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감에 애리얼은 황급히 새 객실로 숨어들었다. 어차피 이곳도 대공저인 건 마찬가지이지만, 대공저의 사람들을 보지 않고 홀로 있을 수 있었다. 그래서 약간이지만 마음이 놓였다.
대공저의 사람은 믿을 수 없었다. 백작저의 사람들은 도움을 구하기엔 너무 힘이 없었다.
애리얼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휴대폰을 켰다.
『공략 대상이 멀리 있습니다.』
『레이신 디 솔렘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과 깊은 관계가 되고 싶어 합니다. 당신을 쫓아다니고, 붙잡고 싶어 합니다.)
▷현재 위치: -(거리가 멀어 정확한 추적이 어렵습니다.)』
그나마 믿을 만한 레이신의 창을 띄웠으나 보자마자 한숨만 났다. 렉시우스가 어디까지 날려 보낸 건지 대략적인 위치조차 표시되지 않았다. 그러니 레이신의 도움도 바랄 수 없었다.
애리얼은 휴대폰을 끄고는 양손에 이마를 묻었다.
‘선배는 대체 뭘 하려는 생각이지?’
아는 지식을 전부 동원해도 ‘맹세’와 관련된 정보가 떠오르지 않았다. ‘맹세’의 사전적 정의만 떠오를 뿐, 그 맹세가 어떻게 제게 해가 될지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대비가 어려웠다.
애리얼은 제 상식이 지나치게 얕은 것에 절망했다. 이 세계에 오고서는 마력과 마법에 관해서만 열심히 공부했지, 다른 지식은 별로 얻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특히나 사교계의 예절이나 사회적 관습에 대해서는 아는 게 적었다.
어쨌든 확실한 건, 렉시우스가 ‘맹세’라는 걸 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대공비도 거기에 가담하고 있다는 것.
‘하지만 우레우스는…….’
애리얼은 마지막으로 본 우레우스의 모습을 떠올렸다. 저녁 식사가 이루어지던 만찬장에서, 그는 화기애애한 대공비와 대공자가 탐탁지 않다는 듯 성을 내고 나가 버렸었다.
그 뒤로 애리얼은 그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아마도 우레우스가 그들이 준비하고 있는 계획에 협조적이지 않기 때문에 배제된 것이 아닐까.
‘하지만 우레우스는 대공가의 차기 가주가 될 거라고 그랬는데…….’
심지어 렉시우스가 직접 말했었다.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그로써 애리얼은 두 가지 정도의 가정을 도출해 수 있었다.
우레우스는 후계자이기에 가혹한 처사를 받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렉시우스는 제 지위를 어느 정도 포기했다. 이게 ‘맹세’라는 것과 연관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애리얼이 할 수 있는 추측의 끝이었다.
맹세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자신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지는 제대로 알아내지 못했다.
밤이 깊어지도록 머리를 굴리느라 잠드는 것만 늦어졌다.
***
다음 날, 애리얼은 일레나가 깨우는 소리에 비몽사몽 일어났다. 이미 정오가 넘은 시각이었다.
일레나는 테이블에 점심을 차려 준 뒤 조용히 물러갔다.
애리얼은 대충 눈을 비비고는 잠옷 차림으로 테이블에 앉았다. 폭신한 달걀에 은은히 풍기는 버터 향이 식욕을 자극했다. 방금 일어났음에도 곧장 포크를 들게 할 정도였다.
그렇게 잘 익은 오믈렛을 잘라 입에 넣는 순간에 소음이 울렸다.
똑똑.
애리얼은 포크를 물고서 고개를 돌렸다.
렉시우스가 열린 문에 기대서서 제 쪽을 보고 있었다. 놀란 나머지 입이 벌어졌다. 덩달아 손까지 느슨해지며 포크가 카펫으로 툭 떨어졌다.
그가 무심하게 걸어와 떨어진 포크를 주웠다.
“칠칠치 못하게 뭐 이런 걸 흘리냐.”
애리얼은 그제야 입을 다물고서 바보 같던 표정을 갈무리했다. 창피해서 뺨이 화끈거렸다.
렉시우스는 포크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애리얼의 맞은편에 앉았다. 호출 벨을 눌러 하녀를 부르더니 커틀러리를 새로 바꿔 오게 시켰다.
금세 새 커틀러리가 애리얼의 앞에 놓였다.
