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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88)화 (176/264)

우레우스는 어렵게 다짐한 듯한 말을 꺼냈다.

같이 놀자니. 아이다우면서도 마음 한구석을 따스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애리얼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다가 입을 가렸다.

“왜 웃어!”

우레우스가 부끄러움에 주먹 쥔 손을 부르르 떨며 소리쳤다.

애리얼은 다급히 손사래를 치면서도 계속 웃었다.

“기뻐서 그래요.”

그렇게 답했더니 우레우스는 또 몸을 홱 돌리고 등을 보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떠나지는 않았다. 그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어렵사리 물었다.

“……그, 그럼 이제 나하고 놀 거지?”

“네. 같이 놀아요.”

어차피 할 일도 없고, 애리얼은 흔쾌히 승낙했다.

우레우스가 곧장 애리얼을 향해 몸을 돌렸다. 잔뜩 들뜬 얼굴, 파란 눈동자가 반짝반짝했다.

애리얼과 놀 생각에 들뜬 그는 시종들을 불러서 뭔가를 방에 들여왔다.

지도 같은 게 새겨진 커다란 나무 테이블이었다. 주사위와 말이 담긴 유리 상자도 있었다. 아마도 보드게임 같은 거겠지.

애리얼은 빠르게 룰을 익히고 주사위를 굴렸다. 중간중간 나오는 미션을 해결하고 골까지 가장 먼저 가는 쪽이 이기는 거였다.

대체로 승자는 애리얼이었다.

우레우스는 직접 이 게임을 가져온 주제에 계속 졌다. 이 게임에 익숙하지 않은 듯했다.

그럼에도 그는 괜히 익숙한 척, 이 게임을 좋아하는 척했다.

애리얼과 더 놀고 싶어서 그런 거였다.

본디 우레우스는 절대 실내에서 오래 머무르는 성격이 아니었다. 천방지축이랄 것까지는 없지만, 얌전하지도 않았다. 안에서 노는 것보다는 바깥에서 무예를 익히는 걸 더 선호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애리얼과 놀기 위해서 자신이 선호하는 걸 미뤄 뒀다. 애리얼은 몸이 약해서, 제가 하는 식대로 놀면 그녀가 쓰러질지도 몰랐다. 그걸 알고서 일부러 할 줄도 모르는 게임을 가져와서 놀았다. 심지어 계속 졌다. 그런데도 그는 화가 나지 않았다. 지는 걸 몹시 싫어해서 대공저의 수석 기사에게도 이길 때까지 덤비는 게 그였는데.

우레우스는 화를 내기는커녕 싫은 소리 한번 안 했다. 이기면 살짝 미소를 띠는 애리얼을 보는 데 홀려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길 두 시간.

바깥으로 노을이 지고, 어느덧 저녁 식사를 할 시간이 다가왔다.

우레우스는 입술을 감쳐물고 시작점에 말을 놓았다. 곧 저녁 식사를 해야 하니 이게 마지막 판이었다. 이번 판이 끝나면 언제 다시 애리얼과 놀 수 있을지 몰랐다. 악마 같은 형 때문에 아예 만나기조차 어려울 것이다.

그는 주사위를 쥔 채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이번 판에 내가 이기면 소원 하나만 들어줘!”

무슨 소리를 저렇게 어렵사리 하나 했는데. 귀여운 부탁에 애리얼은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제 마지막 판이니 이기고 싶어서 동기 부여를 하는 걸까. 어찌 됐든 귀여운 데다 마지막이니 못 들어줄 것도 없었다.

“네, 좋아요.”

애리얼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이렇게 쉽게 허락할 줄 몰랐다는 듯.

“정말이지? 무르기 없기다?”

“네, 무르기 없기예요.”

“좋아. 이번엔 이긴다.”

우레우스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어딘지 얼빠져 있던 아까까지와 다른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는 이전과 다르게 애리얼을 쭉쭉 앞서 나가다가 결국 먼저 말을 탈출시켰다. 지금까지 그에게 배려를 받았던 건가 싶을 만큼 큰 격차였다.

“내, 내가 이겼어…….”

우레우스가 소심하게 제 승리를 선언했다.

애리얼은 놀란 눈으로 그를 보다가 이내 방긋 웃었다.

“제가 져 버렸네요.”

“…….”

“이제 제가 소원을 들어줄 차례네요.”

“그…… 그렇지…….”

“소원이 뭐예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들어드릴게요.”

애리얼이 상냥한 얼굴을 하고서 살갑게 물었다.

우레우스는 무척 수줍어하다가 더듬거리며 말을 꺼냈다.

