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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96)화 (184/264)

애리얼은 경악하여 입을 벌린 채 있다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럼 이놈이 몰래 침입한 거네?”

“선배, 내가 설명을…….”

렉시우스가 다가오려는 애리얼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그대로 서 있으라는 무언의 압박임을 애리얼도 모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녀가 경직된 순간 렉시우스는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애리얼 놀랐겠다. 내가 빨리 치워 줄게.”

렉시우스가 레이신의 목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팔뚝에는 시퍼렇게 핏줄이 섰다. 그러자 그 무심하던 표정에 금이 갔다. 레이신이 눈썹을 찡그리며 팔을 들어 그의 옆구리를 눌렀다. 상처가 가장 깊은 곳이었다.

렉시우스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고서 팔의 힘을 살짝 풀었다. 레이신의 마력이 느껴졌다. 곧장 물러나야 했는데, 그는 고집인지 자만인지 레이신에게 행한 제압을 풀지 않았다.

그게 실수였다.

“다쳤네, 너.”

레이신의 차분한 저음이 그의 약점을 선득하게 까발렸다. 깊게 베여 여전히 아물지 않은 부분을 지그시 누르며 공격술을 터트렸다.

금색의 섬광이 터지며 스파크를 일으켰다.

파지지직!

불로 지진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허억, 렉시우스는 비명을 지르는 대신 헛숨을 들이켰다. 열기와 고통에 반쯤 회전하다시피 날아가 뒤쪽의 벽에 박혔다. 어떻게 치명상은 피했으나, 이미 다친 상처가 벌어지며 피가 터졌다. 바닥으로 피가 후드득 뿌려졌다. 셔츠는 이미 핏물로 벌겋게 물들었다.

애리얼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확장되어 렉시우스를 담았다. 피에 젖은 셔츠.

짙은 혈향이 진동한다.

“……선배?”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힘이 풀리려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그에게 다가갔다.

얼마나 다친 거지?

걱정에 휩싸여서 그에게 손을 뻗는데, 레이신이 그녀의 손목을 턱 붙잡아 세웠다.

“애리얼, 렉스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레이신은 당혹스러운 소리를 했다. 애리얼도 짚이는 구석이 없는 건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우레우스의 부재와 의중을 알 수 없는 렉시우스의 행동. 묘하게 협조하는 대공비의 태도와 정체불명의 계획.

그녀도 불안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당장은 렉시우스의 상처를 수습하는 게 먼저였다.

“일단은 치료부터 끝내고 이야기하는 게 좋겠습니다, 서하.”

“내 말, 들어.”

레이신은 평소와 다르게 진지한 낯을 하고 있었다. 목소리에도 잔뜩 힘이 들어갔고, 분위기는 처음 만났을 때를 연상케 했다. 무겁고 서늘하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애리얼이 멈칫거리며 정지했다.

레이신이 애리얼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렉스는 너한테 맹세…….”

“그걸 말하면 안 되지, 레이.”

장난스러운 말투, 그래서 더 오싹한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벽에 기대 있던 렉시우스가 어느새 접근해 레이신의 어깨를 붙잡고 있었다. 낮게 웃으며 레이신을 바라보는 그는 정말로 정신이 나가 보였다.

“그러니까, 레이.”

렉시우스가 레이신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뼈를 으스러트릴 듯한 악력이었다. 그럼에도 미동도 하지 않던 레이신이 강한 마력의 기운에 눈살을 찌푸렸다.

렉시우스의 입이 완연한 곡선을 그리며 벌어졌다.

“그만 입 닥치고 나가.”

그 말과 함께 레이신의 모습이 사라졌다. 렉시우스가 순간 이동으로 내보낸 것이다.

이제 불청객은 사라졌다. 남은 건 애리얼과 렉시우스, 둘뿐.

렉시우스는 두 발짝도 안 되는 거리에서 애리얼을 주시했다. 금빛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났다.

애리얼은 겁을 먹고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그 순간 그의 코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허억, 거칠게 호흡하며 벌린 입에서도 핏방울이 튀어나왔다.

상처가 터진 와중에 이루어진 강제 순간 이동으로 마력이 역류했다.

렉시우스는 피를 흘리며 휘청거렸다.

애리얼이 화들짝 놀라선 그에게 다가갔다. 상처를 건드리지 않게 조심하며 그를 끌어안다시피 해 부축했다.

“선배…….”

벌벌 떨리는 음성으로 그를 부르니, 그가 킬킬 웃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축 늘어져 있던 팔을 들어 애리얼을 꽉 안았다.

애리얼은 흠칫 놀라면서도 그를 뿌리치지 않았다.

그는 지금 심하게 다쳤다.

“선배, 치, 치료를……. 많이 다친 거 같아. 빨리 의사를……!”

“애리얼.”

그가 나지막하게 소곤거렸다.

“넌 참 정이 많아.”

“선배, 지금 그런 소리 할 때가 아니야. 빨리 누구라도 도와줄 사람을…….”

애리얼은 그를 부축한 채로 조심스레 팔을 뻗었다. 테이블에 있는 호출 벨을 누르면 시녀, 일레나가 와 줄 것이다.

그러나 렉시우스는 뻗어진 그녀의 손을 붙잡고 제 쪽으로 당겼다.

“아무도 필요 없어.”

“선배, 지금 심하게 다쳤어. 도움이 필요해.”

“황실에서 붙여준 황성의도 못 고쳤는데 대공저의 것들이 무슨 도움이 된다고.”

