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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81)화 (262/264)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스카이라의 표정은 싸늘히 굳어 버렸다. 그녀의 방문에 알게 모르게 자리했던 기대감이 부서졌다. 한숨조차 나지 않았다. 반으로 갈라져 열린 브레이슬릿이 꼭 자신 같았다. 제 감정 같았다. 억지로 걸어 줬는데 기어코 떼 내어진, 그녀에게 있어서 필요도 쓸모도 없는 것. 그저 부담스러운 것.

심장이 할퀴어진 듯 아리고 쓰렸다. 씁쓸함과 비슷하지만 고작 그런 말로는 정의할 수 없는 아픔이 차올랐다. 가슴 속이 펄펄 끓는데 이게 정확히 뭐 때문인지도 몰랐다. 화를 내고 싶기도, 울고 싶기도 했다.

그는 피가 나도록 손가락을 말아 쥐고서 물었다.

“그게 다야?”

볼품없이 갈라진 목소리.

동정이라도 느끼는지 애리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면 그 동정심으로 하잘것없는 희망이라도 쥐게 해 주면 안 될까.

부수어진 기대감의 잔해라도 끌어모으고 싶어서, 침묵하는 그녀를 향해 재차 물었다.

“날 만나러 온 이유가, 그게, 다냐고.”

쇳소리를 내는 목을 가다듬느라 말이 뚝뚝 끊겼다.

애리얼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네.”

짧고도 명확한 대답에 스카이라의 희망이 무너져 내렸다.

이것마저 안 되면…… 이제 난 무엇으로 널 붙잡아야 해?

스카이라는 질끈 눈을 감았다. 아득한 추락감이 느껴졌다. 이마를 타고 뺨을 적시며 흐른 땀이 턱 끝에 맺혀서 뚝, 떨어졌다.

애리얼은 고작 한 음으로 거절을 표하고는 말이 없었다.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만 있다.

그 행동은 스카이라를 불안하게 했고, 기대하게도 했다. 그녀가 혹시 망설이고 있는 건 아닐까. 동정심을 느껴서 말을 무르지는 않을까.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천천히 눈을 떴다. 아래로 시선을 둔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물었다.

“왜 돌려주는 거야?”

“너무 귀한 물건이라 부담스럽습니다.”

“내가 상관없다고 했잖아. 덜 귀한 걸 주면 가질래?”

“아니요, 괜찮습니다.”

“왜? 내가 주는 건 싫어?”

“그런 게 아니라…….”

“아니면?”

스카이라는 초조해져서 다그치듯이 물었다.

애리얼은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침묵했다. 망설이는 기색이 읽히자 그의 속에서 알량한 기대감이 다시 고개를 치켜들었다. 다물렸던 그녀의 입술이 우물거리자 긴장감으로 가슴이 조여들었다. 갑갑함에 셔츠 단추를 하나 풀었다.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연다.

“저하, 저는…… 그런 선물은 필요 없어요. 그냥 생일에나 주는 예의상의…… 우정의 의미로 주시는 선물이면 충분해요.”

“우정?”

“네.”

“그럼 뭐, 친구라도 하자는 거야?”

그가 화난 듯 따져 물었다.

“내 이름도 못 부르고, 꼬박꼬박 존대에 고개만 숙이는 너랑? 내가 친구라고?”

“…….”

“날 친구라고는 생각해?”

애리얼은 감히 입을 열어 긍정하지 않았다. 기만으로 비칠까 우려한 탓이었다. 고백을 건넨 그의 마음을 매몰차게 거절하자마자 그를 친구라고 선언할 수는 없었다. 너무 뻔뻔한 짓이었다.

긍정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스카이라는 터지려던 분노를 겨우 삼켜 냈다. 그의 감정을 무겁게는 여기고 있다는 증거니까.

가까스로 감정을 억누른 그는 단단히 선을 그으려 입을 열었다. 이렇게 가슴이 뛰는데, 친구 따위의 애매한 관계는 있을 수 없다.

“난 너랑 친구 같은 거…….”

“스카이라.”

조용히 이름을 부르는 애리얼의 목소리에, 스카이라의 말이 뚝 끊겼다.

“미안해.”

그녀가 짧게 사과했다.

그의 파란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흔들렸다.

스카이라는 진심으로 사과하는 그녀를 더는 다그칠 수 없었다. 친구 같은 거 하기 싫다고 고집을 피울 수도 없었다.

온몸의 피가 차게 식는 기분이었다. 이 주간 그를 괴롭히던 어지러운 열병마저도 뒷전으로 물러났다.

이대로 끝인가. 그는 허탈하게 풀린 표정을 안쓰러울 정도로 무너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불편한 침묵으로 대화는 끊어졌다.

