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리얼은 본능적으로 걸음을 물리며 물었다.
“대공저, 말하는 거지?”
“어.”
“지금 바로 가자는 거야?”
“당연하지. 여름 휴학기에 오기로 했잖아. 지금부터 휴학기 아닌가?”
“그렇다고 이렇게 바로 가는 건 곤란해, 선배. 나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한걸.”
“시종한테 시켜서 정리하라고 해. 필요한 게 있으면 내가 다 사 줄 테니까, 몸만 와.”
그가 어마어마한 소리를 직설적으로 꽂아 버렸다. 청혼이라도 하는 듯한 말본새였다.
경악한 애리얼이 손사래를 치며 대여섯 걸음을 더 물러났다.
“그럴 필요 없어.”
거부를 말하며 물러나기가 무섭게 그가 따라붙었다. 더 도망치지 못하도록 그녀의 손목을 덜컥 쥐고서 위협적으로 웃는다.
“그럼 필요해지면 말해.”
“선배, 일단은 백작저에 들렀다가…….”
“전화만 넣으면 되지 뭐 하러 직접 들러야 해?”
“어머니께 말씀은 드리고 가고 싶어.”
“그래? 그럼 허클리 백작도 우리 집에 부르면 되겠네.”
말이 통하질 않았다. 그는 이대로 애리얼을 데려갈 생각이었다.
애리얼은 그에게 팔목을 붙잡힌 채 불안해하며 눈동자를 굴렸다. 시험은 끝났지만 그녀에겐 아직 남은 일들이 많았다. 아직 레이신에게 선물도 주지 못했고, 휘아킨에게도 이렇다 할 대책을 알려 주지 못했는데…….
‘스카이라를 만나지 않고 넘길 수 있다면 차라리 이게 나을까?’
그런 생각이 혼란스러운 뇌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아예 대공저로 가 버리면 스카이라를 만나기란 힘들 것이다. 아무리 황족이라도 대공의 허락 없이 대공저에 무턱대고 방문하기는 어렵다. 심지어 대공이 전장에 나간 상태이니 더더욱 그렇다. 황권이 강하더라도 전쟁 영웅의 심기는 살펴야 한다. 그러니 대공저 쪽에서 거절하면 아무리 황자라도 손쓸 도리가 없을 터.
게다가 렉시우스와의 일이 선약이니, 스카이라도 대놓고 딴지를 놓기는 어렵지 않을까.
잘하면 결정에 대한 유예를 손쉽게 늘릴 수 있을 것이다.
사고가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마침 울리는 진동 소리.
우우우웅-
휴대폰이 주머니 속에서 요란하게 존재감을 뽐냈다.
무조건 접근 알림이다. 이번에야말로 스카이라일 거다.
안색이 대번에 사색으로 바뀐 애리얼이 다급하게 렉시우스를 붙잡았다.
“알았어, 선배. 지금 당장 가!”
렉시우스의 눈이 둥글게 커졌다. 급작스러운 태도 변화를 보이는 애리얼이 어이가 없으면서도, 기회다 싶었다.
“좋아. 무르기 없…….”
“선배, 순간 이동 해 줘!”
초조해진 애리얼이 그의 말까지 끊으며 급히 재촉했다.
렉시우스는 웃으며 애리얼의 어깨를 감쌌다. 그대로 둘의 인영은 자취를 감췄다.
순식간에 인기척이 사라진다.
조용해진 복도에 누군가가 뒤늦게 걸어왔다. 애리얼과 렉시우스가 방금까지 서 있었던 아치형 창문 앞에 서서 불쾌한 듯 미간을 모았다.
한 사람의 인영만 어른거리는 복도.
애리얼에 뒤이어 시험을 마친 학생이 구두 소리를 내며 걸어왔다.
그러다 창문 앞에 선 이를 보고 급히 고개를 숙였다.
“화, 황자 저하를 뵙습니다!”
넙죽 인사하는 학생을 보고서도 스카이라는 묵묵부답이었다. 얼굴만 험악하게 찌푸린 채 머리를 조아린 학생의 옆으로 휙 지나쳐 갔다. 그의 화난 걸음걸이는 쌩쌩 바람이 일 듯 빨랐다. 그는 그대로 속도를 더하며 건물을 빠져나왔다.
