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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87)화 (175/264)

시험장의 사정을 들은 대공자의 보좌관, 메튼은 다급하게 황성으로 향했다. 시험으로 대련을 치르는 건 알았으나, 상대가 황자인 줄은 몰랐다.

설마 별일이야 있을까 싶었지만, 아니었다.

이십 분 정도가 평균이라던 시험은 한 시간이 지나도 끝나지 않았다. 장거리 순간 이동 탓에 마력도 모자란 제 주군이 과연 무슨 꼴을 당하고 있을지, 감히 추측하기도 두려웠다. 메튼은 사색이 되어서 황태자를 찾아갔다. 둘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황태자는 몹시 바쁜 몸. 아무리 대공자의 수석 보좌관이라 한들 황태자를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메튼은 초조하게 서성거리며 응접실에서 한 시간을 더 기다렸다. 그제야 겨우 황태자가 나타났다.

메튼은 빠르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황태자는 차분한 얼굴로 그의 말을 듣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순간 이동은 쓰지 않았다. 그는 느긋한 태도로 차에 올라서 시험장으로 향했다.

황태자가 시험장에 도착했을 때도 대련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황태자는 파란 벽과 같은 결계를 보다가 무심한 눈으로 술식을 발동시켰다.

견고히 버티던 결계가 조금씩 균열을 일으키며 우지직거리는 소리를 냈다. 처음에는 별로 표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오 분 정도가 지나자 결계는 눈에 띄게 금이 갔다. 그 후로 일 분이 더 지났을 때, 결계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시험관들이 콜록거리며 기침을 했다.

황태자는 밀려드는 먼지가 불쾌한 듯 손가락을 까딱했다. 그 즉시 시야를 가리고 기도를 따갑게 하던 먼지가 싹 사라졌다.

그제야 시야가 온전해졌다.

사라진 결계 너머로 완전히 파괴된 시험장이 보였다.

그 와중에도 황자와 대공자는 여전히 대치하고 있었다. 둘 다 엉망인 꼴이었다. 그나마 황자는 옷이 구겨지고 여기저기 긁힌 상처가 남은 게 다였지만, 대공자의 상태는 심각했다.

부러진 오른팔, 왼쪽 옆구리부터 오른쪽 어깨까지 길고 깊게 그인 상처, 심한 출혈. 척 봐도 중상이었다.

심하게 다친 제 상관을 포착한 메튼이 눈에 띄게 기겁했다. 전장에서도 저 정도로 다치는 일은 극히 드문 사람이었다. 그런데 저 꼴은…….

이건 시험을 치른 게 아니었다. 황자와 대공자는 대놓고 서로를 죽이려고 싸운 거였다.

메튼을 포함해 시험관들이 모두 경악한 사이, 황태자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적당히 싸워.”

그는 고작 그 한마디를 던지고는 발길을 돌렸다.

다른 조처는 없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둘은 싸울 의지를 잃었다. 애 다루듯 하는 황태자의 말에 자존심이 상했다.

황자는 무표정하게 대공자를 노려보다가 먼저 시험장을 나왔다.

그 뒤 대공자가 입 안에 고인 피를 퉤 뱉고는 천천히 난장판을 걸어 나왔다.

메튼이 곧장 달려가 그의 상태를 살피고 치료술사들을 불렀다. 상처는 컸지만 렉시우스는 단 한 번도 침대에 눕지 않았다.

부러진 팔은 고쳐졌으나 그인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치료술사들은 그가 입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공자는 듣지 않았다. 적당히 치료를 끝내고 곧장 대공저로 향했다.

그걸로 큰 사건이 될 뻔했던 시험은 일단락되었다.

대공저로 가는 차 안에서 메튼이 넌지시 물었다.

“저하, 대체 무슨 일로 이렇게 격한 전투를 벌이게 되신 겁니까?”

고개를 젖히고 있던 렉시우스가 슬그머니 눈동자만 굴려 메튼을 보았다.

“그게 궁금해?”

“예. 제 상관을 이토록 다치게 만든 사건이 아닙니까. 전장에서도 이리 다친 적 없으셨던 분인데.”

“전장에서 만난 왕국 놈들보다야 스카이라가 훨씬 강하긴 해.”

렉시우스는 대강 대답하고는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

평소라면 이쯤에서 메튼도 입을 다물었겠으나, 오늘은 아니었다.

“……이해가 안 갑니다. 황자 저하께선 대체 왜 그러신 겁니까? 대공자 저하와 그리 나쁜 사이도 아니셨지 않습니까. 몇 번을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가 안 갑니다.”

“이해할 필요 없어.”

렉시우스는 그렇게 일축하며 다른 질문을 잘라 냈다.

메튼은 한숨을 삼키며 말을 줄였다. 그러고는 조용히 제 상관의 상태를 살폈다.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은 대공자의 날카로운 턱선과 그 아래로 이어지는 긴 목. 벌어진 셔츠 사이로 보이는 붕대에는 피가 배어 나와 있었다. 몸을 길게 그은 상처가 제대로 아물지 못해 출혈이 재차 일어난 모양이었다. 치료를 완전히 마치지 못한 몸의 이곳저곳에 감긴 붕대가 피 냄새를 풍겼다.

이런 꼴로 돌아가면 대공비께서 뭐라고 생각하실까.

무심한 상관을 대신해 메튼만 시름에 잠겼다.

***

몇 시간 전, 렉시우스와 스카이라가 막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을 즈음.

애리얼은 화사한 햇살이 비치는 발코니에 앉아 대공비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대공령에서 유명하다는 갖은 짐승들의 고기 요리에 이어 산뜻한 과일 디저트로 마무리되는 구성이었다.