더는 이어 갈 말이 남아 있지 않았다. 애리얼도, 그도.

불편한 침묵 끝에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애리얼이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스카이라는 그녀를 제지하지 않았다. 그는 테이블에 놓인 은색 브레이슬릿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녀의 발소리가 멀어지고 문고리가 달칵 소리를 내며 돌아갈 때까지, 그는 미동도 없었다.

애리얼은 잠깐 그의 동태를 살피다가 문을 나섰다. 그러고는 문을 닫기 전에 친구로서의 안부를 남겼다.

“아프지 말고, 얼른 나아.”

조곤조곤한 음성이 울리자 그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애리얼은 그의 동요를 애써 못 본 체하며 문을 닫았다.

그녀는 적요한 복도를 내달리듯 빠르게 걸어 나갔다.

죄책감, 죄악감이 온몸을 짓누르는 듯했다.

그의 마음을 거절하면서도 그와의 인연을 끊을 수는 없어서, 그가 거부하지 않을 친근함을 가장하여 여지를 남겼다. 그의 감정을 휘둘렀다. 명백한 희망 고문이었다.

문제는 일부러 그렇게 굴어 놓고서도 냉정하지 못한 자신이었다.

애리얼은 같잖게도 가책을 느끼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뻔뻔해져야 하는데, 그러지도 못했다. 오히려 아픈 그를 안아 주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으니……. 가책도 모자라 미련까지 느끼는 중이었다. 멀미하는 것처럼 가슴 속이 울렁거렸다.

그래서 애리얼은 더더욱 걸음을 재촉했다. 단 한 번도 뒤돌지 않고 곧장 차까지 향했다. 차에 올라서도 일부러 눈을 감고 애써 황성을 외면했다. 스카이라를 외면했다. 울적한 얼굴로 제1 교사 동에 내렸다.

그때가 되어서야 애리얼은 뒤를 돌아보았다. 멀어지는 황성의 차를 보다가 한숨을 쉬며 몸을 돌렸다.

우우우웅-

접근 알림이 울렸다.

교사 동의 정문에서 렉시우스가 걸어왔다. 애리얼의 강의서를 들고서 한 걸음 거리로 다가와 삐딱하게 섰다. 무심한 척 애리얼을 세심하게 살피고는 걱정을 툭 뱉었다.

“표정 한번 대단하네. 스카이라한테 욕이라도 들었어?”

“아니, 그런 일 없었어.”

“뭐, 그래. 제대로 돌려주고는 왔냐?”

애리얼은 말없이 왼쪽 소매를 걷어서 비어 있는 손목을 보여 줬다. 그러고는 그대로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강의서 돌려줘.”

“너도 참 어지간하다.”

렉시우스는 기가 찬다는 표정이었다. 약간 서운한 것도 같았다. 그럼에도 그는 순순히 그녀의 손에다 강의서를 얹어 주었다.

애리얼은 묵직한 강의서를 재빨리 안아 들고서 물러났다.

“갈게, 선배.”

“매정도 하셔라.”

그는 애리얼의 태도에 코웃음을 치더니 먼저 자리를 떴다.

웬일로 싱거운 반응이었다.

애리얼은 멀어지는 그를 의아하게 여기다가 이내 의문을 접고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렉시우스와는 이번 여름 휴학기에 대공저에서 만나게 될 터다. 그러니 당장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은 아카데미 내의 상황에 집중할 때였다.

순환 열차에 오른 애리얼은 허전해진 왼쪽 손목을 훑으며 목표를 되새겼다.

과정이야 어쨌든, 스카이라에게 브레이슬릿을 돌려주는 건 끝냈다. 이제 다음을 생각할 때.

열차는 금세 제3 기숙사 동에 도착했다.

애리얼은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본관 1층의 행정실로 향했다. 브레이슬릿을 돌려줬으니 이제 휘아킨과의 불편한 동거를 끝낼 차례다.

그녀가 행정실로 들어가자 행정실 직원이 고개를 까딱거리며 인사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개인적인 사정으로 건의하고픈 게…….”

거기까지 말하고서 애리얼은 말끝을 흐렸다. 이런 일은 홀로 정할 게 아니라 휘아킨에게 먼저 양해를 구하고 상의해야 했다. 그 생각이 뒤늦게 떠올랐다.

“아니에요. 나중에 다시 올게요.”

애리얼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행정실을 나왔다.

오후 한 시쯤 되었을까. 식당을 이용하는 학생들로 1층이 시끌벅적했다.

그 틈에서 애리얼은 조용히 위층으로 향했다.

