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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93)화 (181/264)

“표정이 왜 그 모양이야, 애리얼.”

“…….”

“그냥 대공저에서 대공자를 만난 것뿐인데, 그렇게 놀랄 일인가?”

“선배…… 왜 이 시간에 여기에…….”

“그럼 넌 왜 여기에 있는데?”

그의 질문에 애리얼의 입이 딱 다물렸다. 이 상황을 그럴듯하게 해명할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렉시우스가 팔짱을 풀고서 웃으며 다가왔다.

“긴급 회선으로 했더라?”

“…….”

“나한테 들키면 안 되는 일이라고는 생각했나 봐?”

“…….”

“내가 레이 생일을 챙기지 말아 줬으면 한다고, 내 생일까지 걸면서 말했는데. 그것도 어제.”

“선배…….”

“적어도 며칠은 지난 뒤에 저지르지 그랬어?”

그가 고작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와 손을 뻗었다. 애리얼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그의 손가락은 애리얼을 스치듯 지나 테이블에 놓인 전화기로 향했다. 그녀가 급히 내려놓느라 삐뚤어진 수화기를 똑바로 고쳐 놓았다. 그러고는 다시 손을 거두는가 싶던 그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못마땅해하는 눈빛이 그녀의 옆얼굴에 닿았다.

“나는 너한테 꽤 잘해 줬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결과가 이러니까 섭섭하네.”

“선배, 이 일은…….”

“못 보고, 못 들은 거로 할게.”

그가 애리얼의 말을 끊었다. 굳이 변명할 필요 없다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니까 다음에는 하지 말라면 하지 마. 아니면 들키질 말든지.”

그 말을 끝으로 렉시우스는 기울였던 고개를 똑바로 들고서 물러났다.

정말로 봐준 건가. 애리얼은 아리송한 기분에 휩싸인 채 그를 살폈다.

렉시우스는 제 심정을 얼굴에 잘 드러내지 않았다. 미소마저도 거둔 무표정한 얼굴로 응접실 문을 열고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시간도 늦었는데 방까지 데려다줄까?”

“……괜찮아.”

애리얼은 종종걸음으로 걸어가 조심스럽게 그를 지나쳤다. 그대로 응접실을 빠져나가 그 바로 앞에 있는 계단을 올랐다.

렉시우스는 의외로 애리얼을 쫓아오지 않았다. 그냥 응접실 앞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줄곧, 지긋하게. 그녀를 따라가는 대신 집요한 시선을 던졌다.

애리얼은 뒤통수에 달라붙는 듯한 시선을 느끼면서도 서두르지 않았다. 마음은 급했으나 도망치듯이 굴기는 싫었다. 안면 있는 인물의 생일을 챙기는 게 죄는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그런 걸 금지하는 렉시우스에게 따지고픈 상황이었다. 왜 갑자기 레이신은 물론이고 그의 생일까지 챙기지 못하게 하는가.

다만 그의 심기가 뒤틀린 상태이기에, 애리얼은 그의 감정을 더 건드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미 백작저에 전화는 끝냈고, 선배를 더 건드릴 일은 없어.’

그러니 충돌할 일은 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여기면서도 애리얼은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휴대폰을 켰다.

『공략 대상이 근처에 있습니다.』

『렉시우스 크레시앙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에게 강한 애정을 느낍니다. 당신과 함께하는 데 더없는 기쁨을 느낍니다.)

▷현재 위치: 대공저 본관 - 2층 복도』

애리얼은 렉시우스의 위치를 눈에 담고서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위치한 바로 아래에 그의 초상화가 보인 탓이다. 응접실 앞에서 바라보기만 하던 인간이 도대체 언제 올라온 건지.

긴장 어린 눈으로 그의 초상화를 예의 주시 했다. 이윽고 초상화는 그녀가 있는 방 바로 아래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더 움직이는 일 없이 그 안에 머물렀다.

렉시우스는 애리얼이 머무는 방의 바로 아래에 기거했던 거다. 오감이 날카로운 그는 바로 위층에 있는 애리얼의 인기척을 손쉽게 파악했으리라.

‘정말 감시하고 있던 거야.’

그것도 사람을 쓰지 않고 본인이 직접.

