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었다. 곧장 약혼 내지는 결혼까지도 갈 사안이었다. 백작이 어떻게 나올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리 딸의 의견을 존중한다지만 대공가가 건넨 혼담을 쳐 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설마 대공저에 오라던 이유가…….’
쾅!
갑자기 울린 둔탁한 소음이 애리얼의 사념을 끊어 냈다. 애리얼은 고개를 들어 소리의 진원지를 바라보았다.
우레우스가 나이프를 쥔 손으로 테이블을 내려쳤다. 불만이 가득한 눈으로 제 형을 쏘아보며 말이다.
“우레우스, 이게 뭐 하는 짓이니!”
대공비가 경악한 얼굴로 우레우스를 나무랐다.
하지만 우레우스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 요리가 담긴 접시에 나이프를 툭 놓았다. 도자기 그릇과 부딪친 은나이프가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식사 거지 같았어요. 잘 못 먹었습니다.”
그는 대놓고 비꼬더니 냅킨을 탁 던지고는 만찬장을 나가 버렸다. 무척 무례한 행동이었다. 안색이 창백해진 대공비가 애리얼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사과를 건넸다.
“미안하구나. 우레우스가 아직 어려서…….”
“아뇨, 괜찮습니다.”
애리얼은 연신 미소를 지으며 대공비의 걱정을 덜어 주고자 노력했다.
그럼에도 대공비는 쓴웃음만 짓다가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눈은 우레우스가 나간 만찬장의 문을 향해 있었다.
“미안하지만, 먼저 자리를 비워야겠구나.”
그 말만 흘리듯 남긴 대공비는 재빠른 걸음으로 만찬장을 나섰다. 잠깐 보였던 옆모습은 무척 화가 나 있었다. 우레우스를 향한 분노였다.
이제 만찬장에는 애리얼과 렉시우스만 남게 되었다. 애리얼은 어색함을 느끼다가 슬그머니 렉시우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렉시우스는 평온한 표정이었다. 사실 그는 우레우스가 테이블을 내려칠 때도 그랬다. 이미 예견한 일이라는 듯 태평했다.
자주 있던 일인가.
하지만 그렇다기엔 대공비의 반응이 심상찮았다.
애리얼은 여러 의문들을 가장 가까운 렉시우스에게로 향했다. 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건지. 혹시 저 얼굴에 힌트라도 있을까 애리얼이 그를 찬찬히 뜯어보던 중이었다. 갑자기 렉시우스가 고개를 휙 돌렸다. 정면을 향해 있던 금빛의 눈동자 한 쌍이 애리얼을 담았다.
“뭘 그렇게 봐.”
“아, 그게…….”
“우레우스 때문에 그래?”
“아니…… 아니야.”
애리얼은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돌렸다. 우레우스에 관해 묻는 건 대공가의 가족사에 관여하는 것으로 비칠지도 몰랐다. 그러니 이만 말을 줄이는 게 현명했다.
그러나 렉시우스는 제 가정사를 말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애리얼이 묻지 않고 삼킨 걸 정확히 파악하고서 설명했다.
“원래 저래. 그런데 저놈이 이제 가주가 돼야 하니까, 어머니께서도 두고 볼 수가 없으신 거지.”
“……가주라고?”
애리얼은 그의 말을 흘려들으려다 참지 못하고 물었다. 가주라니, 크레시앙 대공가의 가주라는 건 미래의 대공이라는 뜻인데……. 그건 렉시우스의 자리가 아닌가? 그런데 왜 렉시우스는 우레우스가 가주가 될 거라고 하는 건지.
의문투성이였다. 굳이 대공가의 일을 파고들어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의 속내를 파악한 듯 렉시우스는 쉽게도 말을 꺼냈다.
“우레우스가 차기 가주가 될 거거든.”
“선배가 있는데도?”
“왜, 너는 내가 가주였으면 좋겠어?”
“아니, 그게 아니라…… 원래 선배가 차기 가주였잖아. 왜 갑자기 바뀐 건지 궁금해서.”
