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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90)화 (178/264)

조용히 울리는 그의 저음이 무척 음산하게 느껴졌다.

애리얼은 마른침을 삼키며 대답을 골랐다. 휘아킨의 일은 절대 말할 수 없고, 당연히 그와 연결된 스카이라와의 거래 내용도 말하기 어렵다. 전부 개인적인 사안들이라 언급하는 자체로 위험했다. 적당히 그럴듯한 거짓말로 둘러대는 게 최선인 상황이다.

문제는 렉시우스가 거짓말을 귀신같이 알아채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애리얼은 가늘어진 그의 눈을 바라보며 어렵사리 입을 뗐다.

“있긴 있었어. 그런데 말은 못 해 줘.”

“내가 들으면 안 될 내용인가 보지?”

렉시우스의 낮은 목소리가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그, 개인적인 사안도 섞여 있어서 그래.”

애리얼은 말을 살짝 더듬고 말았다.

그제야 그가 날카롭던 눈빛을 거두었다.

“미안. 겁주려던 건 아니고, 내 나름대로 일이 있어서 그랬어.”

“……무슨 일인데, 선배? 물어봐도 괜찮아?”

“별일 아니야.”

렉시우스는 그새 사납던 표정을 다 지우고 빙긋 웃었다. 그렇게 다그치듯 물을 땐 언제고 이제는 말을 돌리려고 한다.

애리얼도 켕기는 게 많은 처지라 이 이상 질문하진 않았다.

둘은 조용히 과자만 나눠서 까먹고는 벤치에서 일어났다.

렉시우스는 다 먹은 포장지를 모아 쥐고 애리얼을 먼저 들여보냈다. 미안한지 자꾸만 뒤를 돌아다보는 애리얼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그는 싸하게 낯빛을 가라앉혔다.

렉시우스는 홀로 정원을 지나 기사 훈련장으로 들어갔다. 훈련장의 쓰레기를 모아 놓은 포대 자루에 대충 포장지를 털어 넣고는 호출 벨을 눌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메튼이 훈련장으로 왔다.

“저하, 몸은 괜찮으십니까.”

그 물음에 렉시우스는 검은색 셔츠의 단추를 풀고 옷깃을 벌렸다. 쇄골부터 어깨까지 칭칭 감긴 붕대가 드러났다. 핏물이 배어 있었다.

“괜찮아 보이냐?”

“아뇨…….”

메튼은 고개를 푹 숙였다. 치료술사나 의사에게 보이는 게 어떻겠냐는 말도 할 수 없었다. 크레시앙 가문은 선천적으로 회복이 빨랐다. 그런데 아직도 아물지 않은 걸 보면 보통 상처가 아니었다.

대공자가 맞은 공격술에는 저주 수준의 회복 저하 효과까지 걸려 있었으리라. 아니고서야 이렇게 낫지 않을 리가 있나. 공격술의 시전자가 황자이니 충분히 가능했다.

이쯤 되면 웬만한 치료술사나 의사는 치료에 엄두도 내지 못한다. 황성의 정도 되는 게 아닌 이상 치료 가능한 이는 없다고 봐야 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메튼은 온몸이 오싹해졌다.

저렇게 두 동강을 낼 기세로 상대를 베고서는 회복 저하의 술식까지 걸었다. 웬만큼 미워해서는 할 수 없는 짓이었다. 사실상 죽이려 한 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왜?

메튼은 또다시 의문에 가로막혔다.

황자가 갑자기 왜 대공자를 적대하는지, 그것도 죽일 정도로 공격했는지 도통 모를 노릇이었다. 아무리 대공자가 황태자 쪽 사람이라 한들 이렇게 칼을 들이댈 정도인가.

이런 식으로 굴면 황자의 입지도 흔들릴 텐데.

메튼이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렉시우스가 셔츠를 잠그고서 불렀다.

“카스트로,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상황 보고나 해.”

“아. 예, 저하.”

메튼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서 서류철을 건넸다.

“빠르게 준비하면 사흘 후부터도 가능합니다.”

“빨라서 좋을 거 없어. 걔한테도 정 붙일 시간은 줘야지.”

렉시우스는 서류철을 열고서 내용을 훑으며 대화를 이어 갔다.

“적당히 준비는 된 거 같네. 넌 대공저보다는 황성에 신경 쓰고, 특히 황자 뒤 좀 캐 놔.”

“어느 쪽 인맥을 캐면 되겠습니까?”

“장난해? 다 캐야지, 뭘 어느 쪽이야. 이런 일 한두 번 해?”

