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비는 한숨을 쉴 듯한 얼굴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자야말로 처신 잘하시길 바랍니다. 이 어미 걱정은 하지도 마시고.”
“명심하겠습니다.”
그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까딱 숙였다. 예의 바른 태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공비는 줄곧 탐탁지 않다는 듯한 눈빛을 보였다. 그녀의 얼굴에서 왜인지 모르게 자꾸 초조함이 묻어났다.
둘 사이에 뭔가 모종의 계획이 있는 것 같은데.
애리얼이 의심스러워하는 시선을 던질 때쯤, 렉시우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금색 눈동자가 애리얼을 향했다.
“애리얼.”
“선…… 아니, 대공자 저하.”
대공비의 앞임을 인지한 애리얼이 다급히 호칭을 고쳤다.
렉시우스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칼을 장난스럽게 헝클었다.
“난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잠깐 나갔다 올게.”
“어디를…….”
“갔다 와서 말해 줄게. 잘 놀고 있어.”
그가 자상하게도 말했다.
잘 놀고 있으라니, 애 취급인지 기르는 개 취급인지.
애리얼은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리하며 무표정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렉시우스는 그 무심한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애리얼은 영문도 모른 채 두 눈을 깜박이고만 있었다. 참, 사람을 서운하게 하는 표정이다. 그는 검지를 뻗어 그녀의 이마를 톡 건드렸다.
“나 보면서도 좀 웃고 그래라. 마음 아프네.”
“마음이 아플 것까지야…….”
애리얼은 말끝을 흐리며 앞머리를 당겨 빗었다. 그는 이마를 가리는 애리얼을 향해 씩 웃음을 지어 주고는 응접실을 나갔다.
렉시우스가 떠나자 응접실에는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하지만 곧 대공비가 어색해지려는 분위기를 깨고서 말을 걸어왔다.
“그나저나 애리얼, 식사는 했을까?”
애리얼은 공손하게 양손을 모으고서 그녀를 마주했다.
“아직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같이 먹을래? 어떠니?”
“네, 영광입니다.”
“영광이라니……. 그렇게까지 격식 안 차려도 된다니까?”
대공비가 생긋 웃으며 애리얼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친근감 넘치는 스킨십에 애리얼은 긴장이 탁 풀렸다. 그녀를 향해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조금만 편하게 말할게요.”
그랬더니 대공비는 격식 없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좋아했다. 대공저에서만 지내셔서 조금 외로우셨던 걸까. 애리얼은 유난히도 제게 친밀함을 보이는 대공비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기쁘게만 받아들였다.
***
렉시우스는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왔다.
실습 시험이 치러지는 원형 시험장의 앞.
그는 건물로 들어가려다 말고 손등으로 코 아래를 닦았다. 벌건 피가 묻어났다. 장거리 순간 이동을 두 번이나 한 탓에 코피가 터진 것이다. 마력이 꽤 크게 고갈되었다.
‘일 났네.’
피 묻은 손등을 보며 인상을 구겼다. 실습 시험을 치러야 하는데 마력 상태가 좋지 않았다.
보좌관, 메튼이 그를 포착하고서 바쁘게 뛰어와 손수건을 건넸다.
렉시우스는 손수건으로 얼굴과 손등의 피를 닦으며 물었다.
“연결 통로는 제대로 폐쇄했어?”
“예. 흔적도 없도록 처리했습니다.”
“알았어. 시험 후에 확인할 테니까 주변 정리도 잘해 놔.”
“예. 그런데 저하, 지금 상태로 시험을 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메튼이 벌겋게 물든 손수건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렉시우스는 피식 웃으며 피에 젖은 손수건을 그에게 건넸다.
“못 치면? 네가 대신 쳐 주기라도 하게?”
“……시험을 미루는 방안도 있습니다.”
메튼은 얼룩덜룩해진 손수건을 받아 챙기며 조용히 전했다.
그 소리에 렉시우스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눈까지 가리고 꽤 격하게 하하 웃다가 머리칼을 쓸어 넘기더니 나중에는 킥 조소하는 음성만 남겼다.
“뭐, 내가 낙제라도 할 거 같아서 그래?”
“아니, 아닙니다.”
메튼은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리 마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라 해도 제 주군이 아카데미 시험에서 낙제할 일은 없었다. 뒤늦게 그의 재능 수준을 깨닫고는 사죄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시험 날 코피나 흘리는 주군인데.”
렉시우스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거리다가 걸음을 옮겼다.
실습 전용 시험장에서는 대련 시험이 한창이었다.
쾅, 콰앙. 작고 큰 소음들이 드문드문 울렸다.
대련 시험은 일대일로 마주해 마법이나 마도구로 전투를 벌이는 방식을 취했다. 보통 수준이 비슷한 상대를 배정받아 시험을 치렀다. 전투라는 시험 방식을 취하는 만큼 필연적으로 시험장이 파손되기에, 마력이 강할수록 시험 순서가 나중으로 밀렸다.
렉시우스의 시험 순서는 가장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스카이라의 순서도 가장 마지막이었다.
서서히 비어 가는 대기실 안. 멀찍하게 거리를 두고 앉은 둘은 한마디도 나누지 않고 순서를 기다렸다.
드디어 대기실이 전부 비고 그들의 순서가 왔을 때, 시험장에는 날 선 긴장감이 팽팽했다.
