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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98)화 (186/264)

시녀는 어지간해선 뛰지도, 큰 목소리를 내지도 않아야 했다. 언제든 침착하고 예절 바르게. 그게 시녀로서 지녀야 할 덕목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일레나는 그 두 가지 덕목을 전부 어기고 있었다. 정말로 급한 일이라는 뜻이었다.

애리얼은 급히 일어나 그녀를 따라갔다. 일레나는 곧장 1층 응접실로 안내한 뒤 수화기를 건네주고는 물러났다. 여타 사용인들도 전부 물러났다.

완전히 혼자가 되자 애리얼은 조용히 수화기에 귀를 댔다.

“여보세요.”

-애리얼.

오랜만에 듣는 백작의 목소리였다.

“어머니, 급한 일로 전화하셨다고 들었어요.”

-그래. 급한 일이지.

그렇게 말하고 백작은 한 번 숨을 들이켰다. 용건이 보통 무거운 게 아닌 모양이었다.

애리얼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황성의 일이다. 황자 저하께서 직접 백작저에 연락하셨다.

올 것이 왔구나.

애리얼은 눈을 질끈 감았다. 예의 황자비 건으로 확답을 받을 생각인 거였다. 이미 각오한 사안이었고, 이제는 정말 거절을 말할 때였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자초지종을 설명해야 할까.

-애리얼.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백작의 목소리가 작게 떨리고 있었다. 어지간한 일로는 이런 동요를 내비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스카이라의 말이 그렇게 충격이셨던 걸까.

애리얼은 묘한 불안감이 엄습하는 걸 느끼며 입을 열었다.

“네, 어머니. 말씀하세요.”

-……네가 황자비로 지정되었다.

“……네? 그게 무슨…….”

머리가 하얗게 소각되는 것 같았다. 멍하니 되물었으나 상대 쪽에선 대답이 없었다.

“그러니까…… 지정이 되었다고요?”

-…….

“어머니?”

재차 묻자 백작이 겨우 입을 열었다.

-황자 저하께서 너를 직접 지정하셨다고 하는구나.

“제 의견을 묻지도 않고요?”

-나에게도 그냥 통보하셨다.

백작의 착잡한 목소리에 눈앞이 아찔하게 흔들렸다.

애리얼은 수화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면 저는 이제 황자비가 되어야만 하는 건가요?”

-황제 폐하의 직인까지 찍힌 모양이다. 우리에게 거부할 권리는…… 없는 것 같구나.

“그런, 그럴 리가……. 하지만……!”

황제의 직인이 찍혔다는 건 황제도 이 일에 찬성한다는 것인데, 그럴 리는 없다. 그녀를 특별 감시 대상으로 경계하던 이가 바로 황제였다. 그런 황제가 별다른 검증도 하지 않고 그녀를 곧장 황족으로서 황성에 살게 할 리 없지 않은가.

하물며 데본시아조차 아무런 훼방을 놓지 않았다니, 믿을 수 없었다. 스카이라의 것은 뭐든지 빼앗아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이 아니었나……. 더군다나 하트도 다섯 개인데. 제가 황자비가 되는 데 그가 찬성했을 리가 없는데…….

머리가 어지럽게 꼬였다.

그 와중에 떠오르는 특별 엔딩의 조건이 그녀를 절망감에 빠트렸다.

『*그 어떤 공략 대상과도 깊은 인연을 맺지 않은 상태여야 합니다.』

그런데 황자비라니.

아무리 강제여도 결국은 스카이라와 결혼이라는 깊은 연을 맺는 꼴이다.

‘그럼 이제 특별 엔딩은?’

기억은?

진짜 가족은?

집에는?

어떻게 돌아가?

눈앞이 깜빡거리며 점멸했다.

“…… 아! ……! ……!”

기억 속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이제 그게 누구의 목소리인지 평생 모르게 될 것이다.

기절해 버릴 것만 같다.

사지에서 힘이 쭉 빠졌다.

