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답변에 아리앨라는 표정 관리를 잊었다. 확연하게 놀란 두 눈이 충격에 커다래졌고, 입은 기함하듯 벌어졌다.
그 마름모 모양의 이어링이 무하가의 마도구가 아니었다고. 그 강력한 마력의 결정체가 황태자의 작품이었다고. 그게 신성 마력을 담은 마도구였다고!
전율이 일었다. 아리앨라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당겨 웃고 말았다.
그래서 그 눈치 빠르다는 고위 계급들도 전혀 몰랐던 거다. 신성 마법사가 만든 위장 마법이니까. 같은 신성 마법사가 아니라면 알 수 없으리라.
“아, 그래서 역시! 그 정밀도, 섬세함, 위장의 수준……. 그럼에도 부작용이 가벼운 편이고, 술식의 재발동 시간도 짧았던 이유가…… 그래서!”
그녀가 중얼중얼 감탄을 내뱉었다.
데본시아는 은근하게 지은 위장용 미소를 유지한 채 그녀를 관찰했다. 클라우스 백작이 마법에 미친 인간이라는 소리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본인이 담당하는 마저증의 도련님보다 마도구에 더 큰 관심을 보이다니. 인간관계나 의리마저도 저버린 병적인 호기심과 탐구열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사특한 계략을 꾀했다. 위장용으로 지은 미소가 짙어졌다.
이렇게 목적이 명확하여 미친 이유가 확실한 인간은 다루기 쉽다.
“아리앨라 클라우스 백작.”
데본시아가 그녀의 풀 네임을 호명했다. 아리앨라의 시선이 곧장 그를 향한다. 미친 마법사의 광기 어린 보라색 눈동자가 조명 아래서 반짝거렸다. 미쳤지만, 왜 미쳤는지 속이 뻔히 보이는 눈.
“내 금고의 마도구 칸에 들어가도록 해 줄게. 그러니 하나만 약속할까?”
데본시아는 친절한 얼굴로 한 가지를 제안했다. 설득도 필요 없었다. 아리앨라가 곧장 대답했다.
“네. 무엇이든지요.”
미끼를 덥석 물어 버린 아리앨라의 자안은 반짝이다 못해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 눈을 지그시 마주하며, 데본시아는 비밀이라는 듯 입술 앞에 검지를 세우고 말했다.
“앞으로는 무하 공작보다 내 명령을 우선할 것.”
강력한 언령이 그녀의 귀를 파고들었다. 아리앨라는 신성 마력이 행하는 언령에 전율했다. 세뇌까지 갖춘 언령이라니.
“알겠지?”
그가 당부하듯 말했다.
아리앨라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
애리얼이 일어났을 때, 휘아킨은 블랑셰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이제 괜찮은 거냐고 묻자 그는 웃기만 했다. 왠지 그는 조금 씁쓸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애리얼은 더 질문하지 않았다.
그 후로는 평소와 같았다.
애리얼은 책상에서 강의서를 읽었고, 휘아킨은 계속 낮잠만 잤다. 이불을 둘둘 말고 누운 그의 머리맡으로 하얀 은발이 흐트러져 있었다. 등을 보인 채 누운 뒷모습은 가늘기만 했다. 어젯밤의 그가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대체 밤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어디 아픈 건 아니겠지?’
애리얼은 휘아킨이 걱정스러웠다. 책을 보다 말고 종종 그를 흘금거리며 살폈다. 그는 미동도 없이 잤다. 그냥 피곤한 건가. 그의 상태가 잘 가늠되지 않았다. 괜찮냐고 묻지도 못했다.
세 시간 정도가 지나 정오가 되었을 때 한번 말을 걸었다.
“점심 먹으러 갈래?”
그는 대답이 없었다. 이불 속에서 겨우겨우 고개만 저었다. 실타래처럼 늘어진 백은발이 약하게 흔들거렸다.
“뭐 가져다줄까?”
“……됐어요.”
한 번 더 묻자, 그는 꽉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짧은 대답에서도 피곤함이 잔뜩 느껴졌다. 밤잠을 설치기라도 한 건지.
