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201)화 (189/264)

애리얼은 여전히 뻣뻣하게 굳은 채로 슬그머니 눈동자를 굴렸다.

“……그럴 수 있어?”

조심스레 물은 말에 렉시우스는 밀착해 있던 상체를 물렸다. 토닥거리며 위로를 건네던 손도 거두고선 애리얼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그러더니 이윽고 빙긋 웃는다.

“정말 싫은가 보네.”

“아무래도 너무 갑작스러운 데다 황자비라는 자리도 부담스럽고…… 강제적이니까.”

“그래, 그런 건 할 필요 없지.”

렉시우스가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표정도 나른하게 풀어져 있었다.

느긋한 기색의 그와 달리 애리얼은 초조함에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충성의 맹세로 렉시우스를 종속시킨 덕분에 그녀의 거취는 정계에서도 주목하고 있었다. 대공가의 장남을 품에 안은 이가 과연 황자비로 적합한가. 그에 대해선 벌써 우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중이었다. 이미 막강한 패를 쥔 애리얼이 황자비까지 되는 것을 좋게 보는 이는 거의 없었다. 심지어 애리얼은 특별 감시 대상으로 반쯤 테러리스트 취급을 받던 인물이었으니까.

반대가 큰 만큼 스카이라도 막무가내로 결혼을 추진하기는 어려웠다.

그것 때문에 애리얼은 부담스럽기 그지없던 충성의 맹세를 수락했다. 어떻게든 발버둥을 쳐서 특별 엔딩의 가능성을 남겨야 했으니까.

하지만 귀족들의 반대도 어디까지나 시간 끌기에 불과할 뿐, 궁극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었다. 이미 스카이라에게는 황제의 직인이 찍힌 서류가 들려 있다고 했다. 마음만 먹으면 반대를 무시하고 일을 진행할 수도 있다.

불안감에 물든 애리얼은 무의식중에 입술만 자꾸 씹어 댔다.

저러다 피라도 나는 게 아닐까.

보다 못한 렉시우스가 애리얼의 턱을 눌러 잡고서 입을 벌리게 했다. 얼마나 물어 댔는지 그녀의 아랫입술은 살짝 부어올라 있었다. 렉시우스는 그녀의 부은 입술을 엄지로 문지르며 미간을 좁혔다.

애리얼은 갑작스러운 그의 접촉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선…… 으해…….”

입이 다물리지 않도록 턱을 잡힌 탓에 발음이 샜다. 그 소리에 렉시우스의 구겨진 미간이 무장 해제 되듯 풀렸다.

“나쁜 버릇이 있네.”

“어?”

애리얼이 맹하게 되묻자 그는 피식 웃으며 턱을 놔주었다.

“불안해도 함부로 입술 씹고 그러지 마.”

“응…….”

애리얼은 제 아랫입술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선배, 황자비가 안 되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해?”

“이제 찬찬히 생각해 봐야지. 어차피 스카이라도 당장은 밀어붙이기 힘들 테니까.”

“그렇구나.”

애리얼은 다시금 차오르는 불안감과 초조함을 내리누르며 손끝을 만지작댔다. 렉시우스에게도 당장은 뾰족한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일부러 말해 주지 않는 걸 수도 있지만, 애리얼은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렉시우스의 능력을 믿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는 뛰어났다. 어쩌면 애리얼이 황자비가 되는 것을 잘 막아 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렉시우스에게 의지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렉시우스와 스카이라의 호감도 수치는 서로 같았다. 즉, 렉시우스 역시 스카이라와 같은 짓을 벌일 수 있다는 거였다.

이러나저러나 공략 대상에게 의지하는 건 위험했다.

‘돌파구는 스스로 찾지 않으면 안 돼.’

애리얼은 담담한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 무언가를 결심했을 때 흔히 보이는 그녀의 버릇이었다.

렉시우스는 애리얼의 표정 변화를 가만히 관찰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애리얼이 침착해지자 그는 이상하게도 못마땅해졌다. 등받이에 모로 기대고서 애리얼의 손등을 툭 건드렸다.

바닥만 보던 애리얼의 얼굴이 그를 향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다정하게도 말하며 제 목을 톡톡 건드렸다. 그의 검지가 은색 초커에서 ‘애리얼 허클리’라고 쓰인 부분을 가리켰다.

“적어도 난 네 소유잖아? 스카이라보다는 다루기 쉬울 거야.”

그는 애리얼의 고민을 어느 정도 안다는 양 그렇게 속살거렸다.

애리얼은 그의 목에 걸린 초커를 난감해하며 바라보았다. 거기에 새겨진 제 이름이 그렇게 껄끄러울 수가 없었다. 갑자기 제 소유라고 말한들, 단지 시간을 끌기 위해 선택한 관계였을 뿐인데.