헤일스는 잔뜩 구겨진 낯으로 나오는 제 상관을 보고서 헛숨을 들이켰다. 차 문을 열며 그의 안색을 면밀하게 살폈다.
“저하…….”
“침묵은 긍정이라고도 하잖아. 끝까지 답을 미루는 건 침묵이고. 안 그래?”
“네? 아…… 네, 그렇습니다.”
헤일스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기회는 줄 만큼 줬어. 이젠 나도 내 마음대로 할 거야.”
스카이라가 조용히 중얼거리며 차에 올랐다. 선전 포고였다. 그늘진 차 안에서 푸른 눈이 매섭게 번뜩였다.
***
순식간에 시야가 전환되었다. 붉은 바탕에 금색 문양이 촘촘하게 그려진 벽면이 보였다.
강렬한 색감에 애리얼은 약간의 어지럼증을 느끼다 휘청거렸다. 무너지려는 그녀를 렉시우스가 부드럽게 부축했다. 한술 더 떠 그녀의 머리를 제 가슴팍에 기대게 하곤 장난스럽게 물었다.
“잠깐도 못 참을 만큼 빨리 오고 싶었어?”
“그, 그런 게 아니라…….”
애리얼은 어색하게 변명하며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렉시우스는 의외로 쉽게 그녀를 놔줬다. 여기까지 온 이상 어차피 도망치기는 어렵다는 걸 아는지.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애리얼은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방 안에는 눈이 따가우리만치 번쩍거리는 황금 장식품이 즐비했다. 어지간한 귀족들도 엄두를 못 낼 만큼 사치스러운 곳이었다.
“선배, 여기 대공저야?”
“응. 좋지?”
“어, 그러니까…… 호화롭네.”
“좋다는 거야, 싫다는 거야?”
그가 테이블에 놓인 황금 촛대를 툭툭 건드리며 툴툴거렸다.
애리얼은 금방이라도 바닥으로 추락할 듯 휘청거리는 촛대를 불안해하며 바라보았다. 척 봐도 몇백만 실론은 족히 갈 듯한 장식품이었다. 그런데 그는 한낱 장난감 다루듯이 건드리고 있었다. 괜히 애리얼만 조마조마했다. 얼른 대답을 해 주지 않으면 저 촛대가 바닥으로 추락하리라.
“……좋다는 말이야.”
“그래?”
그가 촛대를 건드리다 말고 나긋하게 웃었다.
“마음에 들어서 다행이다. 전부 네 거야.”
“……뭐?”
“전부 네 거라고.”
“선배 집에 있는 게 왜 내 건데?”
“그건…….”
렉시우스는 말을 꺼내다 말고 그답지 않게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애리얼은 그 미소를 꺼림칙하게 느꼈다.
“선배, 왜 말하다 말고 웃는 거야…….”
“그냥.”
진지하게 물어도 그는 짧은 답으로 얼버무렸다.
왜 저러지. 애리얼은 기묘한 불길함을 느꼈다. 스카이라를 피하고자 급한 대로 대공저로 온 것이 과연 좋은 선택일까.
어느새 문을 열고 방 밖으로 반쯤 몸을 뺀 렉시우스가 애리얼을 불렀다.
“애리얼, 일단은 나와. 집에 연락해야지.”
“아, 응.”
애리얼은 금장식품들 사이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두꺼운 양탄자가 깔린 바닥이 푹신푹신했다. 분명 저 장식품들이 떨어져도 흠이 나지 말라고 깔아 둔 거겠지. 섬세하게 배치해 둔 것도 그렇고, 대공저에서는 이 방의 장식품들을 꽤 신경 써서 보관하고 있었다. 귀중품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왜.
“마음에 들어서 다행이다. 전부 네 거야.”
그는 무슨 뜻으로 그런 소릴 했을까.
농담이라고 치부하고 싶었지만, 왠지 농담이 아닌 것 같았다.
애리얼은 위험한 직감이 들었으나 애써 무시하고 그를 따라갔다.
아래층에 있던 사용인들은 갑자기 나타난 대공자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미리 전달받은 사항이 있는 듯 태연하게 응접실로 안내했다.
응접실에는 수화기가 놓여 있었다.