황자와 대공자가 각기 다른 입구에서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그 둘이 원형 시험장의 중앙에 마주하고 선 순간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교수와 조교들, 사고 예방을 위해 배치된 기사들과 마법사들까지 모두 뻣뻣하게 굳었다. 침조차 삼키기 힘든 분위기가 이어졌다. 마법사들은 방어 결계를 겹겹이 덧씌우고는 시험 개시를 외쳤다.
그 순간 대기가 파르르 진동했다.
상극의 마력이 뒤섞여 스파크를 만들어 냈다.
곧장 결계 하나가 깨졌다.
파지지직! 쾅!
굉음을 내며 건물 전체가 흔들렸다. 뿌옇게 먼지가 일고, 앞뒤 분간도 어려운 순간이 찾아왔다.
둔탁한 충격음만이 선명했다.
시험장 내의 인물들은 모두 긴장에 헛숨을 들이켰다.
콰앙! 쾅!
연달아 터지는 폭음과 함께 두 번째 결계가 깨져 나갔다.
“시험을 중단해야 하는 것이…….”
보다 못한 마법사 한 명이 급히 입을 뗐다. 그리고 그때, 푸른빛이 도는 결계가 새로 씌워졌다. 어마어마한 견고함을 자랑하는 황자의 방어 결계.
새파란 막이 교수를 비롯한 시험관들과 시험을 치르는 두 고위 계급의 사이를 갈라 놓았다. 불투명한 결계라 안쪽이 보이지 않았다. 소리조차 들려오질 않았다. 함부로 개입하지 말라며 으름장을 놓는 것 같았다.
절대 냉철한 판단을 내려서 친 결계는 아니다.
시험관들은 사색이 되어 멍하니 파란 결계만 주시했다.
이제 시험은 중단할 수 없게 되었다.
결계의 안쪽은 난장판이었다.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피 냄새가 났다.
그 가운데서 스카이라와 렉시우스가 대치를 이어 갔다.
렉시우스가 코피를 신경질적으로 닦아 내곤 붉게 물든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은 스카이라가 단도를 들고서 냅다 달려들었다. 극도로 감정적인 반응이었다. 그런 만큼 속도가 빨랐다.
반면 렉시우스는 동작이 느렸다. 강한 공격술이 피할 길 없이 직격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평소라면 어찌어찌 받아쳤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정상 상태가 아니었다. 급히 방어술을 펼치려 했으나 다 막기엔 마력이 모자랐다.
마력 대신 몸을 써서라도 공격을 흘려 내야 했다.
렉시우스는 팔을 뻗어서 정면으로 바짝 다가온 스카이라의 칼날을 쥐었다. 날카로운 양날 검에 손가락과 손바닥이 패였으나 개의치 않았다. 그대로 칼을 쭉 당기며 스카이라의 뒷덜미 옷깃을 쥐었다. 앞으로 몸이 쏠린 스카이라는 의외로 쉽게 당겨졌다. 그 틈에 렉시우스는 몸을 휙 틀며 스카이라를 던져 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이번에는 스카이라가 버텼다. 강한 방어술이었다. 그는 렉시우스에게 뒷덜미를 잡힌 채로 곧장 새 술식을 전개했다.
위험을 감지한 렉시우스는 억지로 힘을 주고 그를 밀어 쳤다. 우두둑,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스카이라가 멀리 밀려났다. 렉시우스를 향하던 공격술의 방향이 틀어졌다. 새파란 마력의 빛이 바닥을 분쇄했다.
콰앙! 쾅! 우르르르.
갈라져 무너진 바닥 사이로 깊은 골이 형성되었다.
렉시우스는 뾰족하게 솟아오른 잔해물을 피해 뒤쪽으로 물러났다. 아까 스카이라를 밀어 치는 과정에서 오른팔이 완전히 부러졌다. 그나마 멀쩡한 왼손으로 흐르는 코피를 닦아 냈다. 마력이 바닥을 보였다. 이래서야 뭘 할 수가 없다.
부연 먼지 속에서 스카이라의 파란 두 눈이 빛났다. 선연한 증오를 태우는 눈.
“렉시우스 크레시앙.”
“정 없게 풀 네임을 부르고 그래.”
렉시우스는 자주 쓰는 팔이 부러지고도 여유롭게 웃었다.
스카이라는 저 여유가 가증스러웠다. 마력이 떨어져서 제대로 대응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왜 애리얼을 대공저로 데려갔지?”
“애리얼이 데려가 달라던데?”
“개소리 집어치워!”
스카이라가 사납게 외쳤다. 그러곤 제 금발 머리를 마구 헝클며 짜증을 표출하다가 악, 소리를 질렀다.
렉시우스는 스카이라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웃음기를 지웠다. 스카이라는 절벽에 내몰린 듯한 정신 상태였다. 초조하고 열이 받아서 주체를 못 하고 있었다. 온전히 렉시우스만을 향한 증오는 아니다. 필시 애리얼과 관련이 된 감정이다.
렉시우스가 경계하는 사이, 스카이라는 손가락을 꺾으며 다음 술식을 준비했다.
“네가 뭔 짓거릴 하려고 걜 대공저에 데려갔는지는 몰라도, 좋은 일은 아니겠지. 그러니까 애리얼한테 못 가도록 여기서 반신불수로 만들어 놓을까. 마침 네 상태도 안 좋고.”
“…….”
“반신불수까지는 아니더라도 다리 정도는 부러뜨려야겠다.”
그 발언에 렉시우스는 하, 조소를 토해 냈다. 이윽고 시퍼런 안광을 번뜩이는 스카이라를 똑바로 보고 말했다.
“할 수 있으면 한번 해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