방에는 아마 휘아킨이 있을 것이다. 그는 이 시각쯤에는 거의 낮잠을 자고 있으니까.

애리얼은 4층 방문 앞에서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렇게 문고리를 쥔 순간.

“선배님.”

미성이지만 확연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겨우 침착해진 애리얼의 표정이 삽시에 흐트러졌다.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다가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곧장 문을 열었다.

침대에 앉아 있는 휘아킨이 보였다. 무슨 연유인지 남자의 모습이었다.

애리얼은 급히 방으로 뛰어 들어가 문을 닫았다.

휘아킨은 능청스러운 얼굴로 침대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검은색 남자 교복이 그의 몸을 감싸고 매끈한 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블랑셰의 모습이 조금도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수려한 소년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매우 위험한 모습이기도 했다. 들키면 큰 소란이 일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태평한 태도였다. 오히려 애리얼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괜찮은 거야? 어디 아픈 건…….”

“아픈 데 없어요. 괜찮아요.”

“……그럼 위장 마법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거야?”

“아뇨. 문제없어요.”

그는 참 담백하게도 답변했다. 정말 아무 문제도 없는 것처럼 당당한 태도였다.

그에 애리얼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저래도 되는 건가.

휘아킨이 너무 뻔뻔하게 굴고 있으니 도리어 애리얼만 혼란스러워졌다. 어디 아픈 것도 아니고 마법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는 위험천만하게 위장을 풀고 있다.

왜 저럴까.

“무슨 다른 문제가 있는 거야?”

“그런 거 없어요.”

“아무 문제 없어?”

“네.”

“그런데 왜 그 모습으로…….”

“싫어요?”

그가 애리얼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그녀의 기호가 중요한 일이 아닌데…….

“아니, 그보단…….”

“좋아요? 싫어요?”

휘아킨은 끈질기게도 그녀의 의중을 물어 왔다. 집요하게 마주쳐 오는 잿빛 눈동자에서 어떤 갈증이 느껴졌다.

애리얼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

아카데미에 다니는 내내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당하며 살아왔을 그였다. 유일하게 제 정체를 아는 상대에게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은 마음…… 일 것이다. 그만큼 주변 환경에 억압받으며 살았을 테니까.

“위장을 했든 안 했든 전부 넌데, 어느 하나가 좋고 싫을 리가 없잖아.”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진심을 담아서 대답했다. 정체성을 찾기 위해 특별 엔딩을 노려 기억을 찾고자 하는 자신처럼, 그도 제 정체성을 찾고 싶을 것이다. 본모습을 인정받길 원할 것이다.

“괜찮아. 네가 어떤 모습이든.”

애리얼은 다정하게 웃었다. 왠지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그가 불안해하지 않길 바랐다.

그녀의 발언이 효과가 있었던 건지, 휘아킨은 조금 웃었다.

“선배님은 역시…….”

조용히 혼잣말을 흘리다가 수줍은 듯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우우우웅-

휴대폰이 진동한다.

‘아, 이번 건 확실히 호감도 상승 알림이다.’

애리얼은 진동음의 정체를 손쉽게 파악했다. 굳이 휴대폰을 꺼낼 필요도 없었다. 휘아킨의 반응이 해답을 알려 줬다. 선명한 호감의 표시.

그게 막 부담스럽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는 히든 캐릭터이니 좀 올라도 괜찮다. 그의 호감도가 몇 개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지만, 불안하지 않았다.

다만 걱정되는 건 위장이 풀린 그의 상태였다. 이런 일이 잦아지면 분명 소문이 돌 테고, 당연히 들킬 위험도 커진다.

애리얼은 넌지시 걱정을 전했다.

“근데…… 위험하지 않아? 들키면 안 되잖아.”

“그건 그런데, 왠지 짜증 나서요.”

“위장하고 있는 게?”

“위장도 짜증 나긴 하는데 그것보다는…….”

우우우웅-

“……가 더 짜증 나서요.”

갑작스럽게 울린 진동음과 휘아킨의 목소리가 겹쳤다. 하필이면 중요한 부분을 듣지 못했다.

애리얼은 당황하여 빠르게 눈동자를 굴렸다. 주머니 속에 든 휴대폰, 그리고 휘아킨.

허둥거리는 애리얼을 보는 휘아킨의 얼굴에 은근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 순수한 의미로는 보이지 않는, 약간은 음흉하게 느껴지는 미소였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했기에 저런 표정을 짓는 걸까. 그리고 방금 전의 진동음은 무슨 의미일까.

애리얼의 머릿속이 시시각각 복잡해져만 가는 와중.

거친 발걸음 소리가 복도를 울리며 문으로 다가왔다. 덜컥,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음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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