“그럴 일이 좀 있어.”
그는 거기까지 말해 주고는 확답을 피했다. 여전히 의아함을 떨치지 못하는 애리얼을 보면서 유리잔을 들더니 생긋 웃음을 지었다.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그는 유리잔을 입에다 대고 물을 넘긴 뒤 우아하게 식사를 마쳤다.
술도 아니고 물을 저리 마시는 게 참 감탄만 났다. 마치 데본시아 같았다. 하필이면…….
애리얼은 괜스레 꺼림칙해졌다.
***
식사를 마친 후 렉시우스는 애리얼을 데리고 정원으로 향했다.
노을도 다 지고 주변은 어두웠다. 그래도 정원등이 드문드문 있어서 정원 길은 꽤 낭만적이었다.
애리얼은 잘 관리한 낮은 조경수를 둘러보며 걸었다. 렉시우스는 한 발 뒤에서 천천히 애리얼을 따라갔다.
그렇게 십여 분쯤 걸었을까.
뒤따라오던 렉시우스가 벤치에 털썩 걸터앉아 애리얼을 불렀다.
“잠깐 앉았다 가.”
애리얼은 천천히 길을 되돌아와 그와 조금 거리를 두고 벤치에 앉았다. 렉시우스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로 다리를 꼬고서 겉옷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는 주머니에서 찾은 것을 쥐고서 말했다.
“손 줘 봐.”
애리얼은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자, 선물.”
그가 그녀의 손에 뭔가를 촤르륵 쏟아 줬다.
애리얼은 손바닥에 닿는 아기자기한 감촉을 느끼고 시선을 내렸다. 알록달록한 포장지에 싼 작은 과자들이 손안에 한가득했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과자를 바라보았다.
“선배, 이거…… 뭐야?”
“먹는 거.”
그걸 몰라서 물은 게 아니었는데.
애리얼은 난처한 얼굴을 하다가 말을 고쳤다.
“아니, 그…… 어디서 가져온 거야?”
“주방에서.”
“주방?”
“조만간 연회에 나갈 품목인데, 넌 그런 데 안 좋아하니까.”
그러니까, 애리얼이 이걸 못 먹을까 봐 미리 가져왔다는 소리다.
그런 이유로 이 작은 걸 한 움큼 집어 왔을 그를 생각하니 왠지 웃음이 났다. 애리얼은 조용히 소리 죽여 웃다가 감사를 전했다.
“……고마워, 선배.”
“그래. 다 먹으면 일어나자.”
그는 준 걸 곧장 다 먹으라는 듯 말했다.
애리얼이 의아해하며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걸 지금 다 먹으라고?”
“당연하지. 오래 못 가지고 있어, 그거.”
“금방 상하는 거야?”
“어.”
“연회에 내놓을 거라며?”
“원래는 따로 마도구 안에 보관해 놓는 거야. 거기서 꺼내면 하루도 못 가. 포장지를 까면 일 분도 못 가고.”
“……거짓말.”
애리얼은 믿지 않았다.
그에 렉시우스는 애리얼의 손에 올려진 과자를 하나 집어 포장을 깠다. 연분홍빛이 도는 구슬 모양의 과자가 나왔다. 그는 애리얼의 손바닥에다 그 구슬 과자를 올려 주었다.
손바닥에 올라온 과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체온에 녹기 시작했다. 마치 눈송이 같았다. 촉감도 눈과 비슷했다.
호기심이 인 애리얼은 과자 하나를 까서 입에 넣었다. 사르르 녹는가 싶더니 톡톡 터지는 식감이 뒤따랐다. 파핑 캔디. 약간 그런 느낌이었다. 확실히 밖에 오래 내놓을 수 있는 종류는 아닌 거 같다.
신기한 식감에 애리얼은 하나를 더 까서 입 속에 쏙 집어넣었다.
“마음에 들어?”
그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애리얼은 과자를 입에 물고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렉시우스는 친히 포장을 까서 그녀의 입 속에 과자를 넣어 주며 물었다.