하지만 애리얼은 입맛이 뚝 떨어진 상태였다. 그와 마주하자 어제의 일이 떠올라서 긴장됐다. 음식이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멀뚱멀뚱, 음식을 보고만 있었다.
렉시우스는 애리얼을 못마땅하게 응시했다. 기껏 포크도 새걸로 바꿔 줬는데, 보고만 있으니 기가 찼다.
“안 먹어?”
“응……. 일어난 직후라 입맛이 없네.”
“아까는 잘만 먹더니.”
“…….”
“먹여 줄까?”
“아니.”
애리얼의 거절에도 그는 막무가내로 포크를 쥐었다. 오믈렛의 가운데를 잘라 쿡 찍더니 상체까지 숙이며 다가왔다.
“자, 아-”
“괜찮아.”
애리얼은 단호하게 그의 손을 밀어냈다.
렉시우스는 아니꼬운 듯 눈썹을 치키다가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녀에게로 한껏 기울였던 상체도 물렸다.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서 다리를 꼬았다. 하얀 셔츠에 매끈하게 다려진 검은색 바지가 단정한 선을 그려 냈다.
애리얼은 저도 모르게 그를 훑다가 제 차림을 인지했다. 멀끔한 차림의 렉시우스와 달리 아직 잠옷 차림이었다. 여름용 잠옷이라 원피스의 천이 좀 얇았다.
“……선배, 나 옷 좀 갈아입을게.”
“오래 얘기 안 할 거야.”
“그래도 좀…….”
“왜, 부끄러워?”
그가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괜히 말씨름만 길어질 것 같아서 애리얼은 그냥 고개를 저었다. 그가 더 꼬투리를 잡기 전에 주제를 돌렸다.
“그래서 무슨 얘긴데?”
“무슨 얘기긴, 어제 일 얘기지.”
“아…….”
“오늘 얘기하자고 했잖아. 그새 까먹었어?”
“아니.”
그것 때문에 어젯밤 내내 고뇌하느라 머리를 싸맸다. 그 탓에 이렇게 늦게 일어나서 이제야 아침 식사를 하는 거고.
애리얼은 피에 절어 있었던 그를 떠올리며 슬쩍 시선을 움직였다. 마법으로 위장한 건지, 그의 외관은 멀쩡하게만 보였다.
“선배, 몸은 괜찮아? 상처는?”
“그건 네가 신경 쓸 필요 없고.”
그는 상처에 대해서는 한사코 그녀의 관심을 거절했다.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애리얼도 더 묻지 않기로 했다.
누가 그에게 그런 상처를 입혔는가는 아직도 오리무중이었다. 데본시아, 스카이라의 얼굴이 머릿속을 차례로 스쳐 지났다. 혹시 다른 외국의 마법사도 그를 다치게 할 수 있었을까.
한참 범인을 추측하는데 이상하게도 스카이라만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가 뭐든, 그가 그렇게 잔혹한 짓을 벌였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더 생각하지 말자.’
애리얼은 복잡한 걱정들을 뿌리치고서 입을 열었다.
“어제는…….”
“레이가 혼자서 침입한 거지? 알아. 넌 아무 잘못 없는 거.”
“…….”
“딱히 레이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야.”
“그럼 무슨 이야길 하려고 온 거야?”
“맹세.”
그 단어가 나오자마자 애리얼은 마른침을 삼켰다.
렉시우스는 읽기 어려운 무덤덤한 표정을 하고서 말을 늘어놓았다.
“넌 나랑 엮이고 싶어 하는 동시에 깊은 관계가 되기는 싫어해. 놓치면 안 되지만 너무 가까운 것도 안 돼. 감정은 없고, 나한테 바라는 것도 없어.”
그는 줄줄 애리얼의 속을 다 까발렸다. 그의 말에는 틀린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애리얼은 식은땀이 날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게 나쁘다는 건 아냐.”
렉시우스는 추궁하듯이 말해 놓고는 다시 용인하는 투를 취했다. 애리얼은 그의 속내를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와 눈을 맞추고 세심하게 그의 표정을 살폈지만, 그의 의도를 짐작도 하지 못했다.
앞에서 그가 말한 것들이 대체 맹세와 무슨 연관이 있다는 걸까.
“선배는…… 나한테 뭘 원하는 거야?”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그는 무미건조하던 낯에 갑자기 미소를 띄웠다.
“너한테 원하는 게 아니야. 내가 하겠다는 거지.”