애리얼은 머리가 어질해지는 충격을 느끼며 무너지듯 소파에 앉았다. 그녀는 그가 주관하는 구금을 겪었다. 그의 감시가 얼마나 철저하고 살벌한지 알았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애리얼을 가두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예의를 지키며 발톱을 감추었다.

‘선배는 대체 뭘 계획하고 있는 걸까…….’

애리얼은 대공저를 그냥은 나갈 수 없으리란 걸 직감했다. 대공저를 나설 때는 무언가가 크게 바뀌게 될 것이다. 그게 자기 자신이든 렉시우스든 혹은 그 외의 타인이든.

***

전화 사건이 일어난 후, 며칠간은 평온한 날이 이어졌다.

애리얼이 레이신을 비롯한 타 공략 대상을 언급하지 않자 렉시우스도 선을 지켜서 행동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잠잠한 태도였다. 그래서 애리얼은 그의 의중을 짐작하기가 더 힘들었다.

대화는 일상적인 수준 이상으로 진전되지 못했다. 그녀가 진전시키려고 하면 그가 노골적이다시피 한 애정 표현으로 그 말문을 막았다. 좋아한다는 직설적인 고백부터 이상형이나 취향이 어떻게 되냐는 물음까지. 애리얼이 거북하게 여길 말만 섞어 던졌다.

그 탓에 애리얼은 그와 말을 많이 나누지 않았다. ‘대공비 전하께서는 언제 돌아오시냐’는 질문으로 불편함만 드러냈다. 그러자 그에게서 아직 사흘은 더 있어야 한다는 통보가 돌아왔다.

사흘이라는 꽤 긴 기간을 듣고서도 애리얼은 불안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의 애정 표현을 막기 위해 꺼낸 말에 불과했으니까. 게다가 대공비도 그의 계획에 관여되어 있다는 심증이 있는 만큼 그녀의 귀환을 좋게만 여길 수는 없었다. 오히려 심란하게 느꼈다.

대공비의 귀환이 렉시우스가 움직이게 될 기점은 아닐까 싶어서.

애리얼은 산책하러 나가지 않겠냐는 그의 권유도 거절한 채 곧장 방으로 돌아갔다. 산책이라 봐야 어차피 대공저의 내부였다. 갇혀 있다는 불안이 심해지고 있는 지금, 정원으로 나가면 대공저가 고지대에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여 탈출이 어렵다는 좌절감만 느낄 뿐이었다.

방에 홀로 틀어박혀 휴대폰으로 그의 동태나 파악하는 게 더 나았다.

애리얼은 소파에 앉아 차분하게 휴대폰 화면을 주시했다.

『공략 대상이 근처에 있습니다.』

『렉시우스 크레시앙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에게 강한 애정을 느낍니다. 당신과 함께하는 데 더없는 기쁨을 느낍니다.)

▷현재 위치: 대공저 본관 - 2층』

그의 초상화가 애리얼의 방 바로 아래층 방에 표시되어 있었다. 그녀가 방에 돌아온 직후 그도 따라 돌아간 것이다.

애리얼은 어느덧 심각해진 표정으로 액정을 톡톡 건드렸다.

렉시우스는 대공저에서 애리얼과 줄곧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를 감시하기 위함인지, 아니면 혹여 접근 알림의 존재를 눈치채고서 이러는 건지.

소름 끼치게 눈치가 빠른 그라면 후자도 가능해 보였다.

‘아니, 그래도 그만큼이나 추측할 수 있을까?’

애리얼은 곧장 후자의 가능성을 부정했다. 그가 휴대폰의 존재를 알기는 하지만, 접근 알림이라는 기능을 알기는 어려웠다. 설사 눈치챘다 하더라도 접근 알림이 이십 미터 거리를 유지할 때는 다시 울리지 않는다는 구체적인 조건까지 눈치채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는 그저 밀착해서 감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서?’

애리얼은 그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차피 애리얼은 혼자서는 대공저에서 나갈 수 없는 처지였다. 이미 그의 손아귀에 떨어진 거나 다름없는데 굳이 따라다니면서 감시할 필요는 없었다. 대공저의 사람을 시켜도 충분하다. 이미 대공비의 시녀도 애리얼에게 붙어 있지 않는가.

몸놀림도 민첩하고 여차하면 순간 이동도 쓸 수 있는 게 그였다. 굳이 이런 거리를 유지하며 감시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풀리지 않는 의문을 이어 나가던 애리얼은 문득 한 인물을 떠올렸다.

