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203)화 (191/264)

다섯 개 반.

정상적인 호감도 수치가 아님을 알리듯 문장 일부가 깨져 있었다.

애리얼은 충격을 받은 나머지 반응하는 것도 잊고 얼었다.

그런 그녀에게 경종을 울리는 또 한 번의 진동음이 울렸다.

지이이잉-

『※경고

*공략 대상에게 할당된 호감도는 5개까지입니다.

6개부터는 ‘오버히트(overheat: 과열)’ 상태로, 극단적인 엔딩을 마주할 확률이 매우 높아집니다.』

깜박, 깜박.

경고 창이 떠올라 점멸했다.

당장 도망치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위험을 느낀 애리얼은 빠르게 뒷걸음질을 치다가 멈추었다. 휴대폰. 그게 아직 렉시우스의 손에 있었다. 그걸 두고서 도망칠 수는 없었다.

애리얼은 기껏 벌렸던 그와의 거리를 다시 좁혔다.

렉시우스가 웃는 얼굴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뒤에서 우레우스가 뭐라고 소리쳤으나 애리얼은 듣지 못했다. 그의 손에 붙잡힌 순간 시야가 전환되었다.

***

아카데미 개학일까지는 고작 일주일이 남았다.

애리얼은 여전히 대공저에 묶인 처지였다. 감시도 삼엄하고, 성벽의 문도 굳게 닫혀 있었다. 무엇보다도 휴대폰이 렉시우스의 손안에 있었기에, 애리얼은 자의로든 타의로든 떠날 수 없었다.

어떻게든 휴대폰을 되돌려받아야 한다. 그러면 감시도, 굳게 잠긴 대공저의 정문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비상 탈출’ 아이템만 쓰면 해결될 테니까.

그걸 아는 모양인지 렉시우스는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지하 공간에서 그녀를 데리고 나온 이후부터였다. 그는 그녀의 곁을 찾아오지 않았다. 용건이 있으면 직접 찾아오든지, 아니면 부르든지 하라는 말만 시녀를 통해서 전했다.

급한 쪽은 제 쪽이 아니라는 거지.

애리얼은 제 객실로 렉시우스를 불렀다. 하지만 그는 곧장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부른 지 삼십 분이 지나서야 느지막이 등장했다.

“주인님, 날 찾았다고.”

그가 팔짱을 끼고서 문틀에 기대어 말했다. 셔츠 위에 가운을 걸친 다소 허술한 차림새와 삐딱한 자세에서 오만함이 묻어났다. 이토록 건방진 종자가 있을 수 있나. 주인님 하고 부르는데 오히려 주인처럼 구는 건 그였다.

괜스레 주눅이 들게 하는 태도였다.

애리얼은 부러 더 무심한 얼굴을 하고서 우레우스의 안부부터 물었다.

“대공자 저하께선 괜찮으셔?”

“아주 잘 계셔. 여기 대공저 본관에.”

비꼬는 기색이 역력한 말투였다. 애리얼이 저보다 우레우스를 먼저 신경 쓴 탓에 기분이 상한 듯 보였다.

그럼에도 애리얼은 개의치 않았다. 이제 그의 기분을 신경 써 줄 여유가 없었다. 정상적인 수치를 넘어 버린 그의 호감도 수치를 생각하면 이렇게 얼굴을 맞대는 자체가 고역이었다. 그녀는 무심한 얼굴로 손만 내밀었다.

“내 물건 돌려줘.”

“뭐? 이거?”

렉시우스는 제 바지 주머니에서 태연하게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애리얼은 그의 손에 들린 휴대폰을 불안하게 주시했다. 혹시 새로운 알림이 오지는 않았을까. 초조함에 떨리는 시선이 줄곧 까맣게 잠긴 화면을 향했다. 휴대폰의 부재는 그녀에게 상상 이상의 불안감을 선사했다. 접근 알림도 확인할 수 없고 공략 대상의 동태도 전혀 파악할 수 없다는 게 이토록 답답할 줄이야.

“애리얼.”

그의 목소리에 휴대폰에만 못 박혀 있던 애리얼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의 눈과 똑바로 마주친 순간 그녀가 말했다.

“돌려줘.”

“싫어, 주인님.”

렉시우스는 휴대폰을 다시 바지 주머니에 넣으며 천천히 걸어왔다. 이윽고 그녀의 발치에 도달하여 무릎을 꿇고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다른 용건은 없어?”

“없어. 그러니까 그것만 놓고 가.”

“싫은데.”