애리얼은 더 귀찮게 하지 않고 방을 나갔다.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고 중정을 좀 걷다가 도서관에 들어갔다. 기말시험이 한 달 정도 남은 탓에 열람실은 온통 학생들로 붐볐다. 그래도 앉을 곳이 없지는 않았다. 각 기숙사의 열람실에는 기숙사의 학생 수만큼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으므로.
애리얼은 적당히 남는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듣는 수업은 대부분이 교양이라 점수를 받기가 쉬웠다. 그렇다고 수업 내용까지 쉬운 건 아니라서 공부가 필요하긴 했다. 네 시간 정도 책을 보다가 나왔다.
초여름을 맞은 하늘이 파랗다. 공기에서 약간의 습기가 느껴졌다. 날씨가 점차 더워질 준비를 했다.
애리얼은 내리쬐는 햇빛을 가리기 위해 손을 들었다. 우연하게도 왼손이었다. 은색의 브레이슬릿이 햇살을 받아 윤기를 냈다.
“아…….”
절로 탄식이 나왔다.
‘돌려주러 가야 하는데.’
어째선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직은 스카이라의 얼굴을 보기가 거북했다.
애리얼은 한숨만 연거푸 내쉬다가 끝내 기숙사로 향했다. 열람실이 붐비는 만큼 조용해진 기숙사 복도를 빠르게 걸었다.
‘휘아킨은 지금쯤 일어났을까?’
그를 걱정하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나올 때와 거의 달라지지 않은 방의 전경이 그녀를 맞았다. 누에고치처럼 이불을 둘둘 말고 있는 휘아킨까지 그대로다.
애리얼은 여전히 같은 자세로 누운 그를 보고서 흠칫 놀랐다. 기절한 건 아닐까. 급히 그의 가까이 뛰어가 백은발을 넘기며 얼굴을 살폈다. 창백한 안색이 그녀의 걱정을 부채질했다.
혹시 열이라도 나는 건 아닌지. 애리얼은 잠든 그의 이마에 살짝 손등을 대 보았다. 미열이 있는 것도 같고.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애리얼이 체온을 비교해 보기 위해 제 이마에도 손을 얹은 순간, 탁, 휘아킨이 그녀의 손을 쳐 냈다.
검은색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놀란 애리얼은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휘아킨이 이불을 걷으며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부스스 흘러내리는 하얀 머리칼 사이로 잿빛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선배님, 만지실 때는 말씀을 좀 해 주셨으면 해요.”
짜증이나 분노, 어떤 격한 감정을 억누르는 말투. 평소 같지 않은 예민한 반응이었다. 그의 숨소리까지도 미세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미, 미안해. 주의할게.”
당황한 애리얼이 더듬거리며 사과를 건넸다.
휘아킨은 길게 한숨을 쉬더니 침대에서 일어났다.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빗어 내고는 옷매무새를 적당히 바로잡는다.
“어디 나가려고?”
애리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문고리를 쥐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전 괜찮으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상투적인 말이라는 걸 모를 수 없었다. 그는 괜찮지 않아 보였다.
애리얼은 무심코 손을 뻗어 그를 잡으려다가 멈칫했다. 만질 때는 말을 하라던 그의 요구가 떠올랐다. 어정쩡하게 손을 뻗고서 그를 불렀다.
“저…… 블랑셰.”
막 나가려던 휘아킨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한숨을 참는 듯 입술을 말아 물다가 고개를 돌렸다. 기분이 상했는지 한쪽 눈썹을 찡그리고 있었다.
“제 이름 그거 아니에요.”
차갑게 쏘아붙인 그 말을 마지막으로 문이 닫혔다.
애리얼은 휘아킨이 떠나간 자리를 멀거니 보았다. 그가 갑자기 왜 저러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멋대로 이마에 손을 올린 게 그렇게나 싫었나. 애리얼은 시무룩한 얼굴로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반들반들한 손바닥이 눈에 담겼다. 그대로 들어 제 이마에 얹어 보았다.