“어때? 대공저에 자주 오고 싶지 않아?”
애리얼은 그가 주는 걸 넙죽 받아먹다가 멈칫거리며 굳었다. 이렇게 먹을 거로 꾀어내려는 건가. 슬그머니 경계심이 어린 눈으로 그를 살폈다.
렉시우스는 그녀의 시선에도 별 동요 없이 과자의 포장지를 깠다.
“아예 살면 어때?”
“…….”
“너무 좋아서 말이 안 나오나 봐.”
“농담하는 거지?”
“농담이 아니면 싫을 거잖아.”
그는 깐 과자를 이번엔 제 입 안에 넣으며 픽 웃었다.
농담이라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애리얼은 조용히 과자나 마저 까서 먹었다.
렉시우스는 애리얼을 가만히 보다가 정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졸린 듯 풀린 눈으로 허공을 보다가 조용히 입을 연다.
“그냥 묻는 거야. 약혼도 결혼도 아니고, 그냥 대공저에 오는 건 좋은지.”
정원등이 반짝거리는 조용한 정원에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깔렸다.
애리얼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좋아. 대공비 전하도 좋은 분이시고, 여름에 시원해서 좋고.”
“겨울에도 결계 치면 따뜻해.”
그는 자꾸만 대공저에서 살라는 듯 굴었다.
아직 의심을 거두지 않았던 애리얼은 이상한 낌새를 살짝 느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여기 초대한 걸까. 자꾸만 여기가 좋냐고 묻는 그의 물음이 꺼림칙했다. 식사 때 우레우스가 가주가 될 것이라 말한 것도 그렇고, 조만간 연회가 있다고 언급한 것도 그렇고.
“선배.”
“응.”
“나, 대공저에는 언제까지 있어도 괜찮아?”
애리얼 딴에는 에둘러 물은 거였다. 하지만 렉시우스는 그 의도를 곧장 파악했다. 얘가 집에 가고 싶구나. 빠르게 눈치챈다.
그는 낮은 웃음을 흘리더니 벤치에 늘어지게 기대어 눈을 감았다.
“결혼이나 약혼을 해 달라고는 절대 안 할 테니까, 요번 휴학기 동안은 있어 봐. 불편한 거 없게 해 줄게.”
“……정말 결혼이나 약혼 요구 안 할 거야?”
“해 달라면 해 주고.”
“…….”
“농담이야. 너 있는 동안은 그런 거 안 해.”
애리얼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슬쩍슬쩍 곁눈질로 그를 살폈다.
눈을 감고서도 그녀의 시선을 느낀 렉시우스가 느릿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뭣하면 각서라도 쓸까?”
“……아냐, 믿을게.”
애리얼은 담담히 말했다. 그의 말이 거짓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아직 의심을 완전히 거둔 건 아니다. 다만 도망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당장 레이신의 생일이 문제긴 했으나, 백작저에 연락만 하면 그것도 어찌어찌 해결은 할 수 있다.
“더 금지할 건?”
렉시우스가 물어 왔다. 뭐든 수용할 것 같은 말투였다.
애리얼은 고개를 저었다. 제일 위험한 걸 금지했으니, 당장은 괜찮았다. 다른 건 생각나지도 않았고.
“없어.”
“그럼 뭐 좀 물어보자.”
그가 젖혔던 상체를 바로 세우며 말했다. 그의 귀에 걸린 이어링이 흔들거리며 빛을 냈다.
애리얼은 무심코 이어링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뭔데?”
“너, 스카이라랑 무슨 일 있었지.”
스카이라. 그 이름을 듣자마자 애리얼을 잠시 말을 잊었다. 머리가 하얗게 소각된 듯했다.
곧 복잡한 사념이 물밀듯이 머리를 잠식해 갔다. 휘아킨까지 얽힌 일련의 사건과 거래가 주르르 떠올랐다.
재빨리 대답할 수 없었다.
길지 않은 침묵이었음에도 렉시우스는 금세 뒤 사정을 알아챈 듯 눈을 매섭게 떴다.
“일 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