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200)화 (188/264)

특별 엔딩에 관한 힌트 중 하나.

『*그 어떤 공략 대상과도 깊은 인연을 맺지 않은 상태여야 합니다.』

애리얼은 ‘깊은 인연’이라는 과연 게 어디까지를 의미하는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그 누구와도 친구 이상의 관계로 진전될 생각이 없었기에 특별히 궁금해하지 않았던 사안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깊은 인연’이라는 것의 정확한 정의가 필요해졌다.

황자비가 되는 것을 미루기 위해 렉시우스와 맹세로 연결된 관계를 맺어도 괜찮은가.

애리얼은 고민에 빠져서 알림 창을 바라보다가 ‘깊은 인연’이라는 글자를 꾹 눌렀다.

그랬더니 기다렸다는 듯 새로운 창이 튀어나오며 그녀에게 해답을 가져다줬다.

『‘깊은 인연’은 연인 관계나 약혼, 결혼 등의 애정 관계로만 한정합니다.』

‘애정 관계로만 한정.’

누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아니랄까 봐 깊은 인연의 정의도 참 한정적이고 명확했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

숨조차 쉬기 버거웠던 충성의 맹세가 끝났다.

애리얼은 과도한 긴장으로 아직도 가늘게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런 그녀의 손을 커다란 손이 감싸 쥐었다.

“주인님, 어디 아파?”

“그런 호칭은……. 그렇게 부르지 마, 선배.”

“싫어? 이름이 더 좋아?”

렉시우스가 손을 맞잡은 채 상체를 기울였다.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고는 싱긋 웃었다. 훤칠하게 차려입은 제국 영웅의 목에 은색의 초커가 채워져 있었다.

[애리얼 허클리]

초커에 새겨진 이름에 그녀는 가슴이 갑갑해졌다. 그의 가슴팍에 달린 수많은 휘장이 압박감을 더했다.

이런 이를 끌어내렸다. 끌어내려서 제 밑에 종속시켰다. 홀로는 끊어 낼 수도 없는 맹세를 받았다. 황자비라는 자리를 피할 한 가지 방안으로서. 황자와 황태자를 자극하고 정세를 혼잡하게 만들어서 결혼이 미뤄지도록.

특별 엔딩을 위해서 발버둥이라도 쳐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로 인한 파장은 무척 클 것이다.

턱이 덜덜 떨렸다.

막중한 책임감에 애리얼은 고개를 푹 숙였다. 이 세계의 일원으로 살아온 지 일 년이 훌쩍 넘었다. 아무리 떠날 세계라지만, 애리얼은 이곳에 남겨질 파장까지 무시할 인물은 못 됐다.

렉시우스가 잘게 떠는 그녀를 살며시 당겨 안았다.

“걱정하지 마, 애리얼.”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애리얼은 그에게 안겨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뺨에 닿는 휘장의 감촉이 서늘했다. 렉시우스의 위로는 별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앞으로를 대비해야 하는데, 오늘은 너무 지쳤다.

렉시우스는 애리얼의 상태를 눈치채고는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주었다.

아직 해가 중천인 시각이었지만 애리얼은 침대에 누웠다. 그러고는 오래도록 잠에 빠졌다.

그녀는 아무도 나오지 않는 꿈을 꾸었다. 의식이 흐릿한 가운데 끝없는 어둠만이 계속되었다. 그 속을 계속해서 걸어가는 꿈이었다.

그게 제 미래를 의미하는 것 같아서 속이 불편했다.

지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았으나 잠든 상태에서도 편하지 않았다.

***

충성의 맹세가 이루어진 다음 날, 대공비는 애리얼을 찾았다. 점심을 함께 하고 나서 그녀는 돌연히 애리얼을 끌어안았다.

“고맙구나, 애리얼.”

“아뇨, 저는…….”

“아니야. 고마워.”

대공비는 그렇게 말했다.

