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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202)화 (190/264)

검은 창 위에 희게 빛나는 구원 같은 글씨.

‘이대로 대공저를 벗어날까?’

불쑥 일어난 충동이 애리얼의 손가락을 ‘비상 탈출’ 아이템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손가락을 거뒀다. 아직은 좀 더 아껴 두고 싶었다. 정말로 절체절명이라 생각될 때 쓰자. 그런 마음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애리얼은 휴대폰에 대공저의 조감도를 띄웠다. 내내 궁금하던 정원 구석의 동그란 장소. 그곳에 뭐가 있을지 궁금했다. 정말 제 예상대로 우레우스가 갇혀 있을 것인가.

우레우스가 스트레스를 받아서 잠시 휴가를 보냈다는 대공비의 말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럼에도 애리얼은 계속 의심스러웠다. 우레우스는 렉시우스와 대공비가 짠 계획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계속 애리얼의 의심을 키웠다. 마침 렉시우스가 자신을 감금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삭제된 배드 엔딩으로 확인한 차였다.

아직 대공저에 있어도 괜찮은 건지, 아니면 바로 도망쳐야 하는지.

조감도에 있는 둥근 공간을 확인하면 확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애리얼은 조용히 땅에 손을 댔다.

그녀가 디디고 선 자리에 원형의 장소가 표시되어 있었다. 발밑을 부수기만 하면 이 장소로 들어갈 수 있다.

애리얼은 무릎을 꿇고서 땅을 짚었다.

‘우레우스는 강한 마력을 지닌 대공가의 직계야.’

그런 그를 가둬 두었다면 분명 강한 결계를 쳐 뒀을 것이다. 그가 탈출할 수 없도록 해야 하니까.

그러니 자신이 어느 정도 힘을 써도 우레우스는 다치지 않을 것이다.

애리얼은 손바닥을 통해 마력을 흘려 보냈다.

파즈즈즈즈.

스파크를 일으키는 검푸른 마력이 땅으로 스며들었다. 이윽고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애리얼은 주변을 살피며 신중하게 마력량을 늘려 갔다. 뿜어내는 마력이 커질수록 지진과 같은 울림도 점점 커졌다.

우르르르르, 쾅!

세찬 진동음의 끝에 굉음과 함께 바닥이 붕괴했다.

발밑이 훅 꺼지며 넓은 공간이 드러났다.

애리얼은 무너지는 지반 위에서 휘청거리며 겨우 방어술을 펼쳤다. 간신히 완충 작용 정도만 하는 아주 얄팍한 방어술이었다. 아래의 공간이 그리 높지 않은 덕에 그 정도 방어술로도 충분했다. 위로 무거운 게 떨어지지도 않았다.

애리얼은 부연 흙먼지 속에서 콜록거리며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먼지가 조금 가라앉나 싶더니, 부스스, 잔해가 무너지는 소음이 들렸다.

뭔가 더 떨어질까. 혹시나 하는 걱정에 애리얼은 마력을 한 번 방사했다. 파지지직, 소리와 함께 주변의 잔해물들이 타는 소리를 내며 가루로 부서졌다.

온갖 먼지와 잔해로 흐릿하던 시야가 차츰 명확해졌다.

파지지직, 파직.

애리얼은 난장판이 된 주변을 둘러보다가 스파크가 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방사한 마력이 투명한 막 같은 것에 부딪쳐 불꽃을 일으키고 있었다. 검푸른 마력 불꽃이 위협적으로 일렁거렸다. 애리얼은 빠르게 마력의 방사를 멈췄다.

파즈즈즈즈.

사그라지는 불꽃과 함께 튀던 스파크의 소음도 줄어들었다.

시야가 완전히 트였고, 지하에 감춰져 있던 원형의 공간이 확실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정면을 보고 선 애리얼은 놀라서 입을 벌렸다.

흰 벽돌로 이루어진 공간, 그 중심에 반구형의 투명한 결계가 보였다. 그리고 그 안에 우레우스가 있었다.

애리얼은 턱을 덜덜 떨었다. 안색이 급격하게 창백해졌다.

‘지나친 상상이 아니었어…….’

이 좁은 원형 공간에 우레우스가 있다. 그녀가 추측했던 그대로.

