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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95)화 (183/264)

하트는 다섯 개가 되었으나 렉시우스의 행동에는 변화가 없었다.

애리얼은 그의 상태가 폭풍 전야 같다고 느꼈다.

하트 다섯 개의 감정은 깊이가 다르다. 확연하게 애정을 요구하고 관계의 진전을 갈망한다. 스카이라가 그랬듯이, 렉시우스도 자신에게 뭔가를 제안하거나 강제할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결혼도 약혼도 요구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상태야.’

애리얼은 그가 그 약속을 파투 낼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그걸 계획하고 저를 부른 것도 아닌 거로 보였다.

그렇다면 대체 렉시우스가 노리는 것은 뭘까.

대공비가 귀환하기까지는 이제 딱 하루가 남았다.

애리얼은 대공비가 돌아온 순간부터 제게 무언의 압박이 들어올 것을 직감했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거절하고 대공저를 빠져나가야 한다.

“무서워 죽겠네. 인상 좀 펴라.”

테이블의 맞은편에 있던 렉시우스가 장난스레 말하며 애리얼의 미간을 톡 건드렸다. 그제야 애리얼은 자신이 미간을 잔뜩 구기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따사로운 오후, 정원에서 차를 마시며 할 표정은 아니었다.

그녀는 구겼던 안면에서 힘을 풀고 그를 보았다.

자다 일어난 듯이 맹해 보이는 얼굴에 렉시우스는 피식 웃었다.

“무슨 고민 있어? 내가 들어 줄까?”

애리얼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선배가 고민인데, 하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아무 일 없으면 됐고.”

렉시우스는 의외로 쉽게 수긍했다. 좀 더 집요할 줄 알았는데, 싱거운 반응이었다.

확실히 최근의 그는 선을 잘 탔다. 애리얼이 난감해할 일은 길게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부담스러워할 짓도 거의 하지 않았다. 밀착 감시를 제외하면 말이다.

‘그나저나 우레우스는 정말 감금이라도 당한 걸까?’

애리얼의 눈이 슬그머니 정원의 끝으로 향했다. 성벽 앞의 평평한 잔디밭. 저 부근에 원형의 지하 공간이 있으리라. 애리얼은 휴대폰에서 보았던 위치를 상기하며 그 주변을 쓱 훑었다.

“뭐 봐?”

“아, 깜짝이야.”

애리얼은 슬쩍 떠보는 목소리에 놀라서 꽤 큰 목소리를 내뱉었다. 설마 의심하는 걸 들키지는 않았겠지. 눈동자를 굴리며 얼른 시선을 원위치하자 렉시우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손등에다 턱을 괸 채 흥미롭다는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왜 그렇게 놀라? 숨겨 둔 애인이라도 보고 있었어?”

“그냥 벽이 참 높구나, 해서…… 보고 있었어.”

“대공저 성벽이 높긴 하지.”

렉시우스는 애리얼이 적당히 둘러댄다는 걸 아는 눈치였으나 굳이 지적하진 않았다. 적당히 말을 맞춰 주는 그가 참 고단수로 보였다.

“근데 선배는 계속 나만 보고 있는 거야?”

“알면서 물어.”

심하게 직설적인 화법에 애리얼만 도로 입이 다물렸다. 장난치듯 말해도 진심이긴 하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애리얼은 눈치만 보다가 허공으로 눈을 돌려 버렸다.

그러자 그가 은근하게 떠보는 말을 속삭이듯 던졌다.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듯이.

“도망치기 어렵겠지?”

그가 건넨 말에 애리얼은 반사적으로 다시 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뭐…… 라고?”

“농담이야.”

렉시우스는 의미심장하게 말을 얼버무렸다. 그는 웃지도 않았다. 금색 눈을 내리깔고서 찻잔을 만지다가 애리얼을 슬쩍 훑었다.

“있잖아, 후배님. 난 처음부터 네 표정을 읽을 줄 알았거든.”

“…….”

“나한테는 거짓말 안 하는 게 좋아.”

경고의 말이 서늘하게 귓전을 울렸다.