“죄송합니다, 저하. 다만 최근 황자 저하의 세력이 꽤 커진 터라 소모되는 시간이 클 듯합니다.”

“우선순위를 정해 달라는 거야?”

“부탁드립니다.”

“그럼 아카데미 쪽부터 해.”

렉시우스는 검토를 끝낸 서류철을 옆구리에 끼고서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그러고는 귀찮음이 가득한 걸음으로 대공저 본관으로 향했다.

“너도 그만 퇴근해.”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해가 떨어진 후에나 내려진 퇴근 명령이었지만 메튼은 기뻐했다. 대공자를 향해 넙죽 허리를 숙였다.

본관으로 돌아온 렉시우스는 집무실로 가려다가 제 침실로 걸음을 틀었다. 2층 코너에 있는 방이었다. 열넷부터 전장에 다녀서인지 크게 쓴 흔적이 없는 장소였다.

그는 들어가자마자 근처 테이블에 대충 서류철을 던져 놓았다. 그런 뒤 자꾸만 상처를 스치는 윗옷을 벗었다. 그새 피에 절어 버린 붕대가 찝찝했다. 찢듯이 풀어내 세안용 그릇에 던져 넣었다.

그러자 벌어진 상처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렉시우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상처를 살피다가 욕실로 향했다. 상체를 탈의한 그는 욕실 거울 앞에서 다시 상처를 확인했다.

허리 위, 옆구리 안쪽부터 쇄골을 지나 반대쪽 어깨까지. 상체를 반으로 가를 듯 깊게 팬 상처에서는 여전히 출혈이 심했다. 심지어는 치유 저하 술식 때문에 잘 아물지도 않았다. 치료술을 써 보려 했으나 고갈된 마력이 여태 돌아오지 않아 실패했다.

의사는 어차피 도움이 안 되고, 다른 마법사를 부르기도 귀찮고.

그는 급한 대로 마른 수건을 꺼내 상처를 누르고서 압박 지혈을 했다.

‘그러고 보니 애리얼의 방이 어디랬지? 내 위층…… 3층이었나?’

그런 생각이나 하면서 있었더니 어느덧 자정이 되었다. 마력이 충만하게 차오르는 시간대가 되자 그는 수건을 떼고서 치료술을 썼다.

그러나 이번에도 상처는 제대로 아물지 못했다. 상처에 남은 술식은 지독하게도 강력하고 길었다. 그에 비해 치료술에 쓸 마력은 부족했다. 대체 마력 고갈이 얼마나 심했던 건지, 자정이 넘었는데도 총량의 반도 회복을 못 했다.

그는 끝내 치료를 이어 가지 못했다. 마법으로 붕대만 새로 감았다.

지혈하느라 몸에 남은 핏자국이 지저분했다. 하지만 상처 탓에 씻기도 어려웠다. 그는 적당히 찬물 세수만 한 뒤, 나머지는 또 마법으로 처리했다.

적어도 일주일은 이렇게 지내야 할 듯했다.

갑자기 짜증이 확 올라와서 렉시우스는 이를 악물었다.

스카이라, 그 자식이 갑자기 칼을 들이밀고 공격술을 써 갈기지만 않았어도 이 지경까지는 안 됐을 텐데. 하필이면 연속된 장거리 순간 이동으로 마력이 고갈된 상태일 때라 일이 더 심각해졌다.

‘걘 왜 갑자기 그 지경까지 눈이 돈 거지?’

아무리 눈치가 빠른 그라지만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었다.

애리얼 때문이긴 할 텐데, 정확히 무슨 이유인지.

그는 가운을 입다가 피로함을 느끼고 눈가를 문질렀다. 아무리 체력이 좋다지만, 오늘은 일이 심하게 많았다. 심지어 큰 부상까지 얻었으니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욕실을 나온 그는 쓰러지듯 침대로 무너졌다.

***

애리얼은 꽤 이른 시간에 일어나서 세안을 마친 뒤 옷을 입었다. 연하늘색의 여름 원피스. 백작저에서 도착한 물품 중 하나였다.

물품 상자가 도착한 건 밤이었으나 애리얼은 아침이 되어서야 상자를 열었다.

옷, 액세서리, 구두, 가방 그리고 책 몇 권.

애리얼은 물품을 대충 뒤적거리며 정리하다가 하얀 머리띠를 손에 들었다. 가끔은 이런 걸 써 보는 것도 좋겠지. 거울을 보며 머리띠를 착용했다. 하늘색 원피스와 잘 어울렸다. 여름 느낌이 물씬 나는 차림이었다. 역시 원판이 훌륭하니 꾸미는 것도 꽤 즐거웠다.