“네, 네 뺨에다 이, 입을 맞추게 해 줘.”

어렵게 소원을 말한 그가 주먹을 꼭 말아 쥐고 고개를 숙였다.

입을 맞춰 달라는 것도 아니고 입을 맞추게 해 달라니.

“그게 소원이신가요?”

애리얼은 재차 확인했다.

우레우스가 귀를 잔뜩 붉히고서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영락없는 아이의 모습이었다.

애리얼은 조용히 웃으며 우레우스를 향해 뺨을 내밀었다. 그러자 우레우스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고개를 기울였다. 쪽. 그녀의 볼에 우레우스의 입술이 빠르게 붙었다 떨어졌다.

그때였다.

우우우웅-

쾅!

진동음,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커다란 소음.

성난 기세로 문이 열렸다.

무표정하지만 확실하게 심기가 틀어진 듯한 렉시우스가 방으로 난입했다.

애리얼이 놀라서 그를 주시하는 동안 그는 우레우스에게로 직진했다.

“뭐야, 너 언제……!”

우레우스가 당황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렉시우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우레우스의 뒷덜미를 한 손으로 붙잡아 들었다.

형에게 대롱대롱 들려 버린 우레우스는 애리얼을 흘금거리다 얼굴을 붉혔다.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서 창피한지 악을 썼다. 렉시우스의 팔을 잡고서 땅을 디디려 애썼다.

“이게 무슨 짓거리야!”

“너야말로 무슨 짓거리야.”

땅을 뚫고 갈 듯 가라앉은 저음이었다. 갈라진 목소리 끝이 더없이 위협적이었다.

앞뒤 안 가리고 날뛰는 우레우스의 성정마저도 잠시 죽여 놓을 만큼.

“다시는 애리얼에게 손대지 마.”

렉시우스가 나지막하게 경고했다. 제 동생에게 하는 것치곤 지나치게 살벌한 어조였다.

우레우스는 흠칫 놀랐다가 이내 버럭 화를 냈다.

“너도 했잖아!”

우레우스의 반박에 이번에는 렉시우스가 멈칫거렸다.

“너도 애리얼한테 입 맞췄잖아!”

“…….”

“그런데 왜 난 못 해!”

“입 닫아.”

렉시우스는 눈에 띄게 동요를 드러내며 우레우스를 문밖으로 던져 버렸다. 그러고는 문을 잠가 버렸다. 평소와 다르게 결계는 치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레우스는 전처럼 문을 두드리거나 악을 쓰지 않았다. 씩씩거리며 문을 노려보다가 화난 걸음걸이로 쿵쿵 발소리를 내며 자리를 떠났다. 어차피 제 형을 이기지 못함을 알아서일까.

우레우스가 떠나자 방은 급격히 조용해졌다.

렉시우스는 문고리만 만지작거리며 서 있다가 입을 열었다.

“애새끼가 어리광 부린다고 다 받아 주지 마.”

“공자님께선 크게 어리광 부린 적도 없으셨어.”

애리얼이 우레우스를 감싸자 렉시우스가 눈썹을 구기며 휙 돌아보았다. 부정을 저지른 연인을 추궁하기라도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예 애리얼의 앞으로 바짝 다가서며 물었다.

“그럼 아까 그건 뭔데?”

“게임을 해서 내가 지면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거든.”

“그렇다고 입술을 대는 걸 허락해?”

“그런 식으로 표현하니까 좀…… 그런데……. 그냥 아이가 가볍게 친밀감을 표현하는 거잖아.”

“하, 친밀감이라고?”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짧게 비소를 터트렸다.

“열세 살이면 충분히 음흉한 생각을 할 나이야. 그 자식은 절대 순수한 마음으로 너한테 입을 가져다 댄 게 아니라고.”

“……선배는 그랬어?”

“…….”

“…….”

“안 그랬어.”

어색한 침묵 끝에 그가 부정했다. 확실하게 거짓말이다.

렉시우스는 붉어진 얼굴을 감추듯 고개를 떨구며 뒷덜미를 주물렀다. 그러다 이내 길게 한숨을 뱉더니 조용히 말을 꺼냈다.

“아무리 어린애라도 잘해 주지 마. 난 애한테도 질투하는 새끼니까.”

파급력이 큰 소리를 툭 던진 그가 쌩하니 몸을 돌렸다. 방을 나서는 걸음이 무척 빨랐다. 붉어진 귓바퀴가 적나라하게 보였다. 렉시우스는 그 잠깐의 시선도 못 견뎠다. 문을 닫고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애리얼은 어안이 벙벙해진 채 그가 떠난 문을 보았다.

‘지금 선배가…….’