애리얼은 짐짓 차분한 척 찻잔을 쥐었다. 목이 탔다. 또다시 정원 끝을 향하려는 시선을 내리깔며 차를 들이켰다. 말랐던 식도를 축이고는 침착하게 물었다.

“그러면 선배, 솔직하게 물어도 괜찮아? 뭐든 대답해 줄 거야?”

“뭘 묻는가에 따라 다르지.”

“가려서 알려 주겠다는 거?”

“적어도 방금 네가 눈길을 준 것에 대해서는 대답 안 할 거야.”

“…….”

“그러니까 궁금해하지 마.”

그가 싱긋 웃으며 다시 한번 경고를 날렸다.

이로써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렉시우스는 정원에 있는 지하 공간을 숨기고 싶어 한다. 그렇지 않다면 애리얼의 시선 한 번에 저렇게 예민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었다. 걸리는 게 없다면 직접 공개해도 그만이었다. 혹은 어떤 공간이라고 짤막하게 설명만 해 줘도 된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경고를 했다. 애리얼이 조금의 관심도 두지 않게 하려고 말이다.

‘정말 저기에 우레우스를…….’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찰나, 애리얼은 렉시우스가 우레우스를 차기 가주라고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설마하니 차기 가주를 저런 데 가두겠는가. 대공비도 곧 올 텐데.

확신에 가깝게 부풀었던 의심이 힘없이 풀썩 꺼졌다.

애리얼은 의심을 거두고서 정원의 조경수만 눈에 담았다.

그때서야 렉시우스도 그녀를 향하던 의미심장한 시선을 거두었다. 슬며시 입꼬리를 끌어 올리기까지 했으나, 그녀는 알아채지 못했다.

***

오랫동안 방치된 벽돌 바닥이 버석거리는 먼지를 일으켰다. 뿌옇게 뜨는 잔가루들이 기침을 유발했다.

우레우스는 콜록거리면서도 발길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 봐야 결계에는 미세한 금도 가지 않았다.

결계 너머에 있는 렉시우스는 무심한 낯으로 의자에 앉아서 그를 지켜보았다. 뭘 해도 안 될 텐데, 지칠 줄 모르고 날뛰는 제 동생이 신기했다. 하긴 크레시앙 대공가의 질긴 체력이 어디 저에게만 있겠는가. 가만히 놔두면 이틀은 더 저러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지하에서 암만 날뛰어 봐야 어지간해선 티가 나지 않을 텐데.’

렉시우스는 오늘 이 근처를 배회하던 애리얼의 시선을 떠올렸다. 무슨 정보를 어떻게 얻었는지는 몰라도 그녀는 이곳의 존재를 눈치챘다.

“적당히 해라.”

“이거 열어!”

“일이 끝나면 열어 줄게.”

“당장 열어! 이 개놈아!”

“내가 개놈이면 넌 개 동생이야?”

“시끄러워! 너만 개야! 넌 입양아야!”

“넌 입양아도 못 이기냐? 그래서 가주 하겠어?”

“니가 더러운 수를 쓰니까 그렇잖아! 이상한 데나 보내고!”

“그럼 더 좋은 데로 보내 줄게. 어디 가고 싶은데?”

“아무 데도 필요 없어. 난 집에 있을 거야.”

“잘 놀라고 좋은 데 보내 줬잖아. 평생 못 오는 것도 아니고 잠깐 가 있는 건데, 그것도 못 참으면 어떡해.”

“필요 없다고 했잖아! 내가 왜 참아야 하는데? 내가 내 집에 못 있는 게 말이 돼?”

우레우스가 고함을 지르며 토로했다.

만찬장을 멋대로 빠져나갔던 그날부터 우레우스는 먼 휴양지로 보내졌다. 투명한 물 아래로 입자 고운 백사가 들여다보이는 아름다운 장소였으나, 우레우스는 조금도 달갑지 않았다. 첫사랑에 빠진 그는 제 감정에 취해 있었다. 애리얼을 어머니와 형의 계략에서 구해 내야겠다는 기사도 정신으로 똘똘 뭉쳐서 둘의 계획을 망칠 생각만 가득했다. 애리얼을 만나기만 하면 그 둘이 꾸민 짓을 모두 알려 주리라. 아예 그 둘에게 엄포를 놓기까지 했다.