우레우스는 새파란 눈동자로 그녀를 보며 그녀와 비슷하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말을 잊을 정도로 순간적인 충격이 컸다.

주위는 정적에 휩싸였다. 간간이 흙모래가 흘러내리는 소리만 울렸다.

얼마쯤 지났을까. 다수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무슨 소리입니까?”

“어딘가 무너진 것 같습니다!”

그 소리에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애리얼이었다.

“공자님!”

애리얼의 외침에 우레우스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대답했다.

“애리얼?”

“공자님, 나오실 수 있겠어요?”

애리얼이 결계를 더듬으며 다급하게 외쳤다. 투명한 결계는 순수하게 방어용 결계로 보였다. 어지간한 충격에는 깨지지 않을 견고함이 느껴졌다. 강도와 첨예함을 보아 하니 렉시우스의 마력이 분명했다.

우레우스의 감금을 렉시우스가 주도한 거라는 확실한 증거.

그래서 애리얼은 감히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다.

멀리서 다가오는 대공저의 사용인들이 과연 아군일까. 오히려 우레우스를 가두는 데 일조한 인간들일 수도 있다.

상상이라 치부했던 상황이 눈앞에 펼쳐지자 공포가 슬금슬금 이성을 잠식했다.

도망치자. 당장 도망쳐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어 버리자.

본능이 마구 외쳐 댔다.

하지만 어떻게 저 혼자 도망칠 수 있겠는가. 눈앞에는 꼼짝없이 갇혀 버린 우레우스가 있었다. 고작 열셋밖에 안 된 아이인 그가.

애리얼은 천천히 심호흡했다.

우레우스를 일단 이 좁은 지하 공간에서 탈출시켜야 한다.

그녀의 의지를 담은 고순도의 마력이 삽시에 모여들었다.

애리얼은 우레우스가 휴양지에서 머무르다가 대공저에 접근할 때만 이곳으로 끌려온다는 사실을 몰랐다. 제 어머니와 형에게 갇혀 버린 가혹한 학대의 희생자로만 보였다. 실제로 그녀의 생각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우레우스가 집에 올 수 없게 격리된 처지인 건 맞으니까.

“결계를 깨트리겠습니다. 잠시만 뒤로 물러나 계세요, 공자님.”

그녀가 결계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하지만 우레우스는 오히려 앞으로 다가왔다. 파란 눈동자를 커다랗게 뜨고서 다급히 외쳤다.

“애리얼! 렉시우스가 너한테 어떤 개소리를 해도 들어 주지 마! 어떻게 꼬셔도 넘어가면 안 돼!”

다그치는 듯한 그의 외침에 애리얼은 멈칫거리며 마력을 거뒀다.

“……공자님?”

“알겠지? 절대로 안 돼! 형이 무슨 소리를 하든 절대로!”

“그게 무슨……. 설마 충성의 맹세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 소리에 맹렬한 당부를 쏟아 내며 혈기를 보이던 우레우스의 얼굴이 굳었다. 낯이 희게 질린 그가 떨리는 음성을 뱉어 냈다.

“너, 설마…… 형이 한 맹세를 받아 줬어?”

애리얼은 고개를 끄덕였다.

“평범하지 않은 일이라는 건 알아요. 대공자였던 렉시우스 님께서 많은 것을 희생하셨어요. 제가 함부로 수락해서는 안 됐는데…….”

“당연하지!”

우레우스는 낭패라는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그제야 애리얼은 우레우스의 말뜻이 제가 생각한 뜻과 다름을 알아챘다. 그는 가주였던 형이 지위를 잃어 대공가가 흔들리는 걸 염려하는 게 아니었다. 충성의 맹세로서 렉시우스의 주인이 된 애리얼을 염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왜.

충성의 맹세를 한 결과 렉시우스는 그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처지가 되지 않았던가.

렉시우스는 무서울 정도로 강한 존재였으나 애리얼에게는 아니었다. 그가 그녀의 이름이 새겨진 초커를 차고 있는 한 그는 그녀의 명령을 따라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우레우스가 다다다 말을 쏟아 냈다.

