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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83)화 (264/264)

그의 파란 시선이 애리얼에게 내리꽂혔다.

애리얼은 가만히 그 시선을 받아 내다가 입을 열었다.

“어차피 오늘부로 방을 바꾸려고 했어.”

“그랬어? 네가?”

스카이라의 목소리에서 빈정대는 기색이 느껴졌다.

애리얼은 침착하게 해명을 이어 갔다.

“응.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긴 했으니까, 오늘 공자님께 말하고 방을 바꾸려는데 네가 온 거야.”

“방을 바꾸려고 했다……. 그런데 왜 무하 공자는 그런 꼴을 하고 있었지? 블랑셰 멜로르의 모습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이야기였을 텐데?”

“그건…….”

애리얼은 말끝을 흐렸다. 휘아킨은 왜 남자의 모습으로 있었는가. 정체성을 인정받고 싶어서라고 그녀는 추측했으나, 정확한 이유는 몰랐다. 함부로 추정해서 둘러댈 수도 없었다.

침묵을 지키고 있으니 스카이라가 비소하듯 입술을 비틀었다.

“잘 들어, 애리얼. 네가 그 사기꾼 같은 놈한테 친구로서 정을 붙인 건 알겠는데, 그놈은 널 친구로 안 봐.”

“…….”

“그리고 난 그놈의 기만질을 두고 볼 생각이 없어. 널 봐서 소문이 나지 않도록 조용히 처리하겠지만, 무하 공자의 위장 입학을 덮어 주는 일은 없을 거야.”

그는 싸늘하고 단호했다. 직접 나서서 휘아킨을 정리하겠다며 통보하는 목소리에 자비라곤 한 톨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휘아킨은 황자인 스카이라의 손에 퇴학을 당하게 될 것이다. 심한 따돌림까지 감내하며 신분을 숨기고서 다닌 아카데미 생활을 이런 식으로…….

“어떻게 하면…… 모르는 척 넘어가 줄 거야?”

차마 휘아킨을 외면할 수 없었던 애리얼은 힘겹게 말을 꺼냈다.

당연하게도 스카이라의 기분은 최악을 달렸다. 그의 얼굴은 차마 보기가 두려울 정도로 서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도 애리얼은 휘아킨을 감싸 주고 싶었다. 휘아킨과 지낸 시간은 짧지 않았고, 애리얼은 그가 겪은 고생을 알았다. 카논도 없는 가운데, 그는 유일하게 마음 편히 말을 놓을 수 있는 말동무였다. 신분이 너무 높아 자주 볼 수 없는 다른 공략 대상과는 달랐다. 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정이 쌓였다. 더군다나 무하 공작가에는 솔렘의 시험도 그렇고 아리앨라 건도 그렇고 신세진 일이 많았다. 그러니, 그가 이렇게 퇴학당하도록 둘 수는 없었다.

“부탁이야, 스카이라.”

“…….”

“이번만 눈감아 줘. 방도 바로 바꿀 거고, 앞으로 위장을 풀 일도…….”

“작작 좀 감싸.”

스카이라가 그녀의 말을 다시 잘라 냈다. 분노한 마음을 꾹꾹 억누르는 투였다.

“그 새끼가 해야 할 변명까지 네가 다 하지 말란 말이야.”

그는 신경질적으로 불만을 내뱉었다.

애리얼과 휘아킨은 고작 두 달 남짓 함께했다. 그런데 서로를 감싸 주지 못해 안달이다.

스카이라는 그게 참을 수 없었다. 질투는 열병이 난 몸에 두통까지 불러왔다. 그는 눈을 감고서 구겨진 미간을 꾹 눌렀다. 관자놀이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정상이 아닌 그의 몸 상태가 애리얼의 눈에 적나라하게 포착되었다.

그녀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저렇게 식은땀까지 흘릴 정도인데, 왜 쉬지 않고 여길 왔을까.

의문과 함께 걱정이 크게 피어났다.

스카이라는 쉬어야 했다.

애리얼은 조심스럽게 그의 소맷자락을 쥐었다.

“스카이라, 너 안색이 많이 안 좋아. 일단 쉬는 게 좋겠어.”

걱정 어린 목소리에 그는 감았던 눈을 떴다. 아직 분노가 가시지 않은 눈빛이었다. 그러나 그는 분노하는 대신 차분한 물음을 던졌다.