그는 막무가내였다. 애리얼은 뭐라고 한마디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이러면 또 저번처럼 초커가 마력을 발산할 테고, 렉시우스는 제 목이 베이든 말든 억지를 부릴 것이다.

애리얼은 그걸 두 번이나 겪을 담력이 없었다. 짙었던 피비린내를 떠올리자 또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왜 이러는 거야? 왜 주기가 싫은데?”

“네가 좋아서.”

생뚱맞은 답변에 애리얼은 할 말을 잃었다. 이게 바로 그 좋아해서 괴롭힌다는 건가. 어이가 없었다.

“……이러면 내가 선배를 더 거북하게 여기게 될 텐데.”

“언젠 안 그랬던 것처럼 말하네?”

“지금보다 더 거북하게 여길 거라고 말하는 거야.”

애리얼은 지지 않고 조곤조곤 말을 이어 갔다.

렉시우스는 고민에 빠진 듯 눈동자를 굴리다가 그녀의 무릎에 제 이마를 기댔다. 치마 위로 무릎을 누르는 감각에 애리얼은 손가락을 말아 쥐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숙인 그의 고개, 붉은 머리칼이 뒤덮은 뒤통수 아래로 드러난 목덜미에 은색의 초커가 보였다.

종속의 증거를 달고서 무릎을 꿇었음에도 렉시우스는 종자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애리얼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 작은 소리에 반응하여 그가 입을 열었다.

“이미 날 거북해하는데, 더 거북하게 여긴들 똑같지 않나?”

“선배…….”

“이걸 가지고 있으면 넌 무조건 날 찾게 되어 있는데, 왜 내가 이걸 돌려줘야 해?”

렉시우스가 숙였던 고개를 들고 애리얼을 올려다보았다. 초점이 나간 금색 눈동자와 조소에 가까운 미소를 지은 얼굴이 그녀의 눈동자에 담겼다.

애리얼은 형용할 수 없는 오싹함을 느끼고서 낯을 굳혔다.

그는 눈꼬리를 접으며 밝게 웃더니 치맛자락을 붙든 애리얼의 작은 손을 감쌌다. 그녀의 손이 흠칫 떨렸다. 렉시우스는 저를 거북해하는 그 떨림마저도 애틋한 듯이 기꺼워하고 있었다. 재차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무릎에 뺨을 대었다.

얇은 여름용 원피스의 옷감 너머로 무릎에 닿은 뺨의 온기가 느껴졌다.

그 불편한 자세를 한동안 유지하던 그는 밖에서 메튼이 부르는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기다릴게, 주인님. 또 불러 줘.”

애리얼은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방을 나가는 그의 뒷모습만 보면서 꽉 쥐었던 주먹을 스르르 풀었다.

***

아카데미 개학까지는 앞으로 하루가 남았다.

애리얼은 여전히 대공저에 있었다.

그간 그녀는 휴대폰을 되찾기 위해 갖은 행동을 벌였다. 그에게 손을 뻗어 달려들기도 했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들어주겠다고 회유하기도 했으며, 몰래 그의 방이나 집무실로 숨어들어서 그의 중요한 물건을 똑같이 훔쳐 내려고도 했다. 그 과정에서 초커가 발동되어 그는 두 번 더 피를 흘렸다. 그리고 그 두 번 다 애리얼이 먼저 꼬리를 내렸다.

그러는 내내 렉시우스는 성질 한번 부리지 않고 여유로웠다. 그는 애리얼이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저를 주시하는 걸 즐기고 있었다. 일부러 그녀를 도발하기도 했다.

피를 흘려도 좋아하는 그를, 애리얼은 도무지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몰랐다.

뾰족한 수는 없는데 시간만 속절없이 흐른다.

오늘도 애리얼은 그를 마주하고서 그의 손에 들린 휴대폰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렉시우스는 얄밉게 웃으며 손가락 사이에 끼운 휴대폰을 그녀의 눈앞에서 흔들어 댔다.

“이게 뭐기에 그렇게 집착하는 거야?”

약이 오를 대로 오른 애리얼은 휴대폰을 향해 손만 휙 뻗었다. 렉시우스는 여유롭게 그녀의 손을 피하고서 휴대폰을 휙휙 돌려 보았다. 희한한 생김새에 도무지 기능을 알 수 없는 물건.

“사실 무시하고 가면 그만인데, 이것 때문에 묶여 있는 거잖아, 너.”

“…….”

“나야 좋지만, 좀 웃기네.”

그는 빙긋 웃으며 바지 주머니에다 휴대폰을 챙겨 넣었다.

