하 공작가에 몸담고 있어도 들어선 안 될 내막임을 알았다. 애당초 그녀는 마법이나 마력에 관한 것이 아니면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궁금한 것이 남았다. 앞으로 그녀의 행동 방향을 결정지을 중요한 이유.
“‘파멸의 기원’까지 눈감아 주실 정도로, 제 사촌을 마음에 두고 계시는가요?”
“반역도 눈감아 줄 수 있을 정도야.”
파격적인 대답에 아리앨라는 흠칫 떨었다. 그 정도라고. 그런데 왜…….
“그렇다면 전하께선 공자 서하가 거슬리셨을 텐데요. 성별을 숨기고 한방에 기거하는 것이…… 위험하게 생각되지는 않으셨나요?”
꽤 주제넘은 질문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자비로운 지배자처럼 너그럽게 그 행동의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무하 공자는 애리얼에게 함부로 다가가지 않을 테니까. 애초에 사심이 없다면 손댈 이유가 없고, 사심이 있어도 마도구의 부작용 때문에 손댈 수가 없고. 그러니까 괜찮아. 거슬리지 않는 건 아니지만 참을 수는 있지.”
그는 휘아킨이 쓰는 위장용 마도구가 어떤 부작용을 가졌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건 그가 신성 마법사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황태자라 뛰어난 정보력을 갖췄기 때문일까. 혹은…….
“어떻게 아셨나요?”
마법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자 아리앨라가 그 즉시 눈을 빛내며 물었다.
황태자는 애리얼과 닮아 있는 그녀의 흑발을 물끄러미 주시했다. 꽤 건방진데, 자꾸만 봐주게 되는 이유였다. 그러니까 이 건방진 질문에도 대답해 줄까. 별로 중요한 정보는 아니기도 하고.
“그 이어링은 내가 만든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