헐거워진 손가락 아래로 수화기가 스르르 빠져나갔다.

-……애리얼?

추락하는 수화기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애리얼?

백작이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그녀는 응답하지 않았다.

‘그건 내 이름이 아니야. 내 진짜 이름은 다른 거야…….’

멍하니 그 생각을 반복했다. 원래 이름조차 모르면서.

“어차피 돌아갈 수 없는데, 그냥 여기서 살아.”

스카이라의 목소리가 뇌리를 잠식했다. 그건 어쩌면 다가올 미래였던 걸까. 예정된 일이었나.

사위가 까맣게 잠기는 것 같았다.

절망하여 심신이 무너졌다. 뒤에서 잡아 주는 이가 없었다면 기어코 바닥에 쓰러졌을 것이다.

애리얼은 제 허리를 단단히 붙잡는 팔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렉시우스가 수화기를 들고서 백작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언제 온 걸까. 접근 알림이 울리지 않은 걸 보아 하니 오늘은 계속 가까이 붙어 있었던 듯했다.

“이제 진행해도 불만 없겠지?”

렉시우스가 말했다. 무엇을 진행한다는 소리인지.

수화기 너머 백작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거부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렉시우스가 기분 좋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럼 그때 보도록 하지, 백작.”

짧은 대화를 마치고서 그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애리얼은 아무래도 좋다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렉시우스는 해사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기쁘게 웃고 있었다. 애리얼을 단단히 부축해 안은 그가 즐겁게 말을 꺼냈다.

“네가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싫어할 줄은 몰랐거든.”

“…….”

“생각보다 기분이 좋네.”

그는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멍하게 그를 바라보던 애리얼이 입을 열었다.

“선배는 알고 있었어?”

“어, 이럴 거 같았어. 마지막에 본 스카이라의 눈이 제대로 돌아 있었으니까.”

그의 답변에 애리얼은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스카이라였구나.’

렉시우스의 몸에 상처를 입히고 저주를 건 장본인.

아니길 바랐으나 결국 그였다. 데본시아도 아니고, 그였다.

애리얼은 가슴이 아팠다.

스카이라를 잔혹하게 만든 것이 자신 같았다.

……아니, 같은 게 아니라 필시 그럴 것이다.

무너질 듯 흐느적거리는 애리얼을 렉시우스가 억지로 일으켰다. 애리얼은 간신히 다리에 힘을 주고서 섰다.

그가 기운 빠진 애리얼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우울하냐?”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

“황자비가 되기 싫다는 소리지?”

애리얼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가 환하게 느껴질 정도로 밝은 웃음을 지었다.

“알았어.”

애리얼은 꺼림칙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를 거부하거나 할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그가 남은 동아줄처럼 생각되었다. 최악과 차악(次惡)이 있다면 기꺼이 차악을 택하는 게 맞았다.

그게 황자비가 되는 걸 막을 구실이 된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 맹세인지 뭔지가, 구실이 될 수 있다면.

***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아리앨라가 꽤 큰 목소리를 냈다.

소파에 늘어져 있던 휘아킨이 가늘게 눈을 떴다. 본관에 들어가지 않고 별채에서 날백수처럼 지낸 게 며칠째더라.

그는 아리앨라가 귀찮게만 느껴졌다. 대답도 없이 모로 돌아눕자 아리앨라가 소파 등받이 너머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관심 없으세요?”

“없어요.”

“하지만 제 사촌의 이야기인데요?”

아리앨라가 슬쩍 그를 떠보았다. 휘아킨은 자존심이 상하는 걸 느끼면서도 순순히 관심을 드러냈다. 상체를 일으키며 부스스해진 뒷머리를 쓸어내렸다.

“말해 봐요.”

“제 사촌이 황자비로 지정되었어요.”

휘아킨은 미간을 와락 구기려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애리얼의 선택인가, 아니면 황자의 강요인가.

“저한테 이런 걸 왜 말해 주는 건데요?”

