렉시우스는 그녀의 동요를 기민하게 알아채고도 앞섶을 여미지 않았다. 오히려 그걸 즐기듯 상체를 모로 기울이며 애리얼에게 인사를 건넸다.
“잘 잤어?”
애리얼은 먼 곳을 주시한 채 대답했다.
“……네. 잘 잤어요.”
“그랬어? 난 잘 못 잤는데.”
“…….”
“너라도 잘 자서 다행이네.”
놀리는 말이 분명한데 은근히 감정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자길 좀 신경 써 달라고 원망하는 듯하다. 괜히 마음이 쓰여서 애리얼은 그를 슬쩍 곁눈질했다. 가운이 벌어진 사이로 그의 맨가슴팍이 보였다. 돌아갔던 시선을 황급히 원위치했다.
그 다급한 눈동자를 눈치챈 렉시우스가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당황한 그녀의 모습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무심코 손을 뻗어 건드리고 싶을 만큼.
“대공자.”
그의 손이 애리얼의 어깨를 감싸기 직전이었다. 대공비가 낯을 굳히고 끼어들었다.
“앞섶이라도 여며요.”
“죄송합니다, 전하. 본의 아니게 추태를 보였군요.”
그는 그제야 기울였던 상체를 세우고 가운을 여몄다. 지금까지 완전히 의도된 행동이었으면서 몰랐던 척 능청을 떨면서 말이다.
“같잖기는.”
대공비가 작게 중얼거렸다.
저러고 자극하면 애리얼이 도망가 버리고 말지.
“행동거지를 신경 쓰세요, 대공자. 이래선 애리얼이…….”
“대공비 전하, 황성에서 소집 명령이 내려온 것으로 압니다.”
렉시우스가 그녀의 말을 끊어 냈다. 고의성이 짙은 행동이었다.
애리얼이 호기심을 드러내며 대공비를 살폈다. 대공비는 제 언사의 경솔함을 인지하기라도 한 듯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그녀는 뭘 말하려던 거였을까.
렉시우스가 막은 탓에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대공비는 렉시우스를 돕고 있었다. 렉시우스의 어머니이니 어쩌면 당연한 거겠지만.
애리얼은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대공비가 보인 친절과 호의를 의심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공비를 믿을 수도 없었다. 앞으로 렉시우스가 벌일 일에 그녀 역시 관여되어 있는 게 보였다.
대공저 전체가 거대한 덫처럼 느껴졌다.
애리얼은 미세하게 굳은 표정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그때 마침 대공비가 자리서 일어났다.
“미안하구나, 애리얼.”
갑작스러운 사과였다. 애리얼은 놀란 얼굴로 번쩍 고개를 들었다. 쓴웃음을 짓는 대공비가 보였다.
“난 일이 있어서 이만 가야 할 것 같아.”
“아…… 괜찮습니다. 함께 식사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대공비 전하.”
“그리 말해 주니 고맙구나. 다음에 또 함께해 주렴.”
대공비는 그 말을 남기고서 발코니를 나갔다. 상당히 급한 사안인 듯 보였다. 시녀 둘이 빠르게 대공비의 뒤를 따랐다.
렉시우스는 떠나는 대공비를 그저 보고만 있었다.
황성에서의 소집 명령이라기에 그도 떠날 줄 알았는데.
애리얼은 의아해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선배는 안 가세요?”
“둘뿐이야. 반말해도 돼.”
대공비가 자리를 뜨자 그는 곧장 존댓말부터 지적했다.
애리얼은 참 어지간하다는 생각을 하며 말투를 고쳤다.
“……알았어. 그래서, 선배는 왜 안 가? 황성의 소집 명령이라고 들었는데, 고위 계급은 다 가야 하는 거 아니야?”
“가주만 가는 거야. 대공께서 아직 전장에 계시니 대공비께서 대신 가시는 거고. 굳이 내가 동행할 일은 아니지.”
“그럼 대공비 전하께서는 언제 돌아오셔?”
그 질문을 하자 렉시우스가 두 눈을 가늘게 휘었다.
