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저의 알현실.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내부는 거대하고 웅장했다. 붉은색 카펫이 깔린 끝에는 백은으로 된 의자와 백사자상이 보였다.
대공비를 비롯해 3대 공작가의 가주들이 의자 밑 계단에 도열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 대공자가 한쪽 무릎을 꿇고서 고개를 숙였다. 예를 갖춘 정갈한 자세임에도 불구하고 위압감이 넘쳤다. 위에 자리하는 것이 익숙한 이들이기 때문이어서일까.
반면 이 모든 이들을 제 앞에 세워 두고 의자에 앉은 이에게서는 정작 위엄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발견할 수 없었다.
긴장한 것이 확연한 딱딱한 표정, 바람에 쓰러질 듯 가냘픈 체구, 오만이라고는 모르는 처연한 눈동자.
이 자리에 가장 안 어울리는 이가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녀의 외모는 그 높은 자리가 아깝지 않도록 우아하고 아름다웠으나, 그녀는 가시방석에라도 앉은 것처럼 시종 조금도 태연하질 못했다. 애써 차분하게 가라앉힌 표정에서도 숨기지 못한 긴장감이 흘러나왔다. 겁먹은 것처럼 보여서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휘아킨은 쯧, 혀를 찼다. 누가 보아도 강제 같은 분위기였다. 이 의식을 엉망으로 만들고픈 욕구가 치솟았다. 위장하고서 일반 귀족들 사이에 숨어 애리얼을 보려니 짜증만 났다. 이게 뭐 하는 짓거린지.
“저 렉시우스 크레시앙은 오늘로써 대공자의 지위와 계승권을 포기하고서 이렇게 무릎을 꿇습니다.”
대공자의 목소리가 엄숙하게 알현실을 울렸다.
“제 주군이자 주인이 되실 분을 위해 모든 것을 뒤로한 채 고개를 숙입니다.”
숨 막히는 맹세문이 읊어지자 애리얼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하긴 누가 들어도 까무러칠 내용이었다. 전쟁터에서 십수 번이나 공을 세운 어린 영웅이 미래를 포기하고서 오직 한 사람을 위해 고개를 숙이는데, 그 누가 태연할 수 있을까. 그것도 대공자라는 지위를 갖춘 이가 저러다니. 네 번째 순번이기는 해도 황위 계승권이 있는 자가 아니던가.
충성의 맹세는 몰락한 가문의 기사들이나 행하는 거였다.
앞으로 있을 모든 명예와 지위를 포기하고 한 사람을 위해서만 충성을 다하는 것. 그게 충성의 맹세였다. 가진 것을 상당수 내려놓아야 하며 미래까지도 단절하는 행위였다. 귀족들 사이에서는 충성의 맹세를 노예 서약이나 다름없이 보았다. 충성의 맹세를 한 이는 결혼조차 할 수 없었다. 목에는 종속의 의미를 뜻하는 주인의 이름이 새겨진 마도구를 걸고, 오로지 맹세를 건 주인을 위해서만 살아가야 한다. 그걸 거부하면 마도구를 통해 저주를 받는다. 솔직히 치욕에 가까운 의식이었다.
그런 만큼 의식의 과정도 꽤 까다로웠다.
충성의 맹세를 하려면 주인보다 높은 계급의 증인이 1인 이상 필요했고, 맹세하는 이보다 높은 계급의 증인이 3인 이상 필요했다. 모두가 동의하고 맹세하는 이가 진심으로 순응할 것을 선언해야 비로소 의식이 이루어졌다.
애리얼이야 백작가의 공녀이니 그녀보다 높은 계급의 증인을 두는 데 문제가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인 백작이 와도 그만이었고, 사촌인 클라우스 백작이 해도 됐다.
문제는 대공자.
황후 자리가 공석인 지금, 그보다 높은 계급은 제국에 딱 넷밖에 없었다. 황제, 황태자, 대공, 대공비. 여기서 3인이 증인으로 참석해야 하는데, 가능할 리가 있나.
그래서 대공자는 제 계급을 버렸다. 제 동생을 대공자로 올리고 자신을 공자로 하락시켰다.
그래도 대공가의 공자이기에 증인을 모으기는 힘들었다. 종전의 4인에서 황자와 3대 공작가의 공작, 그리고 그 배우자들이 추가되었을 뿐.
렉시우스 크레시앙이 얼마나 높은 계급을 가진 사람이었는지, 또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했는지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것도 뛰어난 재능을 겸비하여 앞길이 창창한 미래의 대공이었는데.
그런데 대공자였던 이가 기어코 이 의식을 한다고?
하겠다는 걸 대공비가 말리지 않았다고?
대공가의 세력을 약화시킬 기회라고 생각한 3대 공작가의 가주들은 흔쾌히 맹세의 의식에 참석했으나 내심 저마다 충격에 잠겨 있었다.
휘아킨은 렉시우스의 뒷모습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창백한 안색으로 의자에서 일어난 애리얼이 렉시우스에게 걸어갔다. 그녀의 손에는 백은으로 된 초커가 들려 있었다. 겉면에는 그녀의 풀 네임이 쓰여 있을 것이다.