“……뭘? 맹세를?”
애리얼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렉시우스는 꼬았던 다리를 풀고 일어났다. 천천히 애리얼에게로 다가와서 그녀가 앉은 의자 팔걸이를 잡고서 상체를 숙였다. 그의 빳빳한 셔츠에서 비누 향이 풍겼다. 청량하고 조금은 소박하기도 한 향기인데 그마저도 위압적으로 다가오는 건 왜일까.
애리얼은 어깨를 움츠렸다.
그는 애리얼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조용히 말을 전했다.
“애리얼,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줄게.”
무엇을 말인가.
입이 벌어졌으나 말이 나가지 않았다.
그는 어차피 이 이상은 말해 주지 않을 거라는 듯 픽, 웃음을 흘렸다.
***
그날 오후, 애리얼은 대공비와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귀환한 대공비는 오래 대공저를 비워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애리얼은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식사 분위기는 별로 화기애애하진 않았다.
애리얼은 대공비의 존재가 이전처럼 편안하지 않았다. 솔직히 두려운 쪽에 가까웠다. 렉시우스가 말한 맹세가 무슨 의미인지 아직도 모르는 탓이 컸다. 어떤 의식인 걸까.
애리얼이 넌지시 대공비에게 물었으나 그녀는 말을 돌렸다. 그 비슷한 주제만 나와도 대공비는 모르는 체를 했다. 그래서 애리얼은 다른 걸 물었다.
디저트로 산딸기를 올린 우유푸딩이 올라왔을 때였다.
“최근 공자 서하를 뵙지 못했는데, 혹시 다른 지역에 가신 건가요?”
“공자면…… 우레우스 말이니?”
“네.”
“우레우스는 잠시 휴양지에 갔어. 최근 수업이 많이 늘어서 스트레스를 받는 거 같았거든. 그 왜…… 식사에서도 굉장히 무례한 모습을 보이고 그랬잖니. 좀 쉬는 게 좋겠더라고.”
“아…… 그랬군요.”
애리얼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비의 논리에 모난 구석은 없었다. 최근 우레우스를 후계자로 세우기로 했다고 하니 수업이 많아졌을 테고, 우레우스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 수업을 잠자코 감내하기는 어려웠을 거 같고.
‘그런데 왜 이렇게 꺼림칙하지?’
애리얼은 괜히 풍경을 보는 척 창밖을 살폈다. 널따란 창문으로 노을에 물든 정원이 보였다. 성벽에 가로막힌 정원의 끝, 잔디밭 아래에 있을 공간이 떠올랐다. 휴대폰 속에 보였던 정체불명의 원형 공간. 그곳이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
***
그 후로 몇 주는 평온하게 지나갔다. 대공비가 돌아오면 큰 변화가 있을 거라 긴장했던 게 무색했다.
애리얼은 휴양이라도 하듯 대공저에서 편안한 생활을 보냈다. 대공저의 사람들은 그녀에게 그 무엇도 강요하지 않았다. 대공저의 어딜 돌아다녀도 제지하지 않았다.
렉시우스의 감시도 줄어들었다. 그래서 이제는 종종 접근 알림이 울렸다. 전처럼 온종일 밀착해 있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게다가 그는 바쁜 건지 외출도 잦았다.
대공비 역시 대공저의 업무를 보느라 자주 만나기 어려웠다.
애리얼은 자연히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팔월의 중순에 접어드는 쾌청한 날. 애리얼은 정원을 거닐다가 나무 그늘에 놓인 벤치에 풀썩 앉았다. 감시가 줄어든 틈을 타 대공저의 원형 공간을 찾겠다고 나선 지 며칠째. 휴대폰 덕분에 그 위치는 정확하게 찾아냈지만 입구를 찾아내지는 못했다. 도대체 어디로 들어가는지…….
한숨이 길게 나왔다.
감시는 느슨해졌고, 어딜 가든 제재하는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애리얼은 대공저를 나가는 것만큼은 하지 못했다. 두꺼운 결계가 쳐진 성문을 도저히 넘을 수가 없었다.
여름 휴학기 때 오라더니, 맹세인지 뭔지 그 정체도 모를 걸 강요하기 위해서였나.
재차 푹 한숨을 쉬는데 멀리서 일레나가 급히 뛰어오는 게 보였다.
“공녀님! 백작저에서 급한 용건으로 전화가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