“선배, 나는…….”

“선배가 아니고 이름으로 불러 줘야지.”

렉시우스가 점잖게 타이르듯 말했다. 둘의 관계가 이제 더는 예전과 같지 않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애리얼은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날 좀 더 편하게 생각해 줘, 주인님.”

그가 애리얼의 손을 덮어 잡으며 무해한 사람인 척 웃었다. 하지만 ‘주인님’ 하고 말하는 그의 저음은 조금도 아랫것 같지 않았다. 귀족적 오만함이 태도며 분위기에 가득 스며 있었다.

이러니 어떻게 그를 제 소유로, 아래로 볼 수 있겠는가.

애리얼은 되레 소유당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렉시우스.”

“응, 주인님.”

이름을 불린 그는 아주 만족스럽게 웃었다.

***

렉시우스는 충성의 맹세를 해서 애리얼에게 종속되었다. 하지만 그게 정식으로 공인되려면 황성의 재가를 받아야 했다. 아무리 대공자의 지위를 포기했다지만 렉시우스는 여전히 고위 계급이었기 때문이다.

제국 법에 따르면 후작보다 높은 계급의 이직이나 소속 변경에는 반드시 황제의 직인이 필요했다. 렉시우스는 대공가의 공자이기에 이 경우에 속했다. 다만 충성의 맹세는 매우 특수한 경우이기에, 설령 황제라도 맹세를 취소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그가 황성으로 간 건 형식적인 절차를 따른 것에 불과했다. 황성의 재가가 있든 없든 유지될 맹세이지만 공인을 받아 놔서 나쁠 건 없으니까.

문제는 현재 재가를 줘야 할 황제가 아프고, 황제의 대리인 황태자는 그를 두 번이나 돌려보냈다는 데 있었다. 맹세를 마친 직후에 첫 번째 퇴짜를 맞았고, 스카이라와 싸웠던 그날에 두 번째 퇴짜를 맞았다. 그리고 오늘이 세 번째 방문이었다.

렉시우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데본시아를 기다렸다.

그렇게 두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는 바쁘신 황태자의 면상을 볼 수 있었다.

“무슨 일이야?”

데본시아는 뻔뻔하게도 능청을 떨며 렉시우스의 맞은편에 앉았다. 늦어서 미안하다는 사과조차 없었다.

렉시우스는 불편함을 드러내려다가 말고 심드렁하게 서류만 던졌다.

“이번에도 까면 세 번째야. 적당히 하고 찍어. 안 찍는다고 없던 일 되는 것도 아니니까.”

“그러네. 안 찍는다고 없던 일 되는 것도 아닌데…….”

데본시아가 서류를 쓱 훑다가 렉시우스를 보았다. 왜 기어코 공인을 받으려는 거냐는 표정이었다. 그의 말마따나 황성의 재가가 꼭 필요한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귀찮게 몇 번이고 찾아오는가.

“내가 기분 더러워 하는 표정이라도 보려는 건가.”

데본시아가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속셈을 떠보았다.

정곡이었는지 렉시우스가 입꼬리를 비뚤게 끌어 올렸다. 불량하게 조소하는 얼굴로 데본시아를 보았다.

“알면 또 보지는 말자.”

“그래, 그럼.”

데본시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겉옷 안주머니에서 도장을 꺼냈다.

서류에는 곧장 황가의 직인이 찍혔다. 세 번 만에 드디어 공인받은 것이다.

그럼에도 렉시우스는 기뻐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무심하게 서류를 챙겨 들고서 일어났다.

데본시아는 떠나려는 그의 뒷모습에다 대고 물었다.

“사랑해서 그런 거야?”

사랑.

그 단어에 렉시우스의 움직임이 잠시 멈추었다. 그는 문으로 향하다 말고 몸을 돌렸다. 데본시아를 바라보는 금색 눈에는 의아함이 담겼다. 어이없어하는 데 가까운 감정이었다.

“왜? 궁금하냐?”

“아니.”

데본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답은 아는 듯 보였다.

“그냥 싫어서.”

그는 눈썹 하나 찌푸리지 않고 렉시우스를 향한 적의를 드러냈다. 자기와 같은 것을 좋아하지 말라고 떼를 쓰는 듯한 투였다.

그 방식이 너무나 직설적이고 유치해서, 렉시우스는 코웃음을 쳤다.

“왜 이래, 애같이.”

데본시아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렉시우스를 훑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이내 아무 말 없이 입을 다물었다. 제가 생각해도 제 행동이 유치하기 그지없었으니까.

***

『세 번째 분기가 완료되었습니다.』

『대공자의 맹세 이벤트가 종료됩니다. 스토리가 변화합니다.