“거두겠다. 렉시우스 크레시앙, 너는 오늘부터 나의 권속이다.”
그녀는 간신히 떨지 않고 겨우겨우 말을 끝냈다. 그러나 렉시우스의 목에 초커를 걸 때는 손이 덜덜 떨렸다. 장내의 모두가 그녀를 이해했다.
감히 누가 대공자였던 이의 목에 저런 목줄과도 같은 치욕적인 물건을 걸 수 있단 말인가.
흑색 제복을 걸치고서 수많은 휘장을 단 사내. 대공가의 장남으로서 위엄을 지닌 그의 목에 치욕의 상징이 채워졌다. 그러나 은빛 목줄을 건 그는 조금도 치욕스러워하지 않고 기쁘게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영광입니다, 주인님.”
웩, 휘아킨은 헛구역질이 나서 입을 막았다.
그가 왜 충성의 맹세를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건 교묘한 공작이었다. 충성의 맹세를 마친 인간은 죽을 때까지 주인을 따라가야 했다. 오로지 주인만을 따라야 했다. 이제 그는 황명보다도 주인의 명을 우선해야 하는 처지인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주인은 죽을 때까지 맹세한 인간을 데리고 다녀야 한다는 소리다. 그건 주인이 결혼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충성의 맹세를 정부를 두는 데 이용하기도 했다.
렉시우스 크레시앙은 분명 그런 불순한 의도로 충성의 맹세를 한 것이리라.
‘대단도 하네.’
평생을 군림하며 살아온 오만한 귀족이 제가 가진 것을 죄 포기하고 머리를 숙일 정도의 감정이라니.
휘아킨은 솔직히 감탄했다. 소설에서도 이런 건 읽은 적 없었다. 한 사람의 곁에 있기 위해 대단히 많은 것들을 희생시킨 게 아닌가.
굉장한 순정이라고 생각해야 했으나, 그리 순수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타이밍이 이래서 그런 걸까.’
렉시우스 크레시앙은 하필이면 애리얼이 황자비로 지정된 이후 이런 의식을 벌였다. 그녀가 황자비가 되어도 그는 그녀의 곁에 당당히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황태자에게 압박감을 주는 형태가 될 것이다.
황자비로 지정된 애리얼은 자연히 황자의 세력이 될 터. 그 아래 종속된 렉시우스 크레시앙도 자연히 황자의 세력으로 분류된다. 아무리 대공자의 지위를 잃었다 한들 렉시우스 크레시앙은 전쟁 영웅이다. 뛰어난 재능을 지닌 그가 황자 쪽에 붙는 건 황태자에게 큰 위협이 될 것이다.
그러니 황태자는 애리얼이 황자비가 되는 걸 막으려고 들 가능성이 컸다. 충성의 맹세를 깨트리기보다는 황자의 결혼을 파기하는 게 더 쉬우니까.
어찌 됐든 애리얼은 이제 폭풍의 눈이 된 처지였다.
휘아킨은 애타는 눈으로 저 멀리 선 애리얼을 바라보았다. 렉시우스 크레시앙을 치우고서 제가 저 목줄을 차고 싶었다. 그녀를 감싸는 폭풍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마력도 없는 제가 뭘 할 수 있을까.
외동이라 가주를 포기하는 것이 불가능한 자신은 맹세도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가문 자체를 버리자니 마저증으로 결함의 지닌 자신의 존재가 더욱 초라해지는 느낌이었다. 이런 상태로 가문도 없이 맹세를 해봐야 애리얼에게 짐만 될 테고.
“하하…….”
허탈함에 마른 웃음을 뱉어 냈다. 그러자 옆에서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누군가 싶어 눈을 돌리니, 아리앨라가 보였다. 그와 비슷하게 위장한 모습이었다.
그녀의 눈은 심란해 보였다. 제가 모시는 공자님의 처지를 실감하여 동정이라도 보내는 것인지.
그는 씁쓸한 눈빛을 하며 멀리 선 애리얼을 보았다.
애리얼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기회도 없음을 안다. 그녀의 곁을 지키는 렉시우스 크레시앙 때문이다.
휘아킨은 그의 존재가 끔찍했다. 지위가 격하되었을지언정 힘을 잃은 자가 아니다.
이만 물러나야 할 순간이었다.
휘아킨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가요.”
아리앨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불쾌하기만 한 의식의 감상은 여기까지다.
***
휘아킨은 별채로 돌아와서 한동안 세면대만 붙잡고 있었다.
그는 마저증인 주제에 타인의 마력에 지나치게 예민했다. 순간 이동을 하느라 백작의 마력에 두 번이나 노출된 탓에 먹은 것도 없는 속이 울렁거렸다. 위액만 몇 번이고 토해 내서 식도가 쓰라렸다.
