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한층 낮아진 음성으로 물었다.
애리얼은 당황하지 않은 척 차분하게 대답했다.
“대공저에 오던 날만 해도 게임도 하고 함께 시간을 보냈는데 요 며칠 동안은 계속 보이지 않으니까 걱정돼서. 그것뿐이야.”
“근데 어디에, 라는 질문이 바로 튀어나오나? 이 넓은 대공저에서 마주치지 않을 수도 있는 게 당연한데, 어디에든 있겠지, 라고 생각하는 게 보통 아니야?”
“…….”
“그렇게 물으면 내가 우레우스를 어디 숨겨 놓기라도 한 것 같잖아.”
“그런 뜻은 아니었어. 선배 말대로 대공저는 넓으니까…… 그냥…… 대공저의 어느 부근에 있을지 궁금해서 물은 거야. 선배라면 대공저를 잘 알 테니까.”
가까스로 제 말을 수습한 애리얼이 무표정하게 물을 들이켰다.
렉시우스는 그녀를 가만히 보다가 무심히 물었다.
“정곡을 찔려서 목이 타?”
그 소리에 애리얼은 마시던 물을 뱉을 뻔했다. 가까스로 물을 삼키고 잔을 내려놓자 웃지도 않고 진지한 렉시우스가 보였다. 도무지 속일 수가 없는 이였다. 자신이 한 오해 때문에 삐친 건가.
하지만 단순히 삐쳤다기에는 그의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약간이지만 표정을 숨기는 것 같았다. 일부러 삐친 척을 하는 건지, 뭔지. 묘했다. 한없이 진지한 그의 표정이 되레 그녀의 의심을 부추겼다.
그래서 애리얼은 무심코 물었다.
“선배는?”
“뭐?”
“선배도 정곡이었어?”
“그게 무슨 소리…….”
“선배 표정이 뭔가…… 거짓말을 하는 거 같아서.”
애리얼은 관찰하는 듯한 시선으로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순간 렉시우스는 치부를 들킨 것처럼 제 얼굴을 가렸다.
역시 추측이 맞았구나. 애리얼이 위험한 불안감을 현실화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그거…… 무슨 뜻인데?”
렉시우스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예상치 못한 질문을 했다. 여전히 얼굴을 반쯤 가린 채 노란 눈동자만 애리얼을 향했다.
애리얼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반문했다.
“……뭐가?”
“내 표정이 거짓말을 하는 거 같다는 게, 무슨 뜻이냐고.”
억지로 신경질을 꾹꾹 참는 듯한 말투였다.
설마 화난 건가. 애리얼은 빠르게 그의 얼굴을 살폈다. 렉시우스의 귓바퀴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제야 애리얼은 상황이 자신이 예상한 것과 다르게 돌아간다는 걸 깨달았다.
“그…… 선배랑 지낸 지도 꽤 됐으니까, 나도 선배 표정을 조금 읽을 줄 알아서…… 아니, 읽을 수 있는 것 같아서…….”
애리얼은 횡설수설 변명했다.
그러자 렉시우스는 기어코 뺨까지 잔뜩 붉히다가 자리를 박차고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잠깐 나갔다가 올게.”
통보만 남긴 채 그는 쌩하니 만찬장을 나갔다.
애리얼은 멍하게 눈만 끔벅거렸다.
렉시우스는 정곡을 찔려서 당황했다기보다는 부끄러워하는 데 가까운 반응이었다. 애리얼은 그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부끄러웠던 걸까.
그녀는 렉시우스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다고 추궁에 가까운 말을 던졌다. 그 말의 그 어디에도 부끄러워할 구석은 없었다. 오히려 불쾌하게 느껴야 했다. 설령 그가 정말로 거짓말을 해서 정곡을 찔린 거라도 저렇게 홍조를 띄울 이유는 되지 못했다. 게다가 그녀가 아는 렉시우스라면 정곡을 찔린 순간 되레 뻔뻔하게 나올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꼭 수줍어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애리얼은 그의 심리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어째서. 우레우스에 관한 것도 잊어버릴 만큼 혼란스러웠다.
렉시우스도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당장 멀리 나가지도 못하고 만찬장 바로 앞의 복도에서 서성거렸다. 이마를 짚고서 고뇌에 빠진 듯이 아까의 대화를 상기했다.