“듣지 않는 게 좋았어요? 전 공자님께서 궁금해하실 줄 알았는데요.”

틀린 말은 아니어서 휘아킨은 입을 꾹 다물었다. 애리얼의 일이라면 뭐든 궁금증이 일었다. 그리고 그만큼 나쁜 소식에도 민감했다. 황자비가 된 애리얼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짜증이 치솟았다. 그는 소파에 몸을 풀썩 눕히고 눈을 꽉 감았다.

황자의 결혼식 날 식장에서 온갖 깽판을 친 다음 애리얼에게 입을 맞춘 뒤 콱 죽어 버리고 싶었다.

할 수 있는 게 그 정도뿐이라 아쉬웠다.

마저증이라는 저주받은 체질에 이가 갈렸다.

휘아킨이 파괴적인 상상으로 도피하는 사이 아리앨라가 또 말을 걸었다.

“아직 하나 더 있는데, 안 들으실래요?”

“뭔데요.”

휘아킨은 귀찮다고 느끼면서도 애리얼에 관해서는 착실히 관심을 드러냈다. 다시 반쯤 눈을 뜨고서 아리앨라를 쳐다보았다.

아리앨라는 의도를 알 수 없는 웃음을 짓다가 넌지시 알렸다.

“대공자 저하께서 제 사촌에게 충성의 맹세를 하실 예정이래요.”

그 말을 들은 순간 휘아킨의 낯이 엉망으로 구겨졌다. 어쩌면 황자비가 되는 것보다 더 불쾌한 결과가 도출될 수도 있었다.

“백작님은 대체 어디에서 그런 정보를 들었어요?”

“요즘 제 뒤를 봐주시는 분이 계시거든요. 그분의 측근으로 일하며 얻은 거죠.”

“이런 정보를 알고 있을 정도면 어지간히 높은 계급일 텐데요.”

“네, 그렇죠.”

“그런 사람이 준 정보면 기밀에 가까울 텐데, 저와 공유해도 괜찮나 봐요?”

“황자비 건은 공표한 거나 마찬가지여서 상관없어요. 후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제 고용주는 공작님이시니 그분의 아들이신 공자님도 아셔야죠.”

“이중으로 취업한 시점에서 믿음이 안 가는데요.”

그러자 아리앨라는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긴 하죠. 그런데, 그래도 제 주군은 공작님뿐인걸요.”

“그런 말은 기사들이 주로 쓰는 표현인데요. 그걸 마법사가 하니까 신뢰가 안 가네요. 마법사들이 하는 충성의 표현은 다른 말이지 않나요?”

시큰둥하게 대꾸하자 아리앨라는 또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끝내 마법사로서의 충성 표현은 꺼내지 않았다.

그 후로도 그녀는 다양한 이야기를 재잘거렸으나, 휘아킨은 한 귀로 흘려버렸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애리얼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대공자의 맹세도 황자의 결혼도 싫었다. 전부 파투 내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묘안이 없을까.

한참을 생각하다가 그는 몸을 일으켰다.

새로 개발된 마도구의 실용성에 관해 길게 설파하던 아리앨라가 말을 뚝 멈추었다.

휘아킨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저도 충성의 맹세나 할까 봐요.”

“하지만 그건 포기해야 할 게 많은데요.”

“가진 게 없는 저한테 딱 맞네요.”

“하지만 공자님…….”

“대공저에 갈 수 있나요, 백작님?”

“못 할 건 없죠. 없는데…….”

아리앨라는 난색을 보였다. 아무래도 상대가 대공자여서일까. 황성에도 당당히 침투했던 사람답지 않았다.

“공자님, 설마…… 충성의 맹세를 하실 건 아니죠?”

“그냥 구경만 하려는 거예요. 충성의 맹세라는 게 어떻게 이루어지는 건지.”

그래야 나중에 저도 써먹을 수 있을 게 아닌가.

휘아킨은 속내를 숨긴 채 순진하게 웃었다.

아리앨라는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모셔다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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