“왜? 불안해?”
“……아, 아니.”
“적어도 일주일은 걸리실 거야.”
“일주일이나?”
“가주에게 소집 명령을 내렸다면 보통 일은 아닐 거거든. 일주일은 잡아야지.”
“…….”
“하지만 걱정하지 마. 네가 신경 쓰일 일은 없을 거야. 대공저의 일이라면 내가 적당히 처리할 수 있고, 필요한 것도 내가 다 챙겨 줄 수 있고, 놀아 주는 것도 내가 해 줄 수 있고.”
렉시우스는 아주 친절하게도 말했다.
불행히도 애리얼은 그의 친절이 고맙지 않았다. 그가 제 구금을 주관했던 일만 떠올랐다. 그게 얼마나 철저하고 완벽했는지도 잘 떠올랐다. 그래서 그의 친절이 도리어 위험하게 느껴졌다.
이제 대공저는 그의 손아귀 속에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애리얼을 억지로 잡아 두는 것도 쉽게 가능할 터.
‘이번 주에 레이신의 생일이 있는데…….’
레이신에게 직접 생일 선물을 건네는 건 꿈도 못 꿀 것 같았다.
애리얼은 떠난 대공비가 그리워졌다. 기본적으로 렉시우스의 편일지언정 아슬아슬한 행동은 단칼에 쳐 내던 게 그녀였다. 그런 그녀의 부재가 어떤 파장을 자아낼지 불안했다.
적어도 결혼이나 약혼 같은 내용으로 그에게 협박받을 일은 없다. 하지만 그게 끝이다. 다른 부분에서는 그를 제재할 수 없었다. 심지어 이곳은 대공저, 그의 집이 아닌가.
애리얼은 심각한 표정으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레이신의 생일 선물과 관련하여 백작저에 전화를 넣어야 하는데, 과연 가능할까. 최소한 제 이름으로 준비해 놓은 선물만이라도 잘 전달해야 할 텐데.
심지어 레이신은 선물을 직접 받으러 온다고까지 했었다. 기껏 왔는데 가문의 이름으로 된 선물만 있으면 실망할 게 뻔했다. 괘씸죄로 내년 생일 선물을 챙겨 주지 않을지도 몰랐다.
‘한시라도 빨리 백작저에 언질을 줘야 해.’
애리얼은 어느새 세상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렉시우스는 약간의 불쾌함이 서린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표정이 왜 그 모양이야. 내가 챙겨 주는 게 그렇게 싫어?”
그의 볼멘소리를 듣고서야 애리얼은 제 표정을 갈무리했다.
“……아니, 백작저에서 할 일이 있는데 못 하고 와서.”
“무슨 일인데?”
“솔렘 공자 서하의 생일 선물 준비.”
“아, 그러고 보니 레이 생일이 요번 주였나?”
“응.”
“근데 그걸 네가 왜 챙겨.”
“…….”
“애초에 왜 기억하고 있는데?”
그가 따지듯 물었다. 기분 나쁜 티를 숨기지도 않았다. 잘못한 것도 없는 애리얼을 추궁하는 기색까지도 있었다.
이제는 익숙하게도 느껴지는 그의 질투였다.
“선배 생일도 기억해. 구 월 십 일.”
“외우고 있었어?”
“응.”
“나도 챙겨 주게?”
“당연하지.”
애리얼은 기다렸다는 듯이 곧장 답했다.
렉시우스는 실실 입꼬리를 올리다가 조용히 입을 가렸다. 제 생일을 챙겨 주려고 따로 외우고 있었다니. 가슴이 벅차오르고 피식피식 웃음이 샜다. 그녀의 입에서 제 생일 날짜가 나오는 것만 들어도 좋았다. 푼수가 따로 없지. 자조적인 생각을 하면서도 그는 줄곧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그 즐거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애리얼은 곧 다가올 레이신의 생일도 챙길 심산이었다. 어쩌면 고위 계급의 생일은 다 챙기려는지도 모른다.
렉시우스는 다시금 기분이 저조해졌다.
