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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92)화 (180/264)

“미쳤구나, 스카이라.”

그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저주는 고위 술식이었다. 치료술로 풀 수 없는 치명적인 상해를 입혔다. 저주를 풀 수 있는 건 오로지 해제술식뿐.

문제는 해제술식을 다룰 수 있는 마법사가 극소수라는 것.

‘지금 제국 내에 있는 가장 뛰어난 해제술사는…….’

짜증스럽게 상처를 지혈하던 렉시우스가 문득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 해제술식에 능통하기로 정평이 난 마법사가 한 명 있었다.

클라우스 백작. 공교롭게도 애리얼의 사촌인 인물이었다. 마저증을 앓고 있는 무하 공자의 담당 마법사. 애리얼에게 총기를 지원한 인간.

‘정보가 많을 것 같은데.’

렉시우스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지혈을 마쳤다. 벌겋게 물든 수건은 세면대에 던졌다. 붕대를 두르고 다시 위장술을 쓰니 상처는 감쪽같이 자취를 감췄다.

상당히 귀찮은 과정이었다.

이 짓을 계속 반복할 수는 없다.

그는 세면대를 삐딱하게 짚고 서서 한 가지 결정을 내렸다. 곧장 욕실을 나와 테이블의 호출 벨을 눌렀다. 이윽고 메튼이 침실 문 앞에 도착했다.

“부르셨습니까, 저하.”

“카스트로, 클라우스 백작에게 서신을 보내라. 긴히 할 말이 있으니 대공저로 오길 바란다고.”

***

황족 형제는 아주 간만에 응접실에서 얼굴을 맞대고 앉아 있었다. 응접실 밖 이십 미터까지 사람을 물린 덕에 주변은 아주 조용했다. 극비 사항이 오갈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스카이라는 밀크티를 홀짝거리는 데본시아를 못마땅해하며 쏘아보았다.

“갑자기 왜 부른 거야.”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것 같아서.”

스카이라는 곧장 정색을 했다.

날카로운 그의 반응에 데본시아는 코웃음을 쳤다. 찻잔을 내려놓고서 똑바로 정면을 보았다.

“왜, 돌려 표현하니까 불쾌해? 그럼 바꿔 말할까? 나한테 선언 내지는 통보할 일이 있잖아?”

“…….”

“애리얼, 그 애와 관련된 일로.”

데본시아가 말해 보라는 듯 손수 그에게 운을 띄워 줬다. 그러자 스카이라도 더는 입을 다물고 있지 않았다.

“애리얼을 황자비로 만들 거야.”

“그래.”

“……그게 다야?”

“응. 방해 안 할게. 잘해 봐.”

데본시아는 비꼬는 소리도 없이 부드럽게 웃었다.

싱거운 반응이었다.

스카이라는 의심으로 가득한 눈초리를 던졌다. 애리얼을 황자비로 만들겠다는데 이렇게 물러날 인간이 아니었다. 최소한 불쾌한 티라도 내야 했다. 저러고 미심쩍게 웃기만 할 리 없었다.

“뒤로 수를 쓸 모양이지?”

“그럴 리가. 방해 안 한다고 했잖아.”

“믿을 수가 없어.”

불신으로 가득 찬 대답이었다.

데본시아는 조용히 웃기만 하다가 겉옷의 안주머니에서 도장을 꺼냈다. 황제가 사용하는 재가용 도장이었다. 그는 그걸 테이블에 툭 놓고서는 스카이라의 앞으로 밀어 주었다.

이 도장만 있으면 약혼은 물론 설령 혼인이라도 곧장 밀어붙일 수 있다.

그걸 알기에, 스카이라는 제 앞에 놓인 도장을 보고서 적잖이 당황했다.

“너, 뭐 하자는 건데.”

“보이는 대로.”

“이거 가지고 마음대로 하라는 거야?”

스카이라가 도장을 턱 쥐더니 까딱까딱 흔들며 말했다. 도발이나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데본시아는 빙그레 웃을 따름이었다.

“응.”

“…….”

“그러라고 주는 거야.”

데본시아는 꺼림칙할 정도로 순순했다. 심지어 약혼 내지는 결혼을 도울 도장까지 손수 내밀었다. 애리얼을 황자비로 만들 생각이라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나중에 딴말하지 마라.”