애리얼은 소파에 앉아 수화기를 들었다. 곧장 백작저에 연락을 넣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백작은 아주 간단히 수긍했다. 원하는 대로 하라는 답이 떨어졌다. 필요한 건 보내 주겠다고도 했다.
내심 백작이 반대하기를 바랐던 애리얼은 조금 시무룩해졌다. 대공저에서 빠져나갈 구실 하나가 줄었다.
“왜? 마음대로 안 됐어?”
맞은편 소파에 앉은 렉시우스가 히죽거리며 그녀를 약 올렸다.
애리얼은 표정을 무심하게 고치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레이신의 생일 선물에 관해선 얘기도 못 꺼냈다. 그가 감시하듯 보고 있는 탓이었다.
그녀의 불편함을 간파한 듯 렉시우스의 금색 눈이 예민하게 움직였다.
“다른 데 전화 더 안 해?”
“더 할 데가 없어.”
“진짜? 할 데 많아 보이는데?”
“진짜 없어.”
애리얼은 고개를 저었다. 아카데미에 있는 짐은 백작저에서 사람을 보내 가져오기로 했다. 휘아킨에게 자초지종을 전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리긴 했으나, 렉시우스가 있는 앞에서 휘아킨에게 연락할 수는 없었다.
눈치 빠른 렉시우스는 애리얼의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연락할 일 있으면 숨어서 몰래 하지 말고 여기 와서 해.”
“응, 고마워.”
애리얼은 고분고분 대답했다. 여기 수화기로는 절대 개인적인 얘기는 하지 말아야지. 속으로는 그렇게 다짐하면서 말이다.
“근데, 선배. 나는 왜 초대한 거야?”
“놀자고.”
“…….”
“왜 그렇게 봐? 나랑 놀기 싫어?”
장난스럽게 꺼낸 소리일 텐데 어쩐지 무겁게 들렸다.
애리얼은 멈칫, 굳은 얼굴로 그를 살폈다. 그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그런데도 왜 그의 말이 가볍게 들리지 않고 의미심장하게만 느껴질까.
의심이 깊어지려던 찰나, 응접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어머, 애리얼!”
함박웃음을 지은 대공비가 사뿐사뿐 다가왔다. 그녀의 머리에 장식된 백은의 종달새 장식이 눈길을 끌었다.
푸른색 드레스를 입은 대공비는 렉시우스와는 영 딴판인 분위기를 풍겼다. 다정하고 솔직한, 속이는 거라곤 전혀 없는 느낌.
그녀의 등장에 애리얼은 불길한 의심이 가시고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대공비 전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이구나. 거의 일 년 만이지?”
“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초면도 아닌데 너무 격식 차릴 필요 없단다.”
아이처럼 밝게 웃는 대공비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는 애리얼의 손을 꼭 쥐고서 또래 친구처럼 정겹게 굴었다.
친근감이 느껴지는 스킨십이었다.
그제야 애리얼은 경계를 풀고 살며시 웃어 보였다. 렉시우스와 있을 때는 짓지 않았던 표정이었다.
렉시우스는 입꼬리를 비틀며 이를 깨물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높아진 목소리로 재잘거리는 대공비와 그녀에게 집중 중인 애리얼. 렉시우스는 대공비를 더 스스럼없이 대하는 애리얼을 못마땅하게 쏘아보았다.
살벌한 시선을 느낀 애리얼이 렉시우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렉시우스는 모르는 척 능청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무심해진 그의 얼굴이 대공비를 향했다.
“어머니.”
정중하게 가다듬은 목소리를 내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대공비는 떨떠름하게 제 아들을 마주했다. 묘하게 긴장한 듯 보이기도 했다. 이상하게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수상했다.
‘아들을 대하는 데 대체 왜 긴장하지?’
애리얼은 의아함을 느끼며 둘을 살폈다. 대공비의 성격상 렉시우스를 어려워할 리가 없을 텐데.
렉시우스는 애리얼의 시선을 눈치채곤 능청스럽게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시험장 앞에서, 누군가 접근한 탓에 한껏 초조해졌던 그녀를 떠올렸다. 그 덕분에 운 좋게, 이리도 쉽게, 애리얼을 데려왔다. 그는 눈꼬리까지 살짝 접으며 대공비를 향해 당부했다.
“데려왔으니, 이제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