그녀가 고위 계급의 생일을 챙기는 게 명예욕이나 연줄 때문은 아닐 것이다. 애초에 그런 걸 원했다면 굳이 생일을 챙길 것이 아니라 제 요구부터 먼저 내세웠겠지. 돈이라든가 구체적인 지위라든가, 뭐가 됐든 요구했으리라. 하지만 그녀는 그런 건 흘리는 말로도 하지 않았다. 딱히 물욕도 권력욕도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면 뭔가. 그저 친하고 가까운 이들을 손수 챙기고자 하는 갸륵함인가.
애리얼은 무심해 보여도 본디 정이 많은 성격이니까 그럴 수 있다.
그럼에도 렉시우스는 어딘지 석연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직감이었다. 그녀가 다른 이들의 생일을 챙기게 놔두고 싶지 않았다. 질투보다는 기이한 불안감에서 기인한 생각이었다.
“내 생일, 안 챙겨도 돼.”
불안감을 막기 위해 내뱉은 말에 애리얼이 놀란 얼굴을 했다.
“왜, 선배…….”
“대신 다른 놈들 생일도 챙기지 마.”
숨이 턱 막힐 만큼 무거운 목소리였다. 당부가 아닌 명령으로 들렸다.
애리얼은 난처함에 제 손끝만 매만졌다. 그가 무슨 의도로 이런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단순한 질투심인 것 같다가도 의심스러워졌다. 제 생일마저 챙기지 말라니, 그럴 수 있을 리가. 다른 것도 아니고 특별 엔딩을 위해 생일을 챙기는 건데.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질투가 나서.”
렉시우스가 대답했다. 꽤 진지한 말투였음에도 적당히 둘러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애리얼은 더 묻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가 더 말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발코니는 침묵에 휩싸였다.
정원에서 들려오는 일상의 소음마저 아득했다.
렉시우스는 잠자코 애리얼의 곁을 지키는가 했더니 돌연히 소파에서 일어났다. 애리얼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약간 안색이 나빠 보이기도 했다. 표정도 조금 경직된 느낌이 있고.
“선배, 어디 아파?”
“아니.”
그는 곧바로 부정했다. 능숙하게 지은 미소에는 나른한 여유가 넘쳤다.
‘잘못 봤나?’
애리얼이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응시할 때였다.
“옷 좀 갈아입고 올게.”
렉시우스가 방만하게 내버려 두던 가운을 여미고서 허리끈을 단단히 묶었다. 묘하게 몸을 가리는 듯했다. 여태 일부러 보라는 듯 굴더니 갑자기 왜 저러는지……. 애리얼은 위화감을 느꼈다.
그는 저를 의심스럽게 올려다보는 애리얼에게 슬그머니 손을 뻗었다. 애리얼의 의심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그의 손을 신경 쓰느라 시선이 돌아갔다.
렉시우스는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아까부터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귓바퀴를 매만질 듯 다가온 손가락이 하얀 머리띠를 쓸었다.
“잘 어울려.”
그는 짧은 칭찬을 마치고서 손을 거뒀다.
애리얼은 눈을 내리깔며 쑥쓰러운 듯 말했다.
“응……. 고마워.”
그는 멋쩍어하는 애리얼을 보며 싱긋 웃었다.
“금방 올게.”
***
렉시우스는 침실로 돌아오자마자 가운을 벗어 던지고 욕실로 향했다. 세면대 앞에 서자마자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위장 마법이 풀렸다. 그 즉시 피 냄새가 진동했다. 어깨부터 옆구리까지, 핏물이 흥건하게 밴 붕대가 드러났다.
어째 상처가 나아지긴커녕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렉시우스는 붕대를 풀고 상처를 살폈다. 벌어진 상처는 아물 기미가 없었다. 방금 다친 것처럼 붉은 피를 뱉어 냈다.
그제야 렉시우스는 깨달았다.
스카이라가 칼에 담았던 건 단순한 치유 저하 술식이 아니었던 거다.
이 상처는 그 정도 술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이건 저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