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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82)화 (263/264)

“누구세요?”

막무가내로 문을 열려는 행동에 매우 놀란 애리얼이 반사적으로 물었다.

그러나 바깥의 인물은 대답하지 않았다. 두두둑, 문고리가 부서지는 소리를 냈다. 초대하지 않은 불청객이 억지로 문을 돌려 열었다.

그 짧은 순간에도 애리얼은 휘아킨을 숨겨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를 제 등 뒤로 숨기듯 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블랑셰의 모습일 때도 애리얼보다는 크던 그였다. 남자인 모습이 그녀의 체구 뒤로 숨겨질 리 없었다.

설상가상, 그는 숨고 싶은 생각도 별로 없어 보였다.

휘아킨은 그대로 제 모습을 드러낸 채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와 마주했다. 잿빛 눈에 황족의 밝은 금발을 담으면서, 무미건조한 표정을 지었다.

“황자 저하를 뵙습니다.”

그가 애리얼보다도 먼저 말을 꺼냈다. 사교계를 주름잡는 귀족에게도 밀리지 않을 우아한 말투로, 무척 태연하게.

애리얼만 보고서 들어온 스카이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충격에 떨리는 푸른 눈이 빠르게 움직여 휘아킨을 훑었다. 이윽고 경악으로 물든 표정을 지었다.

반면 휘아킨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하. 무하 공작가의 공자, 휘아킨 무하입니다.”

휘아킨의 부드러운 미성이 전하는 인사에, 애리얼은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러니까 이게…… 다 무슨 상황이지?’

갑자기 문까지 부수고 찾아온 스카이라에, 태연히 남자의 모습을 하고 그를 맞는 휘아킨. 그 사이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자신까지.

누가 연출한 건지 몰라도 정말 기가 막히는 촌극이었다.

셋 사이에 싸늘하게 얼음이 덧씌워진 것 같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시간마저 멈춘 듯한 경직된 침묵.

그걸 깨 버린 건 스카이라였다.

“애리얼, 이리 와.”

스카이라는 자초지종을 묻지도 않고 애리얼부터 불렀다. 그 낮게 깔린 음성에는 분노가 선연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하트는 다섯 개니까. 모르는 이성과 한방에 있는 애리얼을 보고 차분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애리얼은 곧장 스카이라에게로 걸어갔다. 당장 휘아킨을 보호하기에도 그게 더 좋았다. 먼저 스카이라를 데리고 나간 뒤, 그와 둘이서만 이야기를 나누는 게 최선이었다.

뒤에 선 휘아킨에게 손목을 붙잡히지만 않았다면 그럴 수 있었으리라.

애리얼의 걸음은 스카이라에게 닿기까지 두 걸음을 앞두고서 멈추었다. 그 순간 스카이라의 얼굴에서 이성이 날아갔다.

강렬한 분노의 기색에 애리얼은 하릴없이 움츠러들었다. 떨리는 눈으로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제 오른 손목을 휘어잡은 휘아킨이 보였다. 휘아킨의 무표정한 얼굴, 잿빛의 두 눈은 스카이라를 향해 있었다.

“가지 마세요, 선배님.”

휘아킨은 스카이라를 보며 애리얼에게 말을 걸었다.

도발이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눈이 반쯤 돌아 버린 스카이라가 확연한 적의를 드러냈다.

“그 손 놔.”

“제가 왜 그래야 하죠?”

휘아킨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룸메이트, 제 룸메이트. 그렇게 애리얼을 칭하며 스카이라를 향해 물었다. 사실 물음도 아니었다. 답을 기다리지도 않았으니까.

“제 선배님께 오라 가라 하지 마세요.”

휘아킨은 연달아 경고하듯 말했다. 무엄한 행동이었다. 아무리 그가 무하의 공자라지만 스카이라는 황족이었다. 심지어 둘은 일면식도 없는 사이다. 이런 행동이 용인될 리 없었다. 더군다나 휘아킨은 지금 약점을 드러낸 상황이 아니던가.

애리얼이 기겁하며 휘아킨을 제지하려 했으나, 스카이라의 행동이 더 빨랐다.

어느새 방 안으로 훌쩍 들어온 스카이라가 휘아킨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위장 입학으로 사기를 친 주제에 태도는 뻔뻔하고, 말투는 건방지고.”