“선배 표정이 뭔가…… 거짓말을 하는 거 같아서.”
그 소리에 왜 얼굴이 달아올랐을까. 왜 심장이 요동쳤을까.
‘치부라도 들킨 것 같았나?’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애리얼이 의외로 제 거짓말을 종종 알아본다는 건 예전부터 알았다.
“정확하게 설명하긴 어려운데, 선배가 날 꾀어내려고 하는 것 같을 때는 묘하게 분위기가 다르거든. 전에 백작저에 왔을 때도 그랬잖아. 갑자기 이상하게 진중하고 진심인 것같이 보이는 거.”
그때 그녀의 그 지적을, 그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 들었는지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카데미의 호숫가에서다. 그녀에 대한 감정이 그리 깊지 않았을 때. 그녀를 놀리듯 좋아한다고 떠보다가 그렇게 정곡을 찔렸었다.
그가 진중한 표정을 지을 때, 애리얼은 그게 진심인지 거짓인지 잘 가려냈다. 처음에는 그저 몇 번 저를 놀리는 것 같은 순간에만 알아채다가, 나중에는 그 외의 순간에도 알아챘다. 그가 처음 고백을 말했을 때 그녀는 그게 진심이라는 걸 알아챘고, 이후에 놀리듯 가볍게 애정을 말했을 때도 그녀는 전과 달리 그게 진심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단 한 번도 그의 애정에 ‘거짓말’이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처음과는 다르게…….
그 탓에 잊고 있었다. 애리얼이 의외로 제 표정을 읽을 줄 안다는 사실을. 생각보다 그녀가 저를 잘 알고 있고, 세밀히 관찰할 줄 안다는 사실을.
‘아, 그래서…….’
렉시우스는 깨달았다는 듯 하, 웃음을 닮은 한숨을 내뱉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의 애리얼은 그를 신경 썼다. 그의 호감을 사려고 애썼고, 그와 연결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막상 그의 감정이 진해지자 그녀는 그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다만 아예 밀어내지는 않았다.
그녀가 그렇게 행동하는 정확한 이유는 아직도 잘 몰랐다.
낮은 계급과 처지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건지, 선후배로서의 정을 쌓아서 그런 건지. 권력욕도 재물욕도 딱히 없으면서 애리얼은 그를 옆에 두었다.
대신 그녀는 무심해졌다. 그가 뭘 하든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그의 표정을 살피지도 않았다. 그녀가 저를 불편해하는 게 보일 때면 속이 다 쓰렸다. 비참한 적도 많았다.
‘그래서 고작 그 한마디에 좋았던 거야.’
거짓말하는 것 같다는 그 한마디에, 그녀가 저에게 신경을 쏟던 과거가 떠올라서. 마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아서.
그는 순수하게 기뻤던 거였다. 그녀가 관심을 주고 신경을 쏟는 것이 너무나 좋았던 거였다.
고작 그 정도로, 그녀가 저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도 다 잊을 만큼, 좋았다.
제 감정을 명확하게 깨닫자마자 그의 입에선 헛웃음이 터졌다.
‘내가 이 정도로 굶주려 있었다니.’
이제는 제 감정이 좋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해졌음을 깨닫는다. 이건 그보다 더 무거운 감정이었다.
렉시우스의 자각과 동시에 애리얼의 휴대폰이 울렸다.
우우우웅-
애리얼은 놀란 얼굴로 황급히 치마 주머니를 더듬다 휴대폰을 꺼냈다.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렉시우스 크레시앙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현재 위치: 대공저 본관 - 1층 복도』
만찬장 입구 바로 앞의 복도에 선 그의 초상화. 그리고 다섯 개로 상승한 하트의 개수.
애리얼은 그대로 경직되었다.
도대체 방금의 대화로 왜 호감도가 상승했단 말인가.
목 끝까지 물이 차오른 듯한 기분이 섬찟했다.
사랑. 사랑이라…….
애리얼은 이제 그 단어가 달갑지 않았다. 죄책감과 함께 불안감을 일으키는 말이었다.
『※경고
*공략 대상에게 할당된 호감도는 5개까지입니다.
6개부터는 ‘오버히트(overheat: 과열)’ 상태로, 극단적인 엔딩을 마주할 확률이 매우 높아집니다.』
아찔한 문구로 가득한 경고 창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보이지 않는 우레우스, 위험 수위까지 차오른 렉시우스의 호감도.
