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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84)화 (172/264)

스카이라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걸음을 돌리고 제3 기숙사 동을 떠났다. 휘아킨에게는 어떤 징계도 내려지지 않았다.

이건 유예였다.

애리얼은 잠시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을 얻은 것에 불과했다.

황자비를 선택하면 휘아킨의 비밀은 지켜지고, 거부하면 휘아킨은 퇴학.

난감한 갈림길의 앞에서 애리얼은 며칠째 골머리를 앓았다. 어떻게 해야 현명한 것일까. 책상에 앉아 머리를 싸매고 있다가 휴대폰을 꺼냈다.

『▽특별 엔딩에 관하여

*공략 대상 전원의 호감도가 ♥♥♥ 이상일 때에만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의 생일(1월/1일)에 일어납니다.

*그 어떤 공략 대상과도 깊은 인연을 맺지 않은 상태여야 합니다.

*공략 대상 전원(히든 캐릭터 제외)에게서 직접 생일 선물을 받아야 합니다.

*[잠금]

(스토리 진행에 따라 잠금이 해제됩니다.)』

목표로 하는 특별 엔딩, 그걸 달성하기 위한 조건. 그중에서도 세 번째 줄이 눈에 들어왔다.

『*그 어떤 공략 대상과도 깊은 인연을 맺지 않은 상태여야 합니다.』

이것 때문에, 애리얼은 절대 황자비의 자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특별 엔딩을 위해선 친구 이상의 인연은 절대 안 될 일이었다.

하아, 깊은 한숨을 쉬다가 휴대폰을 껐다. 혼자 고심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휘아킨과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 역시 이 일의 당사자이기도 하고.

애리얼은 다시금 휴대폰을 확인했다.

『공략 대상이 근처에 있습니다.』

『휘아킨 무하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과 함께하고 싶어 합니다. 당신을 따라다니거나 찾는 일이 많아집니다.)

▷현재 위치: 아카데미 제3 기숙사 동 - 3층 복도』

기숙사 3층 끝 방에 그의 초상화가 보였다.

그날 이후 애리얼과 휘아킨은 각자 다른 방에서 머물게 되었다. 스카이라는 결정의 유예는 용납했으나 둘이 함께 방을 쓰는 건 용납하지 않았다. 곧장 조처가 내려져 둘은 각자 개인실을 쓰게 되었다.

다만 주변의 시선을 생각해 기숙사를 옮기는 일까지는 벌어지지 않았다.

애리얼은 원래 쓰던 방을 그대로 썼고, 휘아킨은 3층의 빈방으로 옮기게 되었다. 사실 말이 빈방이지 창고나 다름없던 방을 적당히 정리한 데 불과했다. 하지만 기숙사를 바꾸지 않으려면 이 방법밖에는 없었다.

애리얼은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왔다. 층이 바뀐 탓에 그의 방으로 가는 데 눈치가 보였다. 긴장한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복도는 조용했다. 시험 기간이라 학생들은 대부분 도서관에 가 있을 시간이었다.

잰걸음으로 그의 방 문 앞까지 가서 조심스럽게 노크를 했다.

휘아킨은 누군지 묻지도 않고 문을 열었다.

애리얼은 냉큼 그의 방으로 들어섰다. 그가 문을 닫자마자 용건을 꺼냈다.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중요한 이야기야.”

“네, 알아요.”

“……안다고?”

애리얼이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블랑셰의 모습을 한 그는 손가락에 제 은발을 감으며 설명했다.

“절 죽일 것 같았던 황자 저하가 여태 조용하시잖아요? 선배님이 황자님과 어떤 거래를 주고받았다, 그래서 황자님이 저를 못 본 체해 주고 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죠. 마지막에 황자님과 만난 건 선배님이시니까.”

휘아킨의 추측은 정확했다.

이러면 전후 사정을 설명할 필요는 없을 터. 애리얼은 곧장 거래 내용을 말했다.

“내가 황자비가 되기로 약속하면, 황자 저하께서 네 위장 입학을 숨겨 주시기로 했어.”

휘아킨은 무표정하게 애리얼의 말을 듣다가 미간을 좁혔다.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황자비라는 단어에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몰려왔다. 제 처지로 인해 그녀가 내몰린 상황에 이가 갈렸다.

“그런 걸 고민하고 계셨어요?”

그는 분노한 음성이었다. 애리얼의 답변을 기다리지도 않고 연이어 말했다.

“저 때문에 희생하지 마세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하지만…… 그러면 넌? 퇴학으로 안 끝날 수도 있어.”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그건 제 일이에요. 선배님이 그렇게까지 나설 필요는 없어요.”

휘아킨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애리얼은 특별 엔딩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특별 엔딩을 보려면 황자비는 절대 안 될 말이었다.

하지만.

“일단은 대답을 보류하고 최대한 시간을 끌자. 여름 휴학기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설마하니 아카데미를 나가지 않는 중에 퇴학당하지는 않겠지. 후학기까지는 퇴학을 미룰 수 있을 거야.”

“그때까지 방안을 생각해 보자는 거예요?”

“일단은 별 묘안이 없으니까. 어때?”

“…….”

“별로야?”

“아뇨……. 선배님이 왜 이렇게까지 하시나 싶어서요.”

“그건…… 그냥 너랑 정이 들어서. 네가 퇴학당하지 않았으면 해.”

애리얼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걸 들은 휘아킨은 꽤 희한한 표정을 지었다. 웃는 듯 마는 듯 미묘하게 입꼬리를 비틀고, 발긋하게 홍조가 오른 뺨을 손등으로 가렸다.