애한테도 질투한다고. 그러니까 잘해 주지 말라고.

그는 조금도 말을 돌리지 않고 직설적으로 제 감정을 내뱉었다.

그 지나친 솔직함에 애리얼은 뒤늦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눈을 크게 뜨고서 붉어진 뺨을 연신 문질렀다. 이만큼이나 노골적인 감정을 마주하자 몹시 부끄러워졌다. 렉시우스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

대공저의 본관, 만찬장에는 화려한 태피스트리가 걸리고 각양각색의 계절 꽃들이 장식되었다.

마치 연회라도 열린 듯했다.

애리얼은 어색함을 느끼며 의자에 앉아 있었다. 만찬장은 넓은 데 비해 테이블은 그리 크지 않았다. 직사각형으로 된 테이블의 맞은편에는 대공비와 우레우스가 앉아 있었다. 애리얼은 대공비와 마주 보는 자리였다. 애리얼의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누구의 자리인지는 말 안 해도 알 수 있었다.

우우우웅-

오래 지나지 않아 접근 알림을 울리며 렉시우스가 만찬장으로 들어왔다. 새까만 정장을 차려입고 붉은 머리칼을 깔끔히 넘긴 모습이었다. 흔치 않게 멀끔히 꾸민 그는 자연스럽게 애리얼의 옆자리에 착석했다.

“죄송합니다. 일이 좀 있어서 늦었습니다.”

“됐습니다, 대공자.”

대공비가 렉시우스의 사과를 대충 넘기며 손을 까딱였다. 하녀장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재닛, 얼른 준비해 주게.”

명이 떨어졌다. 하녀장이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만찬의 첫 요리가 빠르게 차려졌다.

애리얼은 포크로 전채 요리를 건드리다가 곁눈질로 렉시우스를 살폈다. 그의 왼쪽 귀에는 정장과 어울리지 않는 십자 이어링이 걸려 있었다. 은빛의 몸체가 조명 빛을 반사하며 반짝거렸다.

시선을 느낀 그가 고개를 슬쩍 돌렸다. 애리얼과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었다.

“부끄러우니까 너무 보지 마.”

그가 능청스럽게 농을 던졌다.

애리얼은 놀라서 입을 벌렸다.

가늘게 접히며 웃는 그의 금색 눈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그녀를 놀리는 거였다.

급격히 부끄러워진 애리얼은 한 타이밍 늦게 고개를 휙 돌렸다. 테이블에 놓인 접시만 바라보다가 테이블 아래로 숨긴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녀의 위로 렉시우스의 흐뭇해하는 시선이 떨어졌다.

우레우스는 불쾌함이 가득한 얼굴로 형을 째려보았다. 그는 접시에 담겨 나오는 요리를 갈가리 찢어 먹으며 불만을 드러냈다.

그와 반대로 렉시우스는 완벽하게 예절을 갖추고 식사를 이어 갔다. 이따금 크기가 큰 요리가 나오면 잠시 식사를 멈추었다. 애리얼의 그릇에 담긴 음식을 먹기 좋게 잘라 주기 위해서였다.

어쩐지 그의 자리에 여분의 나이프가 있다 했더니, 이러려고 준비한 거였나.

애리얼은 두어 번에 걸쳐 괜찮다며 만류했다. 하지만 렉시우스는 듣지 않았다.

“당신의 식사를 편히 돕는 것은 제 영광입니다. 그러니 공녀님, 부디 제가 나이프를 들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는 어울리지 않게 존댓말까지 써 가며 애리얼을 대했다. 대공비는 그를 말리긴커녕 잘한다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거기서 어떻게 애리얼이 거절을 말할 수가 있겠는가. 애리얼은 렉시우스가 잘라 주는 요리를 가만히 받아먹었다.

오로지 우레우스만 렉시우스의 행동에 못마땅해하는 얼굴을 했다.

그러나 그도 대놓고 렉시우스에게 불만을 말하지는 않았다. 대공비에게 크게 한 소리 들은 모양이었다.

그 사이서 애리얼만 열심히 눈치를 봤다. 어색하고 부담스러운 식사가 이어졌다. 불편해서 체할 것만 같았다.

그와 반대로 대공비는 아주 만족스러워하는 얼굴을 하고서 와인 잔을 들었다.

“조만간 허클리 백작도 초대하고 싶구나. 이렇게 나와 대공자, 애리얼과 백작이 한데 모여 만찬을 가지면 분위기가 좋을 거야. 그렇지 않습니까, 대공자?”

“여부가 있겠습니까.”

렉시우스가 빙그레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상견례라도 하자는 소린가.

애리얼은 사색으로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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