오늘 보고 느낀 것들도 이렇게 토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대충 물로 입을 헹구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희멀건 얼굴에는 뭐가 그리 불만인지 화가 가득했다. 휘아킨은 분노로 일그러진 제 얼굴을 노려보다가 수건으로 입을 닦은 뒤 터덜터덜 걸어 나갔다.
욕실 문 앞에 서 있던 아리앨라가 구토 억제제를 건넸다.
“그러다 식도가 해져서 저녁도 못 드시겠어요.”
“어차피 뭐가 넘어갈 것 같지도 않아요.”
휘아킨은 적당히 대꾸하고는 약을 삼켰다. 그렇게 터덜터덜 소파로 걸어가 눕더니, 뭔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백작님, 지금 황태자 전하의 밑에 계신 거죠?”
“티 났나요?”
그녀는 당황하지도 않고 대답했다. 슬며시 미소까지 지었다.
하기야 그녀를 고용한 게 황태자라는 건 당연한 추측이었다.
대공자가 지위를 포기하고서 충성의 맹세를 할 거란 정보를 아리앨라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황제는 몸져누웠고, 대공은 전쟁터에 나갔다. 대공비와는 만난 적도 없는 그녀다. 남은 건 황자 아니면 황태자인데, 황자가 그런 정보를 흘렸을 것 같지는 않았다.
황자는 아리앨라를 경계하고 멀리했다. 애리얼에게 해악을 끼칠 인물이라 보는 듯했다.
그 의심이 틀리지는 않았다. 마력이 몹시 강한 애리얼은 아리앨라의 눈을 돌게 하기에 충분한 존재였다. 실제로 그 강대한 마력을 꽃피울 수 있도록 파멸의 기원이라는 금지된 무기까지도 선뜻 제공했으니…….
아무튼 황자는 아리앨라를 꺼렸다. 그리고 애리얼에 대한 독점욕도 강했다. 만일 그가 오늘 있을 충성의 맹세를 알았다면, 분명 나서서 막으려 했으리라.
그러니 남은 것은 황태자.
다만 황태자가 왜 이런 정보를 아리앨라에게 말하고 그에게까지 전하도록 했는가.
“그 사람이 뭐라던가요?”
“황태자 전하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황태자님이요. 그 정보를 흘리면서 뭐라 하던가요?”
그렇게 묻자 아리앨라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왜 황태자 전하께서 이 정보를 흘리셨다고 생각하시나요?”
“내용이 너무 노골적이에요. 전부 제 룸메이트인 애리얼 허클리에 관한 내용, 그것도 황자와 대공자 같은 황족들과 엮이는 것들만. 딱히 누군가의 약점을 노린 내용도 아니고 일부러 저를 자극하려고 고르고 고른 느낌이 나서요.”
정답이었다.
황태자는 딱 그의 설명대로인 이유로 정보를 흘렸다.
아리앨라는 휘아킨의 통찰력에 조금 놀라서 순순히 사실을 전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공자님께 도움을 구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정보를 공자님께 전해 드리라고 말씀하셨어요.”
“무슨 도움이요.”
“그녀가 황자비가 되는 것도 싫고 그녀에게 전 대공자가 달라붙는 것도 싫은, 피차 같은 심정이 아니냐고. 그러니 함께 손을 잡는 게 어떠냐는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손을 잡아요?”
“네. 애리얼과 친밀한 공자님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하셨습니다. 중요한 이야기는 만나서 하자고도 하셨고요.”
아리앨라는 제가 전해 들은 것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도움이라니. 휘아킨은 피식 비웃음이 났다. 도움이 아니라 이용이겠지.
황태자는 제 감정을 아는 게 분명했다. 아리앨라를 통해 들었든지, 아니면 애리얼을 감시하면서 얻은 정보이든지. 뭐가 됐든 불쾌하긴 마찬가지였다. 황태자가 제 감정을 이용하려는 게 뻔히 보였으니까.
그걸 다른 누구도 아닌, 그의 약점을 잘 아는 아리앨라를 이용해 전했다.
협박이나 다름없는 행태였다.
안 그래도 오늘 일로 기분이 잡쳐 있었는데, 기분이 아예 나락으로 추락했다.
휘아킨은 눕혔던 상체를 일으키고는 까딱까딱 손짓을 했다. 아리앨라가 그의 곁으로 다가와 몸을 숙였다. 그러자 그는 그녀의 어깨를 확 잡아당기며 조용히 속삭였다.
“황태자한테 가서 말하세요.”
조금도 화난 것 같지 않은 차분한 목소리. 하지만 그는 화가 나 있었다. 몹시 드물게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잡힌 어깨가 아파 왔다. 긴장한 아리앨라의 귓가에 그의 전언이 속삭여졌다.
“이딴 식으로 이용하려는 거, 기분 더럽다고.”
잿빛의 눈동자가 보이는 날카로움에 아리앨라의 목으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날 이용하고 싶으면 대가리를 더 숙이고 들어오라고, 그 새끼한테 전해 주세요, 백작님.”
휘아킨이 그녀를 꿰뚫을 듯 바라보며 말을 마쳤다.
감히 황태자에게 고할 수 없는 무도한 내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