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80)화 (261/264)

애리얼은 당황하지 않고 근처의 빈 강의실로 들어가 휴대폰을 꺼냈다.

『공략 대상이 근처에 있습니다.』

『렉시우스 크레시앙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에게 강한 애정을 느낍니다. 당신과 함께하는 데 더없는 기쁨을 느낍니다.)

▷현재 위치: 아카데미 1관 - 1층 복도』

수업을 들으러 왔을 리는 만무한 인간이었다.

‘어떡하지?’

애리얼은 전공서를 안은 채 발걸음을 망설였다.

렉시우스의 호감도는 하트 네 개 반. 될 수 있으면 단둘이서는 만나지 않는 게 좋았다. 어차피 여름 학기에 대공저에서 봐야 하기도 하고.

이 순간에도 렉시우스의 초상화는 시시각각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녀가 어디 있는지 아는 것처럼 정확하게 움직인다. 속도도 빨랐다. 그런 만큼 피하기가 여의치 않을 것이다.

‘맞닥뜨릴 건 맞닥뜨리고 치우자.’

애리얼은 강의실을 나와 그냥 가던 길을 갔다. 그렇게 아래로 향하는 층계참에서 렉시우스와 마주쳤다. 그는 애리얼을 발견하자마자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우연이네.”

우연은 무슨.

애리얼은 차분한 얼굴로 그를 대했다.

“선배, 안녕하세요.”

“웬일로 딱딱한 호칭을 안 쓰네?”

“그렇게 부를 때마다 선배가 귀찮게 하셔서요.”

“존댓말 쓸 때는 귀찮게 안 했나 보다?”

그는 호칭으로도 부족했는지 애리얼의 말투를 추가로 지적했다. 애리얼은 한숨을 내쉬며 말투를 고쳤다.

“알았어.”

“어리광도 한 번에 받아 주고, 오늘따라 유하네.”

렉시우스가 눈을 가느다랗게 좁히며 애리얼의 얼굴을 훑었다. 표정 변화가 거의 없었을 텐데도 그는 뭔가를 포착한 양 눈을 번뜩였다.

“무슨 일 있었지.”

그는 묻는 것도 아니고 아예 단정을 지었다.

애리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아니, 없었어.”

“없었어.”

렉시우스가 애리얼의 말투를 무심하게 흉내 내며 그녀의 손에서 강의서를 뺏어 들었다. 애리얼은 걸음을 멈추며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그가 그녀의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강의서를 들어 올렸다.

“연기라도 좀 잘해라.”

졸지에 핀잔을 들은 애리얼이 그를 못마땅하다는 듯 올려다보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그의 노란 눈동자가 시선을 맞춰 왔다. 그는 양손으로 들기에도 벅찬 두꺼운 강의서를 한 손으로 까딱까딱 흔들며 삐딱하게 섰다.

“내가 도와줄까?”

“아무 일 없다니까.”

“싫으면 말아.”

렉시우스는 서운하다는 투로 입을 비죽였다. 애리얼의 강의서를 든 채 먼저 앞서 걷는다.

기말을 앞두고 책을 뺏기게 생겼다.

애리얼은 바쁘게 그의 뒤를 따라갔다.

“선배, 애 같아.”

“너한테만 그래.”

“그러지 마.”

그렇게 말했더니 그가 몸을 휙 돌렸다.

뒤따르던 애리얼은 제때 멈추지 못하고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박았다. 탄탄한 부피감과 함께 아이리스를 닮은 비누 향이 물씬 풍겼다. 놀란 애리얼은 얼른 고개를 치켜들고 물러났다. 그러나 두 걸음도 못 떨어져 팔을 붙잡혔다.

하필이면 왼팔이다.

손바닥에 감기는 딱딱한 물체의 감촉에 렉시우스가 인상을 썼다. 애리얼이 인식하기도 전에 그녀의 팔을 제 앞으로 당겨 올렸다. 그녀의 소매를 걷고 희게 빛나는 은색 브레이슬릿을 눈에 담았다.

“이거 뭐냐?”

“내 거 아냐. 돌려드리러 갈 거야.”

“아, 그래?”

그는 심기가 뒤틀린 표정을 하고서 그녀의 팔을 풀어 줬다. 의외로 순순하게 나오나 싶은 그때, 렉시우스가 불길한 미소와 함께 그녀를 보았다.

“그러면 지금 갔다 오면 되겠네.”

“지금?”

“돌려주러 갈 거라며? 지금 갔다 와.”

“……알았어.”

애리얼은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괜한 꼬투리를 잡힐까 염려한 탓이었다. 빠른 걸음으로 행정실에 들어가 용건을 말하고 황성의 차를 호출했다.

몇 분 안 되어 황성의 세단이 정문으로 도착했다.

애리얼이 차에 올랐다. 렉시우스는 웬일로 그녀를 따라올 기미가 없었다.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용건 끝나면 가지러 와.”

그는 친절하게 웃으며 차 문까지 닫아 주었다.

뭘 알고 저러는 건가. 그의 반응이 애리얼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따라오겠다고 하는 게 훨씬 불안했을 터.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억지로 안심하며 황성으로 향했다.

그렇게 애리얼을 보낸 뒤 렉시우스는 구깃구깃한 인상을 하고서 제 보좌관을 호출했다.

“저하.”

“따라가지 말래서 참았다. 됐냐?”

“예. 어느 정도는 놓아주기도 하는 게 미덕입니다.”

“하…….”

그는 신경질적으로 긴 숨을 토해 낸 끝에 욕을 씹어뱉었다.

그러자 메튼이 주의를 줬다.

“입이 험한 사람은 인기가 없습니다.”

“첫사랑이랑 결혼했다고 유세 떨지 말고, 닥쳐.”