“형은 전부 포기하고 맹세를 한 게 아니야! 형은 아직 대공가의 일원이고, 대공가는 너보다 계급이 높아. 형을 종속시켜도 대공가를 종속시킨 게 아닌 이상 넌 대공가의 명을 따라야 해!”

“……아…….”

우레우스의 말에 애리얼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을 떠올렸다.

대공비.

그래서 이 계획에는 대공비의 협조가 필요한 거였다. 렉시우스가 지위를 내려놓고 종속된 이후에도 애리얼을 압박할 수 있는 권력자가 있어야 했으니까. 그것도 렉시우스의 의견을 잘 반영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오한이 들었다.

기우로 여기던 불안감이 폭발적으로 커졌다. 순식간에 결심이 섰다.

‘이제 대공저에는 더 있으면 안 돼.’

애리얼은 휴대폰을 꺼내서 ‘비상 탈출’ 아이템을 화면에 띄웠다. 오른손으론 당장이라도 아이템을 누를 듯이 휴대폰을 쥐고 왼손은 결계에 얹었다.

“물러나세요, 공자님.”

“너…….”

“시간이 없어요.”

애리얼은 의지를 다진 눈으로 우레우스를 보았다.

그 눈을 마주한 우레우스가 움찔 몸을 떨었다. 단단한 심지를 지니고서 빛나는 까만 눈이 절로 그의 걸음을 물렸다.

애리얼은 가시처럼 날카롭게 날을 세운 마력을 넓게 내뿜었다. 그토록 연습했던 공격술의 일종이었다. 렉시우스와 일대일로 대련을 하며 그의 방어술을 어떻게 깨야 하는지 배운 것이 지금 빛을 발했다.

쩍, 쩌적.

달걀 껍데기가 부서지듯이 결계에 금이 갔다.

우레우스가 놀란 얼굴을 하는 동안 애리얼은 마력의 방출에 박차를 가했다. 조금만 더. 그러면 깨진다. 탈출이 목전이다.

고지를 앞두고서 이까지 꽉 깨무는데, 뒤에서 넘어온 손이 그녀의 눈을 덮었다.

우우우웅-

휴대폰의 접근 알림이 뒤늦게 울렸다.

“렉시우스!”

우레우스가 악을 쓰는 수준으로 제 형의 이름을 불렀다.

갑작스럽게 시야가 차단된 상황에서 애리얼은 흠칫 몸을 떨었다. 등 뒤의 기척이 낯설지 않았다. 벌써 귀환했을 줄이야.

결계는 아직 깨지지 않은 상태였다.

애리얼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저지른 일. 지체하는 것도, 그만두는 것도 안 된다. 그녀는 왼손으로 세찬 마력을 뿜어내며 오른손의 손가락을 움직였다. 결계를 부수는 동시에 휴대폰에 띄워 둔 ‘비상 탈출’을 눌러야 했다.

돌발적인 상황에 이루어진 그녀의 판단은 상당히 빠르고 현명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렉시우스가 움직이는 게 더 빨랐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을 덥석 눌러 쥐고서 휴대폰을 빼앗아 갔다.

애리얼은 본능적으로 팔을 뻗으며 저항했다. 그러나 비어 버린 오른손은 연신 허공만 갈랐다. 휴대폰이 잡히지 않자 그녀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돌려줘!”

애리얼은 그 어느 때보다도 큰 공포를 느끼며 발버둥을 쳤다. 휴대폰은 현재 그녀의 목숨만큼이나 중요한 물건이었다. 그게 없으면 안 된다. 오죽하면 눈이 가려져 시야가 없는 상황에서도 마력까지 방사하며 공격 태세를 갖추겠는가.

하지만 렉시우스는 쉽사리 그녀에게 당해 주지 않았다. 능숙한 방어술에 그녀의 정제되지 않은 미숙한 마법이 모두 막혔다. 시야까지 차단되어 부질없이 바르작대는 가녀린 신체도 쉽사리 제압되었다.

렉시우스는 애리얼을 자신의 품 안에 꽉 안아 움직임을 봉쇄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가만히 있어.”

꺼끌꺼끌한 저음이 음산하게 들렸다.

누가 우위인지 선명하게 각인하는 언령.