‘그렇게 나쁜 감촉은 아닌데.’
단순히 열을 재기 위한 행동이어도 멋대로 건드린 게 문제였나. 하지만 그는 애리얼이 책을 보고 있거나 하면 슬그머니 다가와 말없이 어깨에 기대기도 했었다. 그는 접촉에 민감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심한 편이었다.
‘그런데 왜…….’
애리얼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혹시 자신이 먼저 건드리는 건 괜찮아도 남이 건드리는 건 싫은 건가. 만약 그런 거라면 지금이라도 방을 바꾸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
휘아킨은 연결 통로를 통해 공작저로 왔다. 아리앨라도 없는 시각이라 홀로 별관에 틀어박혔다.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가운 차림으로 소파에 늘어졌다. 이어링은 진작에 빼 버린 상태였다.
그런데도 여전히 가슴이 답답했다.
그는 쿠션에 얼굴을 묻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어제는 한숨도 못 잤다. 들끓는 심장만 부여잡던 밤을 떠올리니 또 심란해진다. 그녀와 함께한 이후부터는 아예 밤낮이 바뀌었다. 거기다 하루가 다르게 심해지는 이어링의 부작용 탓에 신경이 자꾸 날카로워졌다. 애리얼과 연관되면 특히 더 그랬다. 그녀를 예민하게 의식하게 된 이후로는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에 온 신경이 곤두섰다.
그 결과 형편없는 언행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렇게까지 굴면 안 됐는데.
불시에 그녀의 손이 닿으니 심장이 요동쳤다. 이어링이 그의 감정을 누르기 위해 부하를 가했고, 부작용에 숨이 막혔다. 그것 때문에 짜증이 나서 확, 손을 쳐 냈다. 말도 퉁명스럽게 나갔다.
“선배님, 만지실 때는 말씀을 좀 해 주셨으면 해요.”
그렇게 말해 놓고 사실은 그녀가 먼저 멋대로 건드려 주길 바랐다. 뻔뻔하게도 그랬다. 예민하게 밀어낸 주제에 짧았던 그 접촉을 되새기고 되새겼다. 지금도.
그는 아까 닿았던 그녀의 손을 떠올리며 이마를 슬쩍 문질렀다. 상냥하게 맞닿던 손바닥. 그 부드럽고 조심스럽던 감촉, 체온.
“미쳤지, 내가.”
휘아킨은 웃음기도 없이 중얼거렸다.
***
휘아킨은 하루를 거르고 다음 날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애리얼은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며 그의 안색을 살폈다. 그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인사를 받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그의 모습이었다.
그 후로도 그는 별다른 이상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녀와의 접촉에 있어서는 약간 강박적으로 변했다. 옷이 스치기만 해도 그는 흠칫거리며 물러났다.
그래서 애리얼은 갈등에 빠졌다.
여름 학기까지는 한 달 정도 남은 시기. 어지간하면 이번 학기까지는 같은 방을 쓰는 게 편했다. 하지만 요즘따라 과해진 그의 행동이 너무 신경 쓰였다. 그냥 방을 바꾸는 게 나을까. 강의에 들어가서도 그 생각을 수십 번 넘게 했다.
날짜는 어느덧 유월의 중순에 이르렀다. 곧 칠월이 되겠지. 그때부터가 중요했다. 공략 대상의 생일이 줄줄이 이어지고 해가 바뀌는 첫날인 일 월 일 일, 특별 엔딩의 기회가 온다.
그 전까지 문제가 될 만한 것들을 미리 정리해 둬야 했다.
이곳을 떠나야 한다.
애리얼은 불편한 상태를 길게 끌어 봐야 좋을 게 없다고 보았다. 복잡하게 얽힌 상황은 얼른 해치우고 싶었다.
‘방을 바꾸고, 브레이슬릿도 돌려주고.’
할 일을 꼽아 손가락을 하나둘 구부리며 적막한 복도를 걸을 때였다.
우우우웅-
삽시에 긴장감을 상승시키는 진동음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