“……뭐? 황실……? 황성의?”

“애리얼.”

음산하게 느껴지는 그의 저음이 잊고 있던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애리얼은 몸을 경직시키며 그를 살폈다.

렉시우스가 애리얼의 손목을 붙든 채 그녀에게 기대었던 상체를 일으켰다. 시뻘겋게 핏물에 젖은 셔츠. 터진 단추 사이로 길게 그인 상처가 보였다. 척 봐도 깊었다. 피가 멈추지 않고 흘렀다.

스멀거리는 위기감마저 한 번에 날려 버리는 끔찍한 상처.

“선배…….”

“이거 레이한테 그여서 생긴 거 아니야. 그 자식 때문에 좀 터지긴 했지만, 그 전부터 있었던 상처거든.”

그의 설명에 애리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체 언제 다쳤단 말인가.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의 몸에 상처는 없었다. 가운 사이로 본의 아니게 보았던 그의 상체는 조각상처럼 깨끗했었다. 그런데 이런 상처라니…….

“대체 언제 다친 거야?”

“네가 대공저에 온 날.”

“하지만 그때 선배는…….”

“마법으로 위장하고 다녔어. 계속 낫질 않아서.”

“어째서…… 왜 낫질 않는 거야? 선배는…….”

“저주에 걸린 거라서, 내 마력으로도 치료할 수 없는 상처거든.”

저주.

그 말에 애리얼은 눈에 띄게 몸을 굳혔다.

저주는 어지간한 힘으로는 다룰 수 없는 상위 술식 중에 하나였다. 신성 마법 바로 아래 등급인 특수 마법,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1, 2계에 해당하는 마법이다. 그런 마법을 다룰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았다. 심지어 그를 이렇게까지 다치게 할 수 있는 이는 손에 꼽을 터.

“누가 했는지 궁금해?”

그녀의 마음을 알아챈 듯 그가 속삭였다.

“누, 가 그랬는데?”

애리얼은 더듬거리며 물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치솟았다. 들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애리얼의 동요를 느낀 렉시우스가 픽 웃었다.

“글쎄, 누구일까.”

그는 답변하지 않았다.

애리얼은 묘한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커다란 불안감에 잠겼다. 그가 답변을 하지 않은 탓에 의심의 싹이 텄다. 렉시우스에게 이런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사람은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적다.

그것도 렉시우스에게 원한이라도 느끼는 양 저주까지 걸 인간은…….

애리얼의 얼굴이 혼란으로 물들었다.

렉시우스는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양손을 놓고 물러났다.

“방이 더러워졌네.”

“……어?”

“치워 줄게. 오늘은 다른 방에서 자.”

허공을 보던 애리얼의 눈이 그에게 향했다. 그러나 그는 그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무심한 얼굴로 테이블의 호출 벨을 눌러 시녀를 불렀다.

급히 달려온 일레나는 피투성이인 대공자를 보고 경악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이어진 대공자의 명에 빠르게 이성을 찾았다. 즉시 하녀와 시종들을 불러 모아 방을 치우게 하고 애리얼을 새 객실로 안내했다. 바로 옆방이었다.

애리얼은 왜 굳이 바로 옆방을 주는지 의문이 들었다. 문제가 생겨서 객실을 바꿀 때는 보통 층까지 바꿔서 내어 주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다시 같은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는, 일종의 성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일레나는 애리얼에게 옆방을 안내했다. 시녀이기에 관례에 대해 잘 알 텐데 말이다.

애리얼은 이 상황이 의문스러웠다. 하지만 바빠 보이는 일레나에게 차마 말을 붙일 수는 없었다. 순응하듯 옆방의 열린 문으로 슬그머니 고개를 밀어 넣었다. 원래 머물던 방과 큰 차이는 없었다. 다만 가구의 종류가 조금 달랐다.

“다른 데로 바꿔 줘?”

뒤에서 불쑥 울리는 목소리에 애리얼은 고개를 돌렸다.

렉시우스가 여전히 피에 젖은 셔츠를 입은 채 애리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양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서 심드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선배, 몸은…… 괜찮은 거야?”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렉시우스는 그녀의 걱정을 잘라 내고는 은근슬쩍 상체를 숙였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귓가에 가까워졌다.

“그리고 오늘 일은 내일 마저 얘기하자.”

은근한 압박감이 느껴지는 어조였다.

애리얼은 오싹한 기분을 느끼며 몸을 움츠렸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도 렉시우스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무심하게 몸을 돌리고는 복도를 빠져나갔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에 애리얼은 불현듯 떠올렸다. 자신은 지금까지 그에게 감시당하고 있었다. 옆방을 내어 준 것도 감시에 차질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일 거다.

그가 심하게 다친 것 때문에 그에 대한 의심을 잊고 있었다.

뒤늦게 레이신이 경고하던 말들이 떠올랐다.

“렉스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애리얼은 섬찟한 기분으로 지나간 대화를 곱씹었다.

‘그리고 또 뭐라고 했더라?’

“렉스는 너한테 맹세…….”

맹세.

‘무슨 맹세?’

애리얼은 등허리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레이신은 뭘 알려 주려고 했던 걸까. 렉시우스가 필사적으로 끊어 버렸던 그 뒷말이 대체 뭐였을까.

답을 알 수 없는 고민이었다. 애리얼은 점점 초조함을 느꼈다.

대공저가 감옥처럼 다가왔다.

이제 내일이면 대공비가 온다.

그러면 상황은 좋아질까? 아니면 나빠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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