애리얼은 저항하지 않고 몸에서 힘을 풀었다. 마력은 그녀가 앞설지 몰라도 그 외 모든 부분에서 그에게 밀렸다. 누가 우위인지는 명백했고, 그녀는 부질없는 발버둥을 멈췄다.

렉시우스는 그녀가 저항하길 포기한 것이라 여겼다. 겁에 질렸을까. 뒤늦게 걱정이 인 그는 그녀를 달래기 위해 거친 언령을 내뱉었던 목을 가다듬었다.

“네가 무슨 생각 하는지 알아.”

“…….”

“여기부터 수습하고 나서 설명해 줄게. 잠시만…….”

“놔, 렉시우스 크레시앙.”

차갑고 단호한 음성이 고압적으로 명령했다.

렉시우스는 제가 뭘 들은 건지 의심하는 얼굴로 애리얼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눈을 가리던 손을 거두자 냉랭한 기운이 감도는 까만 눈동자와 마주쳤다. 누가 우위에 있는지 잘 아는, 강자가 가질 법한 눈빛이 그를 꿰뚫었다.

이곳에는 대공비도 없고, 우레우스도 그의 편이 아니었다. 애리얼을 제지할 수 있는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충성의 맹세를 했으면, 날 따라.”

애리얼이 그의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제 허리를 감은 그의 팔을 떼어 냈다.

의외의 상황을 맞이한 렉시우스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팔을 거뒀다. 저런 태도의 애리얼이라니. 처음 겪는 그녀의 모습에 가슴이 찌릿했다. 맹세로 인한 마도구의 효과인지 뭔지. 그는 명령하는 애리얼에게 묘한 흥분감까지 느꼈다. 순순히 복종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러면 그녀가 저를 마음에 들어 할까.

그의 품에서 벗어난 애리얼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거 돌려줘.”

렉시우스는 그녀의 말에 저도 모르게 빼앗았던 휴대폰을 내밀다가 멈칫거렸다. 이걸 주면 애리얼이 사라질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는 싸하게 얼굴을 굳히며 휴대폰을 꽉 쥐었다.

“싫어.”

“달라고 했어.”

“그러기 싫은데, 주인님.”

“렉시우스!”

그녀가 분노에 차서 외쳤다.

주인 된 자의 호령에 렉시우스의 목에 걸린 마도구가 작동했다. 일순 번쩍거리며 빛난 그것은 렉시우스의 목을 향해 날카로운 마력을 뿜어냈다. 징벌과도 같은 마력이 충성의 맹세를 어기고 명령을 무시하는 그의 목을 파고들었다. 은색의 초커 아래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그런데도 렉시우스는 그녀에게 휴대폰을 넘길 기미가 없었다. 피가 셔츠를 적시는데도 오히려 여유로웠다.

반면 애리얼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저 은색의 초커가 저토록 충격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는 거였다니.

초커 아래로 줄줄 흐르는 피의 양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

피비린내에 속이 메스꺼웠다. 이대로면 그의 목이 잘려 버리는 것은 아닐까.

덜컥 두려워진 애리얼은 다급히 말했다.

“그, 그만해! 안 돌려줘도 되니까……!”

그녀의 말에 초커가 작동을 멈추었다. 흉흉하던 마력의 기운이 가셨다.

그러나 이미 상처가 난 그의 목에서는 출혈이 멈추지 않았다.

애리얼은 파리해진 안색으로 렉시우스를 응시했다.

파르르 떨리는 연한 흑색의 눈동자에 렉시우스는 비틀린 만족감을 느꼈다. 저에게 가혹하지 못한 그녀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목의 상처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미소를 지었다.

“그것 봐.”

지이이잉-

“역시 넌 나를 버릴 수 없어.”

휴대폰의 진동 소리와 그의 목소리가 겹쳤다. 초커 아래로 피를 흘리며 웃는 그의 모습이 말도 못 하게 섬뜩했다. 그에게 대들길 서슴지 않던 우레우스마저도 공포를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애리얼은 겁에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을 쳤다.

그가 든 휴대폰의 화면에 새로운 알림 창이 떠오른 게 보였다.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렉시우스 크레시앙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을 ------------)

▷현재 위치: 대공저 정원 - 옛 성소의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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