애리얼은 마음이 심란했다.

애리얼에게 충성의 맹세를 했기에, 렉시우스는 전장에 나가지 않아도 됐다. 주인인 애리얼의 곁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황명조차 맹세 앞에서는 우선되지 않았다.

그래서 대공비는 고마워하는 것일 테다.

많은 것을 포기하는 만큼, 충성의 맹세는 절대적이었다. 그래서 증인을 많이 세우는 것이고, 과정도 까다롭다. 한쪽에게 압도적으로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만큼 그 희생의 의지를 높게 쳤다.

제국사를 통틀어 이와 같은 일은 거의 없으리라. 이렇게나 높은 지위의 인물이 황제도 아니고 한낱 백작 공녀에게 충성의 맹세를 하다니. 그것도 이토록 뛰어난 자가…….

대공이 아직 정정하다고는 하나, 전장에 나간 상태. 차남인 우레우스는 너무 어렸고, 제 형의 재능과 힘을 따라잡으려면 한참을 더 노력해야 했다. 어쩌면 끝내 형의 재능에는 미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대공비는 애리얼에게 고마워만 했다. 미래의 가주를 잃었는데도 불구하고.

“난 전쟁으로 어머니와 오라버니를 잃었거든. 죽으면 전부 끝이야. 명예도 지위도 죽음 앞에서는 전부 하찮아져……. 그래서 나는 아들이 전장에 나가지 않을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단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제 과거를 이야기했다.

애리얼은 대공비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감사를 당당히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렉시우스가 포기한 것이 너무 크다. 대공가가 잃은 것도 많았다.

“그래서 고마워……. 고마워, 애리얼.”

대공비의 감사가 마음에 돌덩이처럼 쌓이는 것 같았다.

이 세계를 벗어나야 하는데, 엮이는 것들이 점점 많아진다.

떠날 때 뿌리칠 수 있을까. 오히려 붙잡혀서 가라앉지 않을까.

애리얼은 대공비와 한참을 안고 있었다. 그녀의 사과는 편하지 않았으나 그녀의 품은 편했다. 묘하게 어머니가 생각났다.

백작은 이렇게 안아 준 적이 없었는데.

‘나는 누구를 떠올리고 있는 걸까…….’

잃어버린 기억이 절실했다. 여기서 반복했던 회귀의 기억이 아닌 원래 세계의 기억.

***

도자기 화병이 벽으로 날아가 부딪쳤다. 쨍그랑,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박살 난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중 한 조각이 렉시우스의 뺨을 긋고 갔다. 길게 그어진 상처가 남았다.

렉시우스는 배어 나오는 피를 손등으로 쓱 훑었다.

“환영 인사 하고는.”

“꺼져, 개새끼야.”

스카이라가 사납게 쏘아붙였다.

렉시우스는 팔짱을 끼고서 문틀에 기댔다.

“안 그래도 금방 갈 거야. 주인님이랑 멀리 떨어져 있으면 안 되는 처지라서.”

싱긋 웃으며 대꾸했더니 이번에는 소형 장식장이 날아왔다. 그 안에는 도자기로 된 장식품이 가득 들어 있었다. 아주 악의가 가득한 물건 선정이었다.

렉시우스는 여유롭게 휙 몸을 틀었다. 환하게 열린 문 너머로 장식장이 날아갔다. 복도 벽에 부딪친 장식장이 와장창 깨졌다. 귀를 찢는 듯한 소음과 함께 안에 담긴 도자기들도 연쇄적으로 깨져 나갔다. 파편이 마구 튀었다.

렉시우스는 날카로운 파편을 피해 문을 닫았다.

그러자 그 즉시 새로운 물건이 날아왔다. 이번에는 의자였다.

그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끼운 채 능숙하게 허리를 숙였다. 날아온 의자가 방금 닫은 문에 퍽 소리를 내며 충돌했다.

그 후로도 연달아 온갖 가구와 장식품들이 날아왔다.