“내가 걱정돼, 애리얼?”

“당연하지.”

“왜? 친구라서?”

묘하게 날 선 물음이었다.

애리얼은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고작 그걸로 끝내지도 않았다.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네가 중요한 사람이라서.”

“중요하다고……. 그건 내가 황자이기 때문이야?”

“아니. 황자라는 지위를 떼고 봐도 넌 중요한 사람이야. 특히 나에게는…….”

애리얼은 문득 뭔가를 깨달은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필요 없는 이야기까지 흘릴 뻔했다. 급히 말을 고쳤다.

“나한테 넌 은인이기도 하고, 여러모로 고마운 사람이니까. 걱정되고,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고…… 그래.”

그렇게 변명했다. 스카이라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애리얼은 미묘하게 무표정한 그를 올려다보며 마음을 졸였다.

스카이라는 애리얼의 말이 기쁜 동시에 조금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지 난감한 모양이었다. 휘아킨의 건이 흐지부지될까 봐 경계하면서도, 막상 저에게 관심을 주는 애리얼이 좋아서 모든 문제를 덮어 주고픈 마음. 그런 복잡미묘함이 그의 얼굴에 드러났다.

그 읽기 쉬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대던 그가 결심한 듯 입을 벌렸다.

“나랑 약혼하자, 애리얼.”

고백 대신에 구체적인 요구를 내뱉었다.

“미래의 황자비가 되어 줘.”

파랗게 물든 눈동자 가득히 제 진심을 담아 말한다.

“그러면 오늘 일은 전부 눈감아 줄게.”

이건 그녀에게 주어진 선택지일까, 아니면 협박일까.

애리얼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가 이렇게 나오리라고, 알았던 건지도 모른다.

풀을 바른 듯 딱 붙은 입술을 억지로 열어 말했다.

“조금만 시간을…… 유예를 줘.”

***

“저하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래서 여지도 두지 않는 거예요.”

그 말은 그에게 병을 불렀다.

거절을 당했으나 애정은 식지 않았고, 표출할 곳을 잃은 열이 그의 온몸으로 퍼졌다. 절절 끓는 몸은 그 어떤 치료도 거부했다. 약도 치료술도 효과가 없었다.

뛰어나다는 평에 끌어모은 황성의(皇城醫)들은 바보 같은 표정만 지었다.

스카이라는 짜증스럽게 의사들을 상대하다가 모두 내보냈다. 시녀들도 마찬가지로 내보냈다. 극도로 예민해진 그는 혼자 있기를 원했다.

그는 며칠이고 침실에 틀어박혀서 보좌관을 통해 바깥의 상황만 살폈다. 데본시아, 렉시우스, 레이신의 동향에 신경 쓰려고 했다. 혹시나 그들이 애리얼에게 접근하지는 않았을까.

차인 주제에 질투만 심해서 피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꼴사납기 그지없었다.

스카이라는 저 자신이 창피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열병은 밤이 되면 더 심해졌다. 애리얼이 생각나서. 차분하게도 매몰찬 이야기를 전하던 그녀가 너무 선명하게 떠올라서. 기도를 타고 오르는 숨결이 뜨거웠다. 시트를 그러잡다가 갑갑함에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길 수십 번.

내리지 않는 열이 고통스러웠다.

그럼에도 죽지는 않으리라는 건 알았다.

스카이라는 가운 차림으로 창가에 서서 시커먼 밖을 보았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이런 흐트러진 차림으로 창문 앞에 서다니. 과할 정도로 타인의 앞에선 정갈한 모습만 비치길 원하는 그였다.

그런데 지금은…… 다 부질없게 느껴졌다.

약점을 보이지 않으려 아등바등 모든 것을 숨기는 것. 완벽을 가장하고 날카롭게 눈을 빛내는 것. 이 모든 것들이 전부, 하등 쓸모없는 짓 같았다.

형편없이 흐트러진들 그의 지위는 달아나는 것이 아니었고, 아무리 완벽해도 황태자를 앞지를 수는 없었다. 데본시아 다음의 후순위.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애리얼은 달랐다. 물론 그녀가 그를 우선순위로 생각한다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차등을 두지 않을 뿐이었다.