“선배님은 정말…….”

곤란한 듯 입을 열었다가 말끝을 흐렸다.

애리얼은 그의 반응이 조금 의아했지만 구태여 그에게 묻지는 않았다. 어쨌든 그는 애리얼의 대처를 기꺼워하는 듯 보였으니까. 이대로 밀고 가도 괜찮겠지.

그녀의 짐작대로 휘아킨은 끝내 만류의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다만 그는 한 가지 당부를 건넸다.

“선배님. 혹시라도 시간 끌기가 잘못되면, 그때는 가차 없이 저를 버리세요. 알겠죠?”

“…….”

“퇴학이 되더라도 저한테는 가문과 신분이 보장되어 있으니까 굳이 선배가 희생할 필요는 없다는 소리예요.”

“……그래. 알았어.”

***

애리얼의 기숙사 방에는 매일 황성의 시녀가 다녀갔다. 모두 스카이라 쪽의 시녀였다. 황자비에 대한 결정을 내렸는지 묻기 위해 오는 거였다.

그때마다 애리얼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며 둘러댔다. 그러면 시녀는 순순히 돌아갔다.

덕분에 시간은 잘 끌리는 듯했다.

하지만 이 방법을 오래 끌기엔 눈치가 보였다.

황성 시녀의 잦은 방문은 당연히 이목을 끌었다. 일주일째가 되자 학생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황태자의 총애를 받는 애리얼에게 특별 물품이 지급되고 있다느니, 반대로 총애를 잃어 감시와 압박이 더 심해진 거라느니.

그나마 시험 기간이라 소문이 크게 번지지는 않은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상당히 피곤했을 거였다.

하지만 이것도 요행일 뿐.

다른 대책이 필요했다.

애리얼은 결정을 내리면 직접 스카이라를 찾아가겠다고 말했으나, 시녀는 듣지 않았다. 오히려 애리얼을 압박했다. 이런 식으로 대답을 미루면 황자 저하께서 직접 찾아오시게 될 거라며, 말이다.

위태로운 날이 이어졌다. 매일 방문하는 시녀에 대한 소문은 커져만 갔다.

그럼에도 애리얼은 꿋꿋이 대답을 미뤘다. 다행히 스카이라가 직접 찾아오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시험이 닥치자 소문도 수그러들었다.

그렇게 애리얼은 이틀을 더 버텼다.

***

드디어 마지막 시험을 치르고 여름 휴학기에 접어드는 날이 되었다.

애리얼은 엄숙한 분위기의 시험장에서 조용히 시험지를 넘겼다. 대부분 교양이라 시험은 빨리 끝났다. 어려웠던 건 ‘고대 역사와 마법의 이해’ 정도. 그래도 풀지 못할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녀가 대강 풀이를 끝내고 마지막으로 한번 답안지를 점검할 때였다.

우우우웅-

시험이 한창인 시험장에 진동음이 울렸다.

애리얼은 답안지를 정리하다 말고 흠칫 몸을 굳혔다.

‘접근 알림인가?’

차마 휴대폰이 든 주머니는 건드리지도 못하고서 추측했다.

‘공략 대상들은 전부 나랑 다른 시험장에서 시험을 치르는 것으로 아는데, 벌써 시험을 마친 건가?’

분명 어려운 수업만 들을 텐데 희한했다. 도대체 어떻게 교양 시험을 치는 자신보다도 속도가 빠를 수 있단 말인가.

섣불리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애리얼은 다 완성한 답안지를 붙들고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까의 진동음이 접근 알림일 경우, 이대로 나가면 공략 대상과 마주치게 된다. 그리고 그 대상이 스카이라라면…….

‘어떡하지? 또 대충 답을 미뤄야 하나? 만약 스카이라가 직접 찾아온 거면…… 이번에도 미루는 걸 봐주지는 않을 것 같은데.’

고민이 길어졌다. 그러나 마땅한 해답은 없었다.

사람이 많을 때 함께 섞여 나간 다음 눈에 띄지 않길 바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 큰 도박이었다. 스카이라가 그녀를 못 알아볼 확률은 매우 낮았고, 사람이 많은 만큼 이목도 쏠릴 것이다.

‘차라리 지금 정면으로 마주하고 설득이나마 해 보는 게 낫겠지.’

애리얼은 고심 끝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답안지를 제출하고 시험장을 나오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스카이라를 마주하기가 겁이 났다.

‘뭐라고 변명하면 들어 줄까? 어떻게 하면 시간을 좀 더 끌 수 있지?’

갖은 고민으로 머리를 가득 채우고서 복도에 들어섰다.

“끝났냐?”

바닥만 보며 걷던 애리얼은 의외의 목소리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창가에서 내리쬐는 햇살을 등진 렉시우스가 미소를 지었다. 송곳니를 드러낸 얼굴이 장난기 넘치는 소년처럼 짓궂었다.

“선배…….”

“교양만 세 개를 듣더니, 빨리도 치고 나오네.”

그러는 본인은 더 빨리 온 주제에.

애리얼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서 물었다.

“선배가 어떻게 여길 왔어? 시험은?”

“누구처럼 낙제할 일 없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아…… 알겠어. 근데 왜 여길…….”

애리얼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굴자 그가 눈썹을 치켰다.

“뭘 모르는 척 굴어.”

불쾌함을 드러내는 렉시우스의 말투가 잊고 있던 약속을 상기시켰다.

애리얼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설마…….”

“집에 가야지.”

집이라니, 누구의 집이란 말인가.

부러 중의적으로 들리는 단어를 선정한 그가 애리얼에게로 성큼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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