렉시우스는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날아오는 것들을 피하며 말했다.

“황자님, 진정하세요. 앞으로 안 보고 살 사이도 아닌데.”

그랬더니 이번에는 공격술이 날아왔다.

새파란 불꽃이 일더니 칼날처럼 변형되어 공간을 갈랐다. 렉시우스는 빠르게 순간 이동을 써서 스카이라의 뒤쪽으로 이동했다.

날아간 공격술이 벽면과 문을 사선으로 갈랐다. 쩍 벌어진 틈으로 복도가 보였다.

스카이라는 씨근거리는 호흡을 뱉으며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뒤쪽에 있는 렉시우스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였다.

“좆같은 새끼.”

“황자씩이나 되는 분이 이렇게 입이 더러워서야.”

“닥치고, 꺼져.”

“그러길 바라면 승인이나 해 주든가요, 학생회장님.”

렉시우스가 검은색 서류철을 테이블로 툭 던지며 말했다. 충성의 맹세를 고려해 아카데미 생활의 이런저런 사항들을 바꾸는 데 필요한 서류들이었다. 애리얼과 렉시우스는 주종관계로서 서로 가까운 거리를 유지해야 하기에, 같은 기숙사를 사용하고 같은 수업을 들을 수 있도록 편의를 봐달라는 내용이 주였다. 렉시우스가 주인 된 이의 명령 이행을 위해 교육실이나 시험장에서 무단이탈하는 걸 묵인해달라는 내용도 있었다.

전부 학생회장의 승인이 필요한 사안이었다. 그리고 현재 학생회장의 업무를 맡고 있는 건 스카이라였다.

스카이라는 이를 으드득 갈다가 몸을 휙 돌렸다. 새파란 안광을 빛내며 한순간에 거리를 좁혀 오더니 렉시우스의 멱살을 붙들었다.

“네가 그렇게 나와도 내가 결혼을 미루는 일은 없어.”

“무슨 상관이야. 네가 결혼하든 말든 충성의 맹세는 유효할 텐데.”

“멋대로 생각해. 평생 개처럼 따라다니면서 나하고 애리얼이 부부로 사는 거나 구경하든가.”

“걱정하지 마. 첫날밤에도 기어들어 가 줄게.”

렉시우스가 코웃음을 치며 대응했다.

스카이라가 애리얼을 황자비로 억지 지정 한 덕에 일이 매우 쉽게 풀렸다. 애초에 이럴 걸 상정하고 한 짓이긴 했는데, 참 타이밍도 기가 막히지. 조금만 늦었어도 애리얼이 우레우스에 관한 사실을 알게 되어서 강행하기가 어려웠을 텐데 말이다.

우레우스, 그놈은 분명 저가 감금당했다는 식으로 나왔을 거니까. 겁을 먹은 애리얼은 그를 경계하며 맹세도 거부했을 확률이 높았다. 어쩌면 제 동생을 감금한 막장 인간 취급을 하며, 스카이라보다 그를 더 멀리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렉시우스는 제 멱살을 잡은 스카이라의 손을 툭툭 두드렸다.

“황자 저하, 원래 이런 싸움에서는 감정적인 새끼가 지는 거예요.”

그의 도발에 스카이라의 낯이 잔뜩 구겨졌다.

멱살을 놓고 물러나는가 싶던 스카이라가 렉시우스의 명치를 꽉 눌렀다. 여태 아물지 않은 상처가 울컥 피를 뱉었다.

렉시우스가 미간을 찡그렸다. 스카이라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서 지그시 렉시우스를 압박했다.

“그래도 감정적이었던 덕에 이건 잘 먹힌 거 같은데.”

“응. 아프더라.”

렉시우스가 아무렇지 않은 척 입꼬리를 올렸다. 기분이 더러워진 스카이라는 그를 확 밀어 버렸다. 렉시우스는 일부러 과하게 밀려나서는 그와 멀어졌다.