물론 데본시아와 그의 사이에 차등을 두지 않는 인물은 그녀 외에도 있었다. 그의 보좌관이 그랬고, 그의 호위도 그랬다. 그에게도 제 세력이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애리얼이 그에게 특별했던 이유는 하나였다.

애리얼은 충분히 데본시아를 선택해 득을 볼 수 있는 상황에서도 그의 편을 들었다. 별다른 정이 쌓이지 않은, 거의 초면인 상황에서 특별한 이득을 바라지도 않고 그의 편을 들었다. 심지어는 피해를 볼 수도 있는 상황에서.

“왜 황태자의 제안을 거절했어?”

“저하께 무례해서요.”

그에게 충격을 주었던 그 답변이 다시금 생각났다.

스카이라가 친절했던 것도 아니었는데, 애리얼은 그렇게 대답했다.

그런 사람은 처음이었다.

열등감에 좀먹은 그의 자존감이 고작 그 말 한마디로 채워졌다.

사회와 괴리되어 살아온 이여서 그랬을까.

그날을 기점으로 스카이라에게는 그녀가 너무나 특별해졌다. 특유의 차분함도, 의외의 허술함도 좋았다.

등차를 모르는 그 연흑색 눈동자에 담기고 싶었다.

그래서 병이 났다.

일방적인 감정은 채워지지 않아 늘 목이 말랐다. 채워지지 않는 갈망은 집착이 된 지 오래였다.

애리얼이 좋다.

가지고 싶다.

그녀도 저를 가지고 싶어 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녀는 기어코 브레이슬릿을 돌려주러 왔다. 다른 걸 주겠다고 했지만 애리얼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그녀를 붙잡을 명분이 없어진 것 같았다. 절망감과 초조함이 교차했다.

가지 마, 잘해 줄게.

사랑해.

그는 열병에 혼몽한 상태로 무작정 그녀가 사는 기숙사로 향했다.

그리고 거기서, 웬 남자와 함께 있는 그녀를 보았다.

남자의 반반한 얼굴이 그의 이성을 잃게 했다. 적개심에 남자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애리얼은 룸메이트인 남자를 감쌌다. 더러운 기만자의 편을 들었다.

스카이라는 질투로 눈이 도는 것을 느꼈다.

저런 얼굴이 취향이었나. 저렇게 나긋한 목소리가 좋은 건가. 그딴 생각만 들었다. 눈앞에 있는 남자의 얼굴을 짓이기고 목을 조르고 싶었다.

무하 공자.

신분을 감추고 애리얼의 곁에 룸메이트로 붙어 있던 발칙한 인간.

스카이라는 무하 공자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애리얼이 공자를 감싸고 들수록 점점 더 공자가 증오스러워졌다. 죽여 버리고 싶었다. 다시는 애리얼의 곁에 있지 못하도록.

“어떻게 하면…… 모르는 척 넘어가 줄 거야?”

화가 난 그를 달래듯이 애리얼은 애원했다.

“부탁이야, 스카이라.”

빌어먹을 부탁.

솔렘 공작저에서 그를 죽도록 후회하게 했던 부탁이 떠올랐다.

또 그때처럼 그녀는 자신을 희생해서 타인을 감싸려고 했다.

스카이라는 그녀의 자비로움이 싫었다. 감히 그녀의 자비를 받고 그녀에게 감싸이는 모든 것들이 싫었다.

애리얼을 독점하고 싶었다.

약혼하자.

황자비가 되어 줘.

무하 공자의 안위가 걸리자 애리얼은 바로 거절하지 못했다.

스카이라는 협박하듯이 타인을 걸어야만 거부를 멈추는 그녀가 미웠다.

그럼에도 그는 그녀를 원했다. 타인을 족쇄로 걸어서라도 그녀를 가지고 싶었다.

“조금만 시간을…… 유예를 줘.”

애리얼이 대답했다.

그 대답은 그를 슬프게도 기쁘게도 했다. 무하 공자를 걸고넘어져야 유예라도 얻을 수 있는 게 슬펐고, 그래도 이어질 희망이 생겨서 기뻤다.

그토록 싫었던 그녀의 자비 덕에 그녀를 얻을 기회가 온 것이다.

비열하다고 해도 좋았다.

“그렇게 해서라도 가질 수 있기를 바라.”

애리얼을 보낸 후 홀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제야 어떤 치료술을 써도 낫지 않던 그의 열병이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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