그래서 렉시우스는 우레우스가 대공저에 돌아오지 못하도록 수를 썼다.

우레우스는 아직 어리고 미숙해서 순간 이동 같은 고위 마법은 쓰지 못한다. 하지만 지위를 이용해 다른 마법사에게 도움을 구할 수 있을 정도로 영악하기는 했다.

그래서 렉시우스는 그에게 술식을 걸었다. 대공저에 접근하면 바로 이곳으로 끌려오도록 하는 술식이었다. 저주를 약하게 변형한, 일종의 꼼수였다.

어쨌든, 그렇게라도 우레우스는 격리할 필요가 있었다.

렉시우스는 우레우스가 끌려와 가둬질 장소를 신중하게 골랐다. 제 손이 닿는 곳이면서, 우레우스가 날뛰어도 부서지지 않고 티 나지 않을 장소.

그리하여 최종 선택 된 곳이 여기였다.

작은 원형 공간. 대공저에 세운 옛 성소의 터. 성소였기에 단단히 지어져 내외부의 출입을 막기 용이한 곳.

우레우스는 대공저에 들어가려고만 하면 이 개같은 지하 공간으로 끌려왔다.

사실 대공저 전체에 새 결계를 치는 방법도 있었으나, 우레우스 하나를 막기 위해 마력을 지나치게 소모해야 한다는 단점 때문에 그만두었다. 작은 공간에 가두면 경제적인데 뭐 하러 그렇게 하겠는가.

처음에는 우레우스를 아예 감옥에 가둬 버릴까도 생각했었다. 그래도 그건 너무 비인간적이라 여겨 여행을 보내 줬건만.

“휴양지가 싫으면 여기에만 갇힐래?”

“이 쓰레기 같은 새끼! 내가 나가기만 하면 애리얼한테 전부 말할 거야!”

“적당히 하라고 했…….”

한숨을 쉬며 으름장을 놓던 렉시우스는 문득 기이한 기척을 느끼고 낯을 굳혔다.

대공저에 두른 방어 결계를 뚫는 강한 마력의 기운.

순식간에 살벌해진 그의 기색에 우레우스마저 움찔거리며 움직임을 멈췄다.

누군가 대공저에 침입했다.

렉시우스는 단번에 한 인간의 얼굴을 떠올리고서 침입자를 특정했다.

‘오늘은 칠 월 십칠 일.’

레이신의 생일이다.

렉시우스의 안광이 흉흉하게 번뜩였다.

***

애리얼은 오늘이 레이신의 생일이라는 것도 잊고 있었다. 의도한 건지 뭔지, 대공저에는 달력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별생각 없이 소파에 앉아 휘영청 뜬 달을 감상하고 있었다.

폭풍 전의 고요를 느끼듯이, 내일 귀환할 대공비에 대한 생각도 잠시 미루어 두었다.

복잡한 머리를 식힐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녀의 안식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갑자기 창문에 거대한 인영이 나타나 톡톡, 유리창을 두드리는 것이 아닌가.

애리얼은 멍하게 입을 벌렸다.

달빛 아래 환하게 빛나는 밝은 빛깔의 머리칼, 무표정한 얼굴. 익히 보던 인물이 달을 가리며 창틀에 올라서 있다.

애리얼은 눈을 비볐다.

‘내가 지금 꿈을 꾸나?’

톡톡.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그녀에게 현실을 깨우쳤다.

이곳은 3층 높이였다.

애리얼은 번쩍 정신을 차리고 다급하게 창문을 열었다. 창틀에 아슬아슬하게 올라서 있던 남자가 훌쩍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 움직임에 금실을 엮은 듯한 땋은 머리가 부드럽게 흔들렸다.

늘 보던 조금은 방만하고 흐트러진 모습의 레이신이었다.

“공자 서하께서 여길 어떻게…….”

“선물.”

“선물?”

“응. 저번에 내가 받으러 오겠다고 했잖아. 내 생일 선물.”

애리얼은 얼떨떨한 상태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 이야기를 하긴 했었지. 비 오는 날, 아름드리나무의 그림자 속에서.