스카이라는 도장을 쥔 채 소파에서 일어났다. 애리얼을 황자비로 만들기 위해서, 그 무엇보다 필요한 물건이었다. 데본시아가 준 거라는 게 꺼림칙하긴 했으나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볼일이 끝난 스카이라는 곧장 응접실을 떠났다.

그가 사라지고 응접실의 문이 닫히자마자 데본시아는 코웃음을 쳤다.

“황자비라니, 웃기네.”

누가 보아도 상사병으로 보이는 열병을 호되게 앓고는 저런 결론을 내리다니. 독하다 못해 끔찍할 지경의 집착이었다.

강제로 황자비로 만든다. 그 순간부터 애리얼은 스카이라를 극도로 거부하게 될 것이다.

그 사실을 스카이라도 모르지는 않을 터. 그럼에도 이런 수를 쓴다는 건, 그가 심정적으로 상당히 극한으로 내몰렸다는 거다.

그리고 그렇게 내몰린 인간일수록 이성적인 판단을 못 하고 실수를 연발하게 된다.

어쩌면 애리얼과 스카이라의 관계가 파탄에 이를 수도 있을 테지.

데본시아가 손수 도장까지 넘기면서 계속 미소를 지었던 이유였다.

제발 그 둘의 관계가 엉망이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궁지에 몰린 애리얼이 안식처를 찾아 자신의 품으로 뛰어들길.

“아, 애리얼…….”

데본시아가 한숨과도 같은 목소리를 터트리며 고개를 젖혔다.

설령 그녀가 황자비가 된다 해도, 그는 기다릴 수 있었다. 그보다 더한 것도 참을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의 마지막에, 그녀가 자신에게로 오기만 한다면.

***

렉시우스는 한 시간 정도가 흐른 후에 다시 돌아왔다. 제대로 셔츠에 바지까지 갖춰 입은 차림이었다.

그는 늦어서 미안하다는 인사를 건네고는 애리얼을 후원으로 이끌었다. 가볍게 산책을 이어 가다가 야외 테이블에서 티타임을 가졌다.

그동안 둘 사이에는 대화가 별로 오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어색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렉시우스는 줄곧 다정하게 애리얼을 대했다. 오전과 달리 부담스러운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둘은 야외에서 노을까지 감상한 뒤에 대공저 본관으로 돌아와 저녁을 함께 했다. 렉시우스는 이번에도 애리얼 몫의 음식을 손수 잘라 주려고 했으나, 애리얼이 거절하자 바로 손을 거뒀다. 대공비가 없으니 오히려 더 선을 잘 지키는 모습이었다.

그 덕택에 애리얼은 꽤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계를 푼 건 아니었다. 이곳은 대공저다. 그의 손안이나 마찬가지인 장소에서 느슨히 있을 수는 없었다.

심지어 애리얼은 그의 심기가 틀어질 행동을 할 생각이었다.

“그럼 선배, 먼저 들어갈게.”

식후 차까지 모두 마신 애리얼이 찻잔을 내려놓고서 일어났다.

렉시우스는 느긋하게 젖히고 있던 상체를 일으켰다.

“벌써 가?”

“……가면 안 돼?”

“아니, 가도 되는데? 있으면 더 좋지만.”

애매하게도 붙잡는 소리에 애리얼은 멈칫했다가 이내 손사래를 쳤다. 그러고는 곧장 만찬장을 벗어났다. 식사를 이유로 이미 두 시간이나 테이블 앞에 붙잡혀 있었다. 일곱 시에 시작한 식사는 아홉 시가 되어서야 겨우 끝났고, 밖은 이미 어두웠다. 그와 거의 온종일을 붙어 있었던 셈이다.

그걸 아는지 렉시우스도 애리얼을 붙잡지는 않았다. 등 뒤에서 서운하네, 어쩌네, 하는 볼멘소리가 작게 들리기는 했지만. 어쨌건 애리얼은 뒤를 돌아보는 일 없이 제 방으로 향했다.

그렇게 그녀는 방에 틀어박혀 대공저의 모두가 잠들 시각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백작저에 전화를 걸기 위해서였다.

렉시우스는 레이신의 생일은 물론이고 제 생일까지도 챙기지 말라고 했으나, 애리얼은 어지간하면 둘의 생일을 모두 챙길 생각이었다. 그래야만 다른 공략 대상의 생일도 무난히 챙길 수 있고, 필연적으로 발생할 차별이라는 오해도 막을 수 있으니까.