거울을 보며 희미하게 웃다가, 똑똑, 노크 소리에 움찔거리며 놀랐다.

누가 본 것도 아닌데 괜스레 창피해졌다.

애리얼은 어색함에 쭈뼛거리며 문으로 다가갔다.

“누구세요?”

“안녕하십니까, 공녀님. 오늘부터 공녀님을 전속 담당 하게 된 시녀, 일레나입니다.”

시녀라는 말에 애리얼은 놀라서 벌컥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주황빛이 나는 갈색 머리칼을 곱게 묶은 여성이 있었다. 하얀 옷을 입고 있다. 하녀가 아니고 시녀였다.

“내 전속 시녀…… 라고?”

“네. 대공비 전하께서 특별 배정 해 주셨습니다.”

“대공비 전하께서…….”

“앞으로 필요한 것은 제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허클리 공녀님.”

시녀, 일레나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애리얼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이 벌어졌다. 하녀가 아니라 시녀를 내줬다. 그것도 대공비가.

하녀와 달리 시녀는 기본적으로 귀족이 맡는 자리였다. 게다가 대공비의 시녀는 황족을 모시는 시녀와 비슷하게 특별히 훈련되어 엄선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인력을 내어주다니.

특별 대우도 이런 대우가 없다.

멍하니 서 있는데, 시녀가 맑게 웃으며 말을 전했다.

“공녀님, 대공비 전하께서 함께 아침 식사를 들지 않겠냐고 하셨습니다.”

“그, 그래. 길을 안내해 줄래?”

“네, 저를 따라오세요.”

시녀는 복도를 지나 중앙 계단을 내려갔다. 2층의 야외 발코니에 도달하여 걸음을 멈췄다.

하얀 난간 너머 정원을 향해 환히 트인 풍경이 보였다.

연보라색 드레스를 입은 대공비가 발코니에 앉아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일레나가 애리얼의 옆으로 물러나 고개를 숙였다.

“대공비 전하, 공녀님을 모셔 왔습니다.”

“수고 많았다.”

대공비는 익숙하게 일레나를 대했다. 그러고는 밝게 웃으며 애리얼을 맞았다.

“어서 오렴, 애리얼.”

“좋은 아침입니다, 대공비 전하.”

애리얼도 마주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하얀 파라솔을 펼쳐 놓은 아래, 널찍한 테이블에 아침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버터와 오믈렛의 향기가 허기를 자극했다.

애리얼은 테이블에 앉아 대공비와 간밤의 안부를 간단히 주고받았다.

대공저의 아침은 활기찼다. 정원사들이 정원을 돌아다니고, 하녀들은 꽃이나 과일이 담긴 바구니를 나르고 다녔다. 멀리 훈련장에선 기사들이 꼭두새벽부터 검술과 대련에 매진한다고 했다.

대공비는 이런 일상을 보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남편과 아들이 너무 자주 전장에 나가 있으니 사람 사는 냄새가 그립다며 말이다.

씁쓸한 이유였다.

애리얼은 오믈렛을 먹으며 대공비의 이야기를 들었다. 발랄하게 대화를 끌어 나가는 그녀가 학교 동기처럼 허물없이 느껴졌다. 정겹고 그리운 감각이었다. 식사가 끝나고도 한동안 그녀의 이야기에만 집중했다. 시간은 어느새 정오를 향해 갔다.

그림자가 짧아진 시각.

“어머니, 여기 계셨습니까.”

조용한 발코니에 자다 일어난 듯 잠긴 극저음이 난입했다.

애리얼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가운 차림을 한 렉시우스. 그가 헝클어진 적발을 쓸어 넘기며 발코니로 걸어왔다. 정말로 방금 일어난 건지 뭔지. 한껏 풀어진 모습이었다.

애리얼로선 처음 보는, 선배의 잔뜩 흐트러진 외견이었다. 놀라서 입이 벌어졌다.

대공비가 경악하여 소리쳤다.

“대공자! 그게 무슨 꼴입니까! 도대체 늦잠을 얼마나 자고…….”

“모처럼의 휴일이 아닙니까, 어머니. 그리 노여워 마시지요.”

렉시우스는 능청스럽게 받아치며 자연스럽게 애리얼의 옆자리에 앉았다. 마법으로 위장한 덕에 그의 몸은 상처 없이 매끈한 상태였다. 벌어진 가운 사이로 푹 파인 쇄골이 다 보였다.

애리얼은 다급히 눈을 돌렸다.

‘이런 모습의 선배라니…….’

대공저에 있다는 사실이 절실히 느껴지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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