“사람을 이렇게 밀고 그러면 어떡해요, 황자님. 주인님이 이런 폭력적인 사람이랑 결혼하지 않게 말려야겠다.”

능청을 떠는 렉시우스의 모습에 스카이라가 남아 있던 도자기 병을 던졌다.

렉시우스는 고개만 기울여서 휙 피해 버렸다. 스카이라의 조준이 정확했던 덕에 오히려 피하기가 쉬웠다. 벽으로 날아간 도자기만 아깝게 박살이 났다.

“아예 상하체가 분리돼 버렸다면 좋았을 텐데.”

스카이라가 렉시우스의 목에 걸린 은색의 초커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 위에 적힌 애리얼 허클리라는 이름이 그의 속을 쓰라리게 했다.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틀자 렉시우스가 던져 놓은 서류철이 눈에 들어왔다. 스카이라는 서류철을 들어서 쫙쫙 찢은 다음 바닥에 버렸다.

“난 아무것도 안 해 줄 거니까 알아서 행정관을 매수하든지 해. 이 개같은 놈아.”

팔랑팔랑 날리는 서류 조각을 보면서 렉시우스는 킥, 웃음을 흘렸다.

“진정해, 스카이라.”

“입 다물어.”

“화난 거 알겠는데, 그래도 대화는 해야지.”

“너랑 할 말 없어.”

스카이라는 등을 돌려 나가려고 했다.

그 뒷모습에 렉시우스는 제 인내가 기어코 다 떨어졌음을 느꼈다. 스카이라를 단숨에 앞질러 거칠게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그가 스카이라의 멱살을 잡았다.

스카이라가 얼굴을 팍 찌푸렸다.

렉시우스는 그 얼굴을 뚫어지게 쏘아보면서 제 감정을 뱉어 냈다.

“나라고 너 안 죽이고 싶은 줄 알아?”

스카이라는 곧장 공격술을 시전했다. 하지만 렉시우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양보할 건 양보해야지.”

타이르는 말투는 아니었다. 렉시우스는 협상을 하듯이 굴었다. 피차 원하는 걸 얻었으니 서로 한발 물러나자는 거였다.

스카이라는 공격술을 펼치려던 손을 억지로 억지로 말아 쥐고서 이를 악물었다. 렉시우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나 자신이나 막무가내로 일을 밀어붙였다. 허술한 구석이 없는 게 아니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실패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그걸 제대로 달성하려면 서로 한 발씩 물러나야 했다. 그는 지위를 포기하고 애리얼의 곁을 얻었으니, 스카이라도 애리얼의 곁을 얻으려면 그를 인정해야 했다.

스카이라는 욕을 짓씹으며 렉시우스의 손을 뿌리쳤다.

렉시우스는 더 버티지 않고 손을 놨다. 스카이라에게서 마지못해 수긍하는 기색을 읽었기 때문이다.

스카이라는 정제되지 못한 호흡을 연거푸 씨근대다가 조용히 말했다.

“서류, 필요한 거 다시 정리해서 올려.”

제 살을 도려내는 심정으로 내뱉은 타협이었다.

***

한차례 피곤한 대면을 끝내고 대공저로 귀환한 렉시우스는 곧장 애리얼을 찾았다.

애리얼은 아직 대공저를 떠나지 못해 객실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렉시우스는 소파에 앉은 그녀를 향해 무너지듯 몸을 기댔다.

“선배?”

그는 움츠러드는 애리얼의 어깨를 감싸 안고서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

“주인님 남편 될 인간, 성격 한번 더럽더라.”

주인님, 남편. 둘 다 거슬렸던지 애리얼이 흠칫 놀라 굳는 게 느껴졌다. 확연하게 드러나는 거부감이 어쩐지 기껍기도 했다.

그는 조용히 웃으며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그러니까 결혼 안 하게 해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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