애리얼은 인기척을 죽이며 조용히 방을 나왔다. 전화기는 1층의 중앙 응접실에 있었다.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각이라 그런지 사용인은 거의 없었다. 그 덕에 애리얼은 꽤 수월하게 중앙 응접실에 도달했다.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곧장 응접실 안으로 진입해 중앙에 놓인 전화기를 들었다. 전화국을 통하지 않도록 긴급 회선 번호 111을 누르고 백작저 번호인 #710을 눌렀다.

긴급 회선은 급한 연락을 위해 일부 고위 계급에게만 허용된 비상 전화였다. 전화국의 감시를 피하는 대신 통화는 삼 분 이상 지속할 수 없었다.

애리얼은 통화 연결음이 울리는 동안 전할 말을 미리 정리했다.

15초 정도가 흐르자 백작저 쪽에서 회신이 왔다.

-허클리 백작저입니다. 신원을 밝혀 주시길 바랍니다.

“애리얼 허클리. 허클리 백작가의 공녀다.”

-공녀님?

수화기 너머에서 놀란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이 시각에 무슨 일이신가요?

“길게 통화 못 해. 바로 본론만 말할게. 칠 월 십칠 일, 곧 있을 솔렘 공자 서하의 생신 때 드릴 선물을 내가 따로 준비해 뒀어. 카논에게 물어보면 알 거야.”

-가문의 이름으로 드리는 선물 외에 말입니까?

“그래. 만약 공자 서하께서 백작저에 방문하시면 내 이름을 대고 그걸 드렸으면 해.”

-공자 서하께서 백작저에 방문하십니까?

“아마도 그럴 거야.”

본인이 직접 받으러 오겠다고 말했으니, 백작저로 올 것이다. 애리얼은 그렇게 추측하고서 백작저에 미리 말을 전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칠 월 십칠 일, 솔렘 공자 서하께서 방문하시면 공녀님의 이름을 대고 따로 선물을 전달하겠습니다.

“그래, 고마워. 이만 끊을게.”

애리얼은 용건만 빠르게 전한 뒤 얼른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말은 다 전했다. 이제 남은 건 들키지 않고 돌아가는 것.

“통화는 다 했어?”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애리얼은 뻣뻣하게 굳고 말았다. 나긋나긋하게 물어 오는 특유의 저음이 그녀의 숨을 턱 막았다.

렉시우스.

그의 존재를 인식하자 사지가 떨려왔다.

‘언제부터 있었지? 왜 접근 알림이 울리지 않았지?’

의문에 잠긴 그녀의 손이 원피스 주머니로 향했다. 휴대폰이 만져졌다.

애리얼은 혼란스러운 와중에 접근 알림의 조건을 떠올렸다.

『*대상과의 거리가 20m 이내로 줄어들 때 1회 진동이 발생합니다.』

‘저녁 식사 이후로도 계속 이십 미터 이내로 거리가 유지된 건가?’

하지만 대공저는 상당히 넓었다. 본관으로만 위치를 한정해도 넓다. 그런데 자신과 렉시우스의 위치가 우연히 이십 미터 이내의 거리로 유지되었다고. 심지어 아홉 시부터 지금까지, 거의 다섯 시간 동안.

‘이게 가능한 일인가?’

도저히 우연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애리얼의 안색이 삽시에 창백해졌다. 오싹한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나를 계속 따라다닌 건가?’

어쩌면 대공저에 오고서부터 줄곧…….

애리얼은 등허리에 소름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직 전화할 데가 남았어? 이번에는 솔렘 공작저에 할 건가?”

그가 조용히 말했다. 조금도 화난 것 같지 않은 음성이었다. 그래서 더 두려웠다.

애리얼은 가늘게 떨면서 고개를 돌렸다.

들키지 않으려고 조명을 켜지 않은 채 진입한 어두운 방. 창문을 넘어 들어온 달빛이 그 안을 비추었다.

하얀 빛줄기에 드러난 금빛 눈동자. 무섭도록 고요한 그 시선이 똑바로 애리얼을 향했다.

렉시우스, 그가 팔짱을 낀 채 문에 기대고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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