초조해진 애리얼은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대공저, 나아가서 이 세계를 빠르게 벗어나야 했다.
이제 정말 시간이 없다.
올해가 마지막이어야 한다.
***
렉시우스의 보좌관, 메튼은 최근 대공저로 출근하지 않았다. 황자의 뒤를 캐고, 클라우스 백작과 접촉하기 위해서였다.
각각의 일은 완전히 별개의 건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두 가지 일 모두 한 장소를 통했다.
황성.
황자의 뒤를 캐기 위해서는 당연히 황성을 예의 주시 해야 했다. 하지만 클라우스 백작과의 접촉을 위해서도 황성에 들러야 할 줄은 몰랐다.
이유는 모르지만 요즘 클라우스 백작은 황성을 자주 들락거렸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마법 실력이 너무 뛰어나 황성에 스카우트를 당한 거라는 말도 있었고, 일전의 재판으로 황태자에게 약점을 잡혔다는 말도 있었다.
메튼은 주로 후자에 무게를 두는 인물이었다. 만약 스카우트를 당한 거라면 소문이 돌기 전에 클라우스 백작에 관한 공문이 먼저 떴을 테니까.
그래서 메튼은 백작을 함부로 대공저에 데려가지 못했다. 황태자와 손을 잡았을지 모르는 인물에게 대공자의 상처 치료를 시킬 수는 없었다.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현재 주군과 황태자 전하의 사이가 그리 좋지는 않은 것 같으니…….’
메튼은 신중해졌다.
더군다나 대공자에게 상처를 입힌 게 다른 누구도 아닌 황자였다. 현재로선 황성의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 그게 그의 판단이었고, 대공자도 어느 정도는 동의했다.
아직은 정보가 더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황성을 누비는 사이였다.
귀족 회의가 파하고 열린 작은 사교 파티가 한창인 홀. 환한 조명 빛이 새어 나오는 문 틈새로 귀족들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곧 황자비가 정해질 거라는 소문이 돌던데요.”
“예. 공공연한 사실이죠. 황자 저하께서도 딱히 숨기실 마음은 없으신 듯합니다.”
“일전에 이야기가 오갔던 플라넬의 왕녀를 그렇게 보냈는데, 이번에는 제정신이 박힌 사람으로 구했겠죠? 귀족이랍니까? 아니면 왕족이랍니까?”
대공비의 목소리였다.
메튼은 저도 모르게 호흡을 멈추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귀족들이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그것이…… 허클리 백작가의 공녀라고 합니다, 전하.”
메튼은 순간적으로 신음을 흘릴 뻔했다. 허클리 백작가의 공녀라니, 당장 대공저에 계신 분이 아닌가. 미래에 어떻게든 대공가의 사람이 되실 분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분이었다. 그런데 황자비라니!
‘이런 와중에 대공자 저하…… 주군께선 진정 그 맹세를 하실 생각입니까…….’
속으로 탄식을 삼키며, 그는 대공비를 살폈다.
대공비는 이 모든 것을 알고서도 대공자의 계획에 협조할 것인가.
당연히 아닐 것이다. 그러리라 여겼다.
“그렇군요.”
그러나 대공비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평온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공녀가 황자비가 될 거란 사실을 수긍했다.
메튼은 놀란 나머지 헛숨을 들이켜며 급히 황성을 빠져나갔다. 이후 곧장 대공자를 찾아 새로 알게 된 것을 보고했다.
“황자비로 허클리 공녀님이 예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아, 그래?
대공자의 반응은 싱거웠다. 노발대발하리라 여겼는데, 상상 이상의 침착함에 메튼은 당황하고 말았다.
“알고 계셨습니까?”
-아니. 그냥 그럴 수도 있다고는 생각했지.
“이제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준비한 계획은 파기 처리 할까요?”
-그걸 왜 파기해. 준비한 기간이 얼만데.
“하지만…… 이대로 가면 황자비가 될 분에게 저하의 모든 걸 걸게 되는 게 아닙니까.”
-그래서 하는 거야. 애리얼이 황자비가 되더라도 유효할 테니까.
그제야 메튼은 제 주군의 의도를 깨닫고 충격에 빠졌다.
제 주군은 허클리 공녀가 설령 다른 이의 사람이 되더라도 그 곁에 남을 생각을 한 것이다.
그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