“조언을 구한 건 저하가 아니십니까.”

“그래서 이렇게 따르고 있잖아.”

그는 당장이라도 떠난 차를 뒤쫓아 가 앞길을 막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핏줄이 선 손으로 애리얼의 역사서만 꽉 쥐었다.

메튼은 제 상관의 성미에 이 정도 참은 것도 대단한 일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그의 명령대로 입을 다물었다.

***

졸지에 등 떠밀리듯 황성으로 왔다.

애리얼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응접실에서 잠시 대기했다. 무슨 일인지 중앙관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는 중이라 스카이라를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행정적 절차는 대개 북관에서 이루어지고 중앙관은 생활 공간이라 중요한 회의가 있는 것도 아닐 텐데, 기류가 심상찮았다.

그렇게 브레이슬릿을 만지작거리며 초조하게 시간을 보낸 지 삼십 분.

응접실로 황자의 보좌관이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허클리 공녀님. 황자 저하의 보좌관, 필릭 헤일스입니다.”

그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애리얼도 마주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허클리 백작가의 애리얼 허클리입니다.”

“예, 압니다. 제게 고개를 숙이실 필요는 없습니다. 헤일스라고 불러 주세요.”

“네. 헤일스.”

“우선 자리를 옮겨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헤일스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를 응접실 밖으로 안내했다. 중앙관의 복도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시녀도 몇 없었다. 그는 완전히 인적이 없는 복도에 들어서서야 그 이유를 말했다.

“황자 저하께서 몸이 편찮으십니다.”

“저하께서요? 언제부터 그러셨습니까?”

“이 주 정도 되었습니다.”

하필이면 정확하게 그녀에게 차인 시점부터였다.

애리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설마 연관이 있는 건가 싶어서 가슴이 불안하게 떨렸다.

“많이 안 좋으신가요?”

“열이 심합니다. 원인도 모르고요. 그래서 방문객을 받지 않은 지 한참 되었습니다.”

걱정이 태산처럼 쌓이게 하는 설명이었다.

애리얼은 그가 어떤 상태인지 극심히 걱정되면서도 두려웠다. 왜 아플까. 저 때문일까. 그가 아프지 않도록 뭐든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무엇도 해 줄 수 없을 자신을 알았다.

“저하께서 최근 방문을 허락하신 이는 공녀님이 유일합니다.”

헤일스는 그렇게 부담을 가득 얹어 주는 발언을 한 뒤 검은색의 문 앞에 그녀를 두고서 떠났다. 정중한 인사와 함께 완전히 복도를 떠나 버렸다.

애리얼은 낯설지 않은 문을 보고서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한 번 와 본 스카이라의 방. 그의 침실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똑똑똑.

주변이 지나치게 고요한 탓에 노크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울려 퍼졌다.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똑똑똑.

한 번 더 노크를 하며 그를 불렀다.

“저하, 애리얼 허클리입니다.”

이번에도 역시나 인기척이 없었다.

애리얼은 어쩔 줄 모르고 문만 바라보았다. 위급 상황을 제외하고 중앙관에서 큰 소리를 내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노크만 두어 번 더 하다가, 가만히 기다리기만 했다.

그렇게 무려 한 시간이나 흘렀을 때였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노크하고, 이번에도 대답이 없으면 떠나자.

그렇게 마음을 먹고 말아 쥔 손을 올렸을 때, 철컥, 문이 열렸다.

누가 봐도 최악의 상태인 듯 보이는 스카이라가 문 사이서 등장했다. 송골송골 땀이 맺힌 이마. 헝클어진 걸 겨우 수습한 듯한 젖은 머리칼. 발갛게 달아오른 살결. 그 와중에도 복장은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은색 커프스 버튼에 넥타이핀까지 착용한 검은색 정복 차림이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애리얼은 놀란 나머지 두 눈만 깜박거리다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황자 저하를 뵙…….”

“인사는 치워.”

그가 잔뜩 쉰 목소리를 억지로 가다듬으며 말했다.

“너 얼마나 기다렸어.”

“한 시간 정도…….”

“너 바보야? 왜 안 들어오고 그러고 있어.”

애리얼은 화난 듯 찡그려진 그의 얼굴을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허락이 없으셔서요.”

“그냥 문 열고 들어오면 되잖아.”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방문 허락을 받았다지만 황족의 처소인데.

하지만 애리얼은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숙였다. 아픈 그에게 토를 달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자 스카이라는 답답한 듯 애리얼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의 손길에 애리얼은 흠칫 몸을 굳혔다. 체온이 어찌나 높은지 잡힌 손목이 불에 덴 듯했다.

그는 애리얼을 방 안에다 밀어 넣고는 문을 닫았다. 아픈 게 분명한데도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동작으로 소파에 앉았다. 그러고서는 애리얼에게도 앉으라며 손짓했다.

애리얼은 군말 없이 그의 손짓에 따라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편찮으시니 다음에 찾아뵙겠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하지 않았다. 그가 애써 멀쩡한 척하는 게 눈에 보여서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브레이슬릿을 돌려주러 왔다는 용건도 목에 걸려서 나오지 않았다.

입을 닫고 있으니 스카이라가 억지로 힘을 준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랑 얼굴만 보고 있으려고 왔어?”

“아니요.”

“그럼 뭔데? 보고 싶어서 온 건 아닐 거잖아.”

그가 차갑게 내뱉었다.

애리얼은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 이상 용건을 숨기며 시간 낭비를 하는 게 그에게 더 안 좋을 것이다. 왼쪽 소매를 걷고 손목에 걸린 브레이슬릿을 풀었다. 탁, 소리와 함께 벌어진 브레이슬릿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걸 돌려드리려고 왔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