렉시우스에게 불만을 가지고서 렉시우스를 적대시하는 대공저 내의 유일한 존재.

‘우레우스.’

그러고 보니 요 며칠간 그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 렉시우스의 밀착 감시는 그를 막기 위함이었던 걸까.

궁금증에 애리얼은 휴대폰으로 대공저의 이곳저곳을 확인했다. 하지만 공략 대상도 아닌 우레우스가 보일 일은 없을 터. 금세 흥미를 잃고 눈동자를 돌리려는데 약간 희한한 장소가 시야에 들어왔다.

화면 끝자락에 표시된 대공저의 정원 끝, 동그란 모양의 장소.

‘이게 뭐지?’

애리얼은 손가락을 움직여 원형의 장소를 확대했다.

크기는 애리얼이 머무는 방의 사분의 일 정도로 보였다. 지난번에 렉시우스와 정원을 거닐 때는 보이지 않았던 장소다.

‘이 정도 크기의 건물이 있었다면 알아챘을 텐데?’

애리얼은 의심스러워하는 눈빛으로 그 동그란 장소를 응시했다.

대공저에서는 건물을 가릴 만큼 큰 조경수를 사용하지 않았다. 대공비가 한눈에 보이는 탁 트인 풍경을 선호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니 못 보고 지나쳤을 리는 없다.

‘그렇다는 건…… 지하에 지어진 건가?’

하지만 왜?

애리얼은 곧바로 의문이 따라붙는 걸 느꼈다.

‘왜 하필 이런 외진 장소에 지하 공간을 만들었을까? 입구가 없는 것도 이상해.’

여러모로 용도가 의심스럽다.

지하 창고라기엔 모양새도 희한하지 않은가. 접근성도 나빴고, 비상용 벙커라기엔 크기가 작았다.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애리얼은 이 세계에서 통용되는 상식 하나를 떠올렸다. 이런 거대한 성채에는 침입자를 가둬두기 위한 감옥을 필수적으로 만들어둔다는 것.

그러고 보니 처음 대공저에 왔을 때도 운전기사가 그와 관련된 말을 했었다. 계단 옆의 도르래에 관해 물었을 때였다.

“포로나 심문할 죄인을 호송할 때는 쓰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대공저에 포로나 죄인을 두는 공간도 분명 있을 터.

‘이 동그란 공간도 그런 용도일까? 뭔가를 감추거나 가두려고 지은 건가?’

그 생각이 든 순간, 애리얼은 참을 수 없는 오싹함에 휴대폰을 떨어트렸다. 툭, 소리를 내며 휴대폰이 추락했다. 그녀의 팔뚝에는 오스스 소름이 올랐다.

설마하니 렉시우스가 감금까지 벌일까…….

그 정도로 극단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하려면 진작 했지, 이러고 기다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애리얼은 불쑥 든 불길한 직감을 지우지 못했다. 저 장소가 누군가를 가두기에 좋아 보인다는 생각이 지워지질 않았다.

지나친 망상이라며 고개를 저었으나 불안과 의심은 도무지 가시질 않았다.

***

원형 공간은 지하에 지어져 있다.

최근에 우레우스를 본 기억이 없다.

두 가지 사실이 결합되어 망상이 날뛰었다.

그리하여 애리얼은 참지 못하고 렉시우스를 떠보기에 이르렀다.

“선배, 최근에 공자님을 못 본 거 같은데, 혹시 대공비 전하와 같이 황성에 가셨어?”

그럴 리가 있나. 대공비가 렉시우스도 아니고 우레우스를 동행해서 황성에 갔을 리는 없었다.

그럼에도 애리얼은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렉시우스가 고기를 썰다가 애리얼을 응시했다.

“우레우스, 말하는 거야?”

“응. 같은 대공저에 있으면서 한 번도 못 본 거 같아서.”

“보고 싶어?”

“마지막에 별로 안 좋게 헤어졌으니까……. 신경 쓰여서.”

“그런 이유면 신경 안 써도 돼. 잘 있으니까.”

“어디에?”

불현듯 그 물음이 나갔다. 애리얼은 제가 말하고도 아차 싶어서 입을 가렸다.

렉시우스의 금색 눈이 놀란 듯 커졌다가 이윽고 원래의 크기로 돌아왔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애리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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