노기로 일그러진 낯에 서늘한 목소리. 스카이라는 휘아킨을 죽일 것같이 노려보았다.

“내가 널 엄벌하지 않아야 할 이유는?”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저하께서 벌을 내리신다면 달게 받아야죠.”

휘아킨이 미미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기이할 정도로 여유가 넘치는 태도였다.

애리얼은 도무지 휘아킨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약점을 감추기 위해 스카이라에게 납작 엎드려도 모자랄 판국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도발을 하다니.

“공자 서하, 말씀을 조심…….”

“공범자 같으니 그만둬, 애리얼.”

휘아킨을 제지하기 위해 꺼낸 말을 스카이라가 뚝 끊어 먹었다. 그의 어투며 눈빛이 너무 매서워서 애리얼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휘아킨이 입을 열었다.

“애리얼 공녀님도 오늘 처음 아셨어요. 제가 남자라는 거.”

애리얼 공녀님. 애리얼. 휘아킨은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말했다. 하필이면 이 상황에서. 스카이라의 앞에서.

그러니 스카이라가 분노하는 것도 당연했다. 핏줄을 드러낸 손으로 휘아킨의 옷깃을 우악스럽게 구겨 잡았다.

“그 건에 대해선 내가 애리얼에게 직접 묻고 들을 거야. 네가 멋대로 변호하지 마.”

소유욕이 짙게 드리운 목소리였다.

휘아킨은 기분이 나쁜 듯 한쪽 눈썹을 치켰다. 지나치게 건방진 행동이었다. 그의 계급을 고려해도 위험할 정도였다.

그 와중에 애리얼은 열린 문 너머로 훤히 트인 복도가 불안했다. 지금은 고요하다지만 언제 학생들이 들이닥쳐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이대로 들킬 수는…….

애리얼은 불안감에 젖은 눈으로 휘아킨과 스카이라를 살폈다.

둘은 아무런 말도 없이 서로를 죽일 듯 노려보고만 있었다. 철천지원수를 대하는 것 같았다. 서로가 견딜 수 없어서 참지 못하는 느낌. 둘 다 오늘이 초면임에도 그랬다. 적의를 넘어서 살기를 비치며 상대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렇게 서로에게 집중하느라 그녀를 향한 관심이 옅어진 순간이었다.

애리얼은 제 손목을 죄고 있던 휘아킨의 손을 뿌리쳤다. 불시였기 때문일까. 그의 손은 쉽게도 떨어져 나갔다.

애리얼은 급히 달려가 문을 닫았다.

그제야 서로를 못 죽여 안달이 났던 둘의 시선이 어긋났다. 동시에 나란히 애리얼에게로 향했다.

맹렬한 시선을 받으며 그녀는 입을 움직였다.

“말이 새어 나갈 염려가 큽니다.”

애리얼이 걱정스레 말하자 스카이라가 휘아킨을 놓고 물러났다. 그런 뒤 소지하고 있던 호출 벨을 눌렀다.

조용한 발소리가 문 앞으로 와 닿았다. 그 즉시 스카이라가 명을 내렸다.

“필릭, 4층을 전부 비워.”

“예, 저하.”

나지막한 보좌관의 음성이 울리고, 바깥에서 적잖은 소란이 일었다. 그러다 이윽고 적막하게 가라앉는다.

4층에는 오로지 셋만 남은 듯했다.

이 고요함 속에서 가장 먼저 움직인 건 애리얼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스카이라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저하와 따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공자 서하, 잠시 자리를 비워도 되겠습니까?”

애리얼은 스카이라를 붙잡고서 휘아킨에게 양해를 구했다. 어찌 보면 휘아킨을 더 존중하는 언행이었으나, 도리어 의기양양해진 것은 스카이라였다. 슬그머니 미소까지 지은 스카이라와 달리 휘아킨의 얼굴은 창백하게 굳었다.

휘아킨은 조금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공자 서하. 제 정체를 알고서도 늘 반말로 말하기를 고수하던 그녀가 존댓말을 썼다. 그는 그녀가 황자를 붙잡은 것보다도, 제게 존댓말을 한 것이 더 거슬렸다. 그녀와 가장 가깝다고 자부했는데. 고작 존댓말 두 마디가 그에게 아득한 거리감을 안겨 줬다.