*네 개의 일반 엔딩이 삭제됩니다. - 현상 유지 엔딩(삭제)/조용한 귀족 엔딩(삭제)/평범한 제국민의 삶 엔딩(삭제)/평화로운 방관자 엔딩(삭제)

*대공자 루트의 굿 엔딩 두 개와 배드 엔딩 한 개가 삭제됩니다. - 축복 속의 대공비 엔딩(굿 엔딩 삭제)/대공가의 일원 엔딩(굿 엔딩 삭제)/대공저에 감금된 인형 엔딩(배드 엔딩 삭제)

*분기 보상이 지급됩니다. - ‘비상 탈출’을 획득하였습니다.』

『아이템

*[비상 탈출]』

『비상 탈출

*현재 있는 곳에서 반드시 탈출할 수 있습니다.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올린 장소로 탈출합니다.(단, 현재 속한 세계에 존재하는 장소로 한정.)

*한 번 사용하면 사라집니다.

*아이템 창을 열고 [비상 탈출]을 누르면 그 즉시 효과가 발동됩니다.』

애리얼은 새로운 알림 창을 줄줄이 띄워 놓고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충성의 맹세가 끝나고 하루 뒤 확인한 휴대폰에 온 알림들이었다.

황자비를 피하기 위한 시간 끌기로 선택한 맹세가 이다지도 큰 파급을 불러왔다.

심지어 삭제된 네 가지의 일반 엔딩은 전부 평화로운 엔딩뿐. 이제 평범하게 살기는 글렀다는 걸 일러 주는 듯했다.

하지만 큰 충격은 없었다. 공략 대상들과 깊게 엮이면서 이미 각오한 바였다. 괜찮은 엔딩이 사라졌어도 이젠 타격이 그리 크진 않았다.

중요한 건 이곳에서 배드 엔딩이라 일컫는 엔딩의 수위가 어느 정도인지 알았다는 것.

『대공저에 감금된 인형 엔딩(배드 엔딩 삭제)』

글자만 읽어 봐도 정상적인 수위는 아니었다.

저 엔딩은 삭제되었다지만 다른 엔딩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것도 저 엔딩과 비슷한 수위로.

애리얼은 휴대폰을 꽉 쥐고서 바르르 떨었다.

과연 그의 나머지 배드 엔딩도 피할 수 있을지…….

‘이제 렉시우스와 주종 관계 비슷한 것을 맺었으니 괜찮지 않을까?’

그녀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러나 차오르는 불안감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제 상황에 대한 또 다른 불안과 의문만이 증폭되었다.

‘맹세는 끝났고 대공저에 더 볼일도 없는데 왜 아직도 난 대공저에 있는 거지?’

초조하게 휴대폰을 쥔 손, 하얗게 핏기가 가신 손가락이 ‘비상 탈출’ 아이템을 켰다.

이번 분기 보상으로 받은 아이템이 ‘비상 탈출’인 게 과연 우연일까.

애리얼은 덜컥 겁이 났다. 배드 엔딩의 가능성을 떠올리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비상 탈출’은 어쩌면 그녀를 향한 경고일지도 몰랐다. 한시라도 빨리 대공저를 떠나라는 경고.

마침 렉시우스는 황성에 가 있고, 돌아오려면 시간이 걸린다.

‘기회…… 인가?’

그 생각이 들자마자 애리얼은 앞뒤 가리지 않고 일단 방부터 나왔다. 제 주변을 감싸고 있는 벽들의 존재가 무척 갑갑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일상적인 것도 이제는 일상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충성의 맹세로 렉시우스와의 관계가 변한 이후, 애리얼은 급격하게 초조해졌다. 오랜만에 분기를 맞은 탓인지…….

빨라진 걸음은 대공저의 정원을 지나 성벽처럼 거대한 대공저의 정문으로 향했다. 굳게 닫힌 철문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문을 지키던 기사 중 하나가 다가와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공녀님,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그냥 산책하던 길에 들렀어.”

애리얼은 자연스럽게 몸을 틀고는 성벽을 따라 걸어 나갔다.

기사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크게 의심하거나 경계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녀가 문을 열어 달라고 했다면 그냥 문을 열어 줬을지도 몰랐다. 물론 그 전에 렉시우스나 대공비에게 보고를 올렸겠지만.

‘자연스럽게 백작저로 돌아갈 방법이 있을까?’

애리얼은 주머니 속에 든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비상 탈출’을 쓰면 바로 이곳을 벗어날 수 있다.

성벽 근처를 서성거리던 발걸음이 정원의 깊숙한 끄트머리로 향했다. 그녀는 인기척이 드문 정원 구석으로 가서 휴대폰을 꺼냈다.

『아이템

*[비상 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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