대공비는 식사 내내 끊임없이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주로 렉시우스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녀는 맑은 목소리로 렉시우스가 얼마나 속을 썩이는지 토로하다가 또 렉시우스가 얼마나 괜찮은 남편감인지 설파했다. 애리얼은 대공비의 말을 가만히 들어 주며 이따금 고개를 끄덕였다. 맞장구를 치기도 했다.

렉시우스에 대해 말하는 대공비는 영락없는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위태롭게만 구는 아들 때문에 온갖 근심 걱정을 다 달고 사는 어머니. 아무리 대귀족이라도 결국 어머니의 고민은 다 비슷하구나 싶어서 정겹게 느껴졌다.

그래서였을까.

애리얼은 평소보다 두 배는 많은 양을 먹었다. 날씨도 따스하고, 분위기도 편해서였다. 자꾸만 이것도 먹어 보라 저것도 마셔 보라 권하는 대공비의 영향도 컸다.

먹을 땐 몰랐는데, 먹고 난 후가 문제였다.

애리얼은 배가 터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다가 결국 소화제를 찾았다. 대공비는 뒤늦게 놀란 얼굴을 하고서 미안해하며 요리를 물렸다. 빠르게 하녀를 불러 편히 쉴 수 있는 자리로 애리얼을 안내했다.

***

대공저 본관의 2층, 햇살이 잘 드는 따스한 방.

애리얼은 작은 유리병에 담긴 소화제를 마시고 소파에 기대앉았다. 발밑에 닿는 하얀 러그가 푹신했다. 발목을 까딱거리다가 소파에 축 늘어졌다.

배는 부르고, 날은 따뜻하고, 주변은 조용하다.

애리얼은 허공을 보다가 꾸벅꾸벅 졸았다. 고개가 이리저리 기울었다. 그러다가 상체마저 기울어져 소파에 풀썩, 모로 쓰러졌다.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푹신푹신한 소파의 감촉이 좋았다. 애리얼은 그대로 눈을 감고 잠에 빠졌다.

그렇게 시간이 상당히 흘렀다.

애리얼은 누군가 문을 여는 소리에 움찔거리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더블 도어를 열고 들어온 인물의 붉은 머리칼이 보였다.

선배가 온 건가. 애리얼은 눈을 비비며 상체를 일으켰다.

“누구…….”

“미, 미안. 나 때문에 깼어?”

렉시우스라기엔 지나치게 앳된 목소리가 대답했다.

서서히 명료해지는 시야에 파란 눈을 가진 적발의 소년이 포착되었다.

“아, 공자님, 안녕하세요.”

애리얼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우레우스는 손을 뒤로 한 채 쭈뼛거리다가 애리얼의 앞으로 다가왔다.

“오, 오랜만이야!”

우렁차게 인사한 우레우스가 뒤에 숨겨 온 것을 쑥 내밀었다. 하얀 리본을 단 연분홍색의 장미꽃이었다. 가시를 전부 다듬어 매끈해진 줄기가 눈에 띄었다.

“저에게 주시는 건가요?”

“그게, 그…… 이런 거 좋아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우레우스는 뺨을 빨갛게 물들이고는 시선을 피했다.

애리얼은 그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우레우스의 손에서 연분홍색 장미가 넘어왔다. 그녀는 화사하게 피어난 꽃을 소중하게 받아 들고서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애리얼의 미소에 우레우스는 귀와 목까지 붉게 물들였다.

수줍은 첫사랑을 겪는 우레우스의 모습에 애리얼은 문득 스카이라를 떠올리고 말았다. 그때 그 고백을 받아들였으면 스카이라도 저런 얼굴을 했을까. 한심한 생각을 하다가 이내 지워 버렸다. 어린 소년의 호의에서마저 그를 떠올리다니. 심지어 그를 피해서 도망친 대공저에서 말이다.

애리얼은 씁쓸한 눈빛을 감추며 고개를 떨궜다. 손에 고이 쥔 장미가 시야에 잡혔다. 겹겹이 겹친 꽃잎이 탐스러웠다.

이곳에서는 꽃을 선물할 때 꽃말을 중요시한다고 들었는데. 연분홍 장미의 꽃말은 뭘까.

그런 사념에 잠길 때쯤이었다.

그녀의 정수리를 내려다보고 있던 우레우스가 입을 열었다.

“근데 너…… 왜 혼자 있어?”

애리얼은 떨궜던 고개를 들고서 그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우레우스는 움찔거리며 물러났다. 장미처럼 붉어진 뺨이 여전했다.

“제가 속이 좋지 않아서, 대공비께서 혼자 쉴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습니다.”

“뭐? 너, 또 아파? 많이 아파?”

그가 호들갑을 떨며 물었다.

애리얼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뇨, 이제 괜찮아요. 그냥 많이 먹어서 속이 좀 답답했는데, 그것도 소화제를 먹으니 나아졌어요.”

“어…… 그러면 다행이고.”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방긋 웃는 얼굴로 그에게 감사를 전했다. 그러자 그는 또 움찔 소스라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 그러니까 아프지 말라고! 왜 이렇게 약골이야!”

“선천적으로 체력이 약한 편이에요. 걱정시켜 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니, 사과하라는 소리가 아니고……. 아! 몰라! 다음부턴 아프지 마!”

우레우스는 식을 줄 모르고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서 크게 외쳤다. 그러고는 몸을 휙 돌렸다.

그는 곧장 나갈 것처럼 등을 보였다. 하지만 나가지 않았다. 꼼짝없이 제자리에 서서, 동그랗게 주먹을 말아 쥐고 망설이는 듯 주춤주춤. 그러다가 다시 애리얼을 마주하고 섰다.

“야, 너…… 나하고 같이 놀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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