희게 질린 휘아킨을 보고서 애리얼은 주춤거렸다. 그러나 스카이라는 망설이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 듯한 그녀의 손을 휘어잡고서 문을 열었다.

“이 정도 말했으면 무하 공자도 상황 파악은 되겠지.”

경고하듯 말하고는 애리얼을 데리고 성큼성큼 방을 벗어났다.

애리얼은 스카이라에게 끌려가듯이 움직이며 살며시 휘아킨을 살폈다.

잠시 시선이 맞닿고, 휘아킨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선배님.”

처연한 음성. 그걸 끝으로 문이 닫혔다. 스카이라가 닫아 버렸다.

애리얼은 그제야 저를 붙든 그의 손을 느꼈다. 무척 뜨거웠다.

그는 아픈 몸을 이끌고 여기로 온 것이다.

‘왜?’

갖가지 상황에 밀려 있던 의문이 뒤늦게 떠올랐다. 그와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대화도 연이어 떠올랐다.

“난 너랑 친구 같은 거…….”

결국 수긍하지 못했던 건가.

애리얼은 아픈 몸으로 저를 찾은 스카이라의 뒤통수를 가만히 보았다. 그는 성난 듯이 걷다가 4층의 빈 휴게실에서 멈추었다. 여전히 애리얼의 손을 붙든 채 휙 몸을 돌렸다.

그의 핏발 선 눈이 애리얼에게 꽂혔다.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다. 배신이라도 당한 사람 같았다.

“넌 몰랐던 거지? 블랑셰 멜로르가 무하 공자였다는 거.”

긍정을 종용하는 말투. 그는 애리얼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애리얼은 그러지 않았다. 그랬다간 휘아킨이 이 모든 일을 홀로 감당해야 함을 알았다. 분노한 스카이라는 휘아킨에게 별 자비를 베풀지 않을 것이다. 아들을 방치하다시피 한 공작가에 좋은 대처를 기대하기도 힘들었다.

그러니 그녀가 휘아킨을 도와야 했다. 휘아킨이 그녀 대신 렉시우스를 상대하며 그녀를 도왔던 것처럼.

“아니, 알고 있었어.”

그 한마디에 스카이라는 사색이 되었다. 그러더니 처참하게 낯을 일그러트렸다.

“공자와 말하는 게 다른데.”

“공자님이 날 감싸 주신 거야…….”

그렇게 답하자 스카이라는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사납게 번뜩이는 눈으로 애리얼을 추궁했다.

“그럼 처음부터 알고도 한방을 쓴 거야?”

“처음에는 몰랐어. 어느 날 공자님의 위장 도구에 문제가 생겨서 우연히 알게 되었어.”

“그러고도 계속 같이 지냈다고? 그 좁은 방에서?”

그의 목소리는 질투와 분노로 살짝 떨리고 있었다. 푸른 눈동자는 깊게 상처를 받은 듯 처연한 빛깔을 드러내 보였다. 사납게 그녀를 쏘아보면서 아픔을 토했다.

애리얼은 그 눈을 피하지 않고 침착하게 말을 이어 갔다.

“평소에는 블랑셰 멜로르의 모습이니까, 방을 공유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어. 실제로 블랑셰…… 아니, 무하 공자님은 대부분 방에 계시지 않았고.”

“그래서 그냥 같이 있었다고……. 행정실에도 알리지 않고, 나한테도 아무 말 없이.”

“큰 사정이 있는 거 같아서, 함부로 발설할 수 없었어.”

“무하 공자가 너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런 아량을 베풀어.”

“어쨌든 룸메이트다 보니 어느 정도 친분이 쌓여서 외면하기 힘들었어. 거기다 내 처지도 있으니 동질감이 들었던 것도 같아.”

“그러니까 동정이다, 이 말이야?”

“그 비슷해.”

스카이라는 어이가 없는지 이마를 문지르며 하, 조소를 흘렸다. 그러다가 냉랭해진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근데, 내가 알아 버렸네.”

“…….”

“어쩌지, 애리얼. 나는 그 새끼한테 동질감도 동정도 느끼지 않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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