“내가 알아서 받으러 갈 테니까.”

빗소리에 가려져 잘 들리지 않던 목소리였으나, 그 말만큼은 정확하게 기억났다.

“설마…… 오늘이 칠 월 십칠 일이에요?”

“응.”

제 생일을 잊은 애리얼을 보면서도 그는 기분 나쁜 기색이 전혀 없었다.

애리얼만 허둥거리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가 백작저로 올 줄 알고 선물이고 뭐고 다 백작저에 준비를 해 뒀는데.

“어, 어떻게 제가 여기 있는 걸 아시고……?”

“감으로.”

“감으로…… 요?”

“농담이야.”

그는 정말 농담이라고는 하나도 모를 것 같은 무뚝뚝한 얼굴로 농담이라 말했다.

애리얼은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서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녀를 따라 슬쩍 입꼬리를 올리는가 싶던 레이신이 방 안을 천천히 훑었다. 값비싸지만 부담스럽지 않은 것들로 채워 넣은 방.

“백작저에도 황성에도 없었으니까, 여기일 거라고 생각했어.”

내부를 한 바퀴 빙 돌며 훑은 한 쌍의 금안이 애리얼에게 와서 멈추었다.

“정답이었네.”

“아, 그런데 저…… 서하의 선물은 지금 백작저에 있습니다.”

이제야 상황이 파악되어 애리얼은 못 한 말을 쏟아 냈다. 그에게 줄 선물은 지금 여기에 없으며, 무엇보다도 이곳이 그에게 호의적인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그보다 여기 계시면 대공자 저하께서……!”

“알아.”

그가 차분하게 말했다.

애리얼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는 지금 무단으로 대공저에 침입해 있었다. 그의 방문을 렉시우스가 허락했을 리 없으니까. 그러니 레이신은 지금 죄를 짓는 거였다. 물론 그의 계급이 있으니 실제로 형벌을 받지는 않겠지만, 어쨌건 위험한 행동이 아닌가.

복잡한 표정의 애리얼을 보면서도 레이신은 몹시 태연했다.

“그냥 생일 축하 받고 싶어서 왔어.”

무덤덤한 말투. 무구하게마저 느껴지는 그의 얼굴이 애리얼을 향했다.

애리얼은 그를 바라보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생일 축하드립니다, 서하.”

“그거 말고, 이름으로 불러 줘.”

“성함으로요?”

“내 이름, 레이야.”

“레이신…….”

“레이라고 불러.”

그는 애칭을 이름이랍시고 위장해서 요구했다.

애리얼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래도 그의 생일이니 그가 원하는 대로 해 주는 게 좋지 않을까. 하물며 불법 침입 같은 짓까지 자행하며 원하는 일이 아닌가. 들어주지 않으면 대공저를 떠나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레이…….”

우우우웅-

어렵사리 그의 이름을 입에 담은 순간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소름 끼치게 들리는 진동음과 함께, 공중에서 장신의 사내가 나타났다. 숙련된 암살자처럼 정확하게 레이신을 노리고서 손을 뻗었다.

레이신은 반응이 한참 늦었다. 하필이면 애리얼이 제 이름을 부른 순간에 홀려 있었기에.

허공에서 떨어진 남자가 레이신을 덮쳤다. 목을 틀어쥐고서 밀어 몸을 무너트리고 그대로 그 위에 올라타 제압했다. 그의 움직임에 레이신의 머리칼이 휘날렸다. 엉성하게 땋은 진한 색의 금발이 바닥으로 흐트러졌다.

단숨에 레이신을 제압한 자는 당연하게도 렉시우스였다.

“선배!”

애리얼의 놀란 목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렉시우스는 그녀를 보지 않았다. 제 아래에 깔린 레이신의 면상만 주시하며 이를 갈았다. 자신과 같은 색의 노랗게 빛나는 금안. 이 순간만큼은 끔찍하게 증오스러운 친우의 얼굴.

“대공저에서 밀회라니, 대담도 하네.”

레이신의 목을 조르며 조소하던 렉시우스가 고개를 돌려 애리얼을 쳐다보았다.

“나 열받으라고 일부러 이러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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