애리얼은 그 꼴을 그냥 바라만 봐야 했다. 힘으로는 도무지 이길 수가 없는 상대였다. 그렇다고 초커의 힘을 빌릴 수도 없지 않은가. 목이 잘려도 상관없다는 양 웃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소름이 끼쳤다.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내일이면 그와 함께 아카데미로 가야 하는데, 휴대폰도 없이 괜찮을까. 접근 알림도 없는 상태에서 공략 대상들과 부대껴야 하는 게 영 탐탁지 않았다. 그들의 위치도 호감도도 확인하지 못하는 상태로 그들을 잘 피해 다닐 수 있을지.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돌려줄 건데?”

“글쎄, 난 지금이 마음에 들어서.”

“……원하는 걸 말해 줘.”

“네 쪽에서 먼저 제안해야지. 난 지금이 좋다니까?”

“…….”

“말하는 게 구미가 당겨야 내가 이걸 줄 생각이라도 해보지.”

“자, 잠깐만! 생각해 볼게…….”

애리얼이 관자놀이를 누르며 눈동자를 굴렸다.

고민에 빠진 애리얼을 즐겁게 감상하던 렉시우스가 문득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야.”

“급히 보고할 이야기가 있어서 왔습니다.”

익숙한 목소리에 애리얼도 뒤늦게 고개를 돌렸다.

렉시우스가 대공자의 지위를 버린 후에도 여전히 그의 보좌관으로 그를 수행하는 중인 메튼이었다.

메튼은 애리얼은 보지도 않고서 렉시우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말씀하신 그분께서 오늘 방문하신다고 합니다.”

“몇 시에?”

렉시우스의 물음에 메튼은 그의 가까이 다가가 목소리를 낮춘 채 귓속말을 전했다.

렉시우스는 메튼의 말을 가만히 듣다가 애리얼을 흘긋 보았다.

“주인님, 생각할 것도 있을 텐데 먼저 방으로 돌아가 있을래?”

자리를 피해 주길 원하는 말투였다.

누가 오기에 저러는 걸까.

애리얼은 호기심을 숨긴 채 고개를 끄덕였다.

고분고분 물러나는 그녀의 모습에 렉시우스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생각이 정리되면 불러 줘. 한 한 시간쯤 후에.”

한 시간은 걸릴 사안이라는 소리였다.

궁금증이 일었으나 애리얼은 굳이 질문하지 않고 몸을 돌려 계단을 올라갔다.

렉시우스는 애리얼이 3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지켜본 후에야 걸음을 옮겼다.

3층 복도에는 일레나만 있었다.

애리얼은 일레나의 시선을 받으며 객실 안으로 들어갔다.

십 분 정도가 지나자 일레나가 조용한 발걸음으로 3층 복도를 떠났다.

주변이 완전히 고요해지자 애리얼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방을 나왔다.

다행히 복도는 비어 있었다.

일레나가 애리얼의 전담 시녀로 배정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녀가 온종일 문 앞을 지키고 있지는 않았다. 어차피 애리얼을 감시하는 건 렉시우스 하나로도 충분했고, 또 애리얼은 휴대폰 없이 대공저를 떠나지 않을 테니까.

애리얼은 사용인이 없는 틈을 타 걸음 소리를 죽이며 계단으로 갔다. 저를 보내면서까지 그가 만나는 상대를 확인하고 싶었다. 혹시 공략 대상 중 하나일까. 다툼이라도 일어나면 그사이에 휴대폰을 빼 올 기회가 생길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더라도 도움을 요청할 수 있고.

‘일단은 대공저의 사람이 아니니까 내 말을 들어줄 확률이 있긴 해.’

적어도 대공저의 사용인처럼 감시하지는 않겠지.

애리얼은 조용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렉시우스는 애리얼의 주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객실 바로 아래층에 있는 제 방에서 대부분의 용무를 봤다. 그러니 방문객도 제 방에서 만날 것이다.

‘아마도…… 그럴 거야.’

휴대폰이 없는 탓에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애리얼은 제 추측을 믿었다.

***

렉시우스는 셔츠를 벗고서 붕대를 제거했다. 위장술을 풀자마자 아직도 아물지 못한 상처가 드러나 피를 뱉어 냈다.

아리앨라는 고개를 기울이며 상처를 관찰했다.

오른쪽 어깨부터 왼쪽 옆구리까지, 사선으로 푹 팬 상처에서는 저주의 기운이 물씬 풍겼다.

“한 달 정도 되셨다고요.”

“한 달 하고도 이 주 정도.”

“이 상처를 달고 그 긴 시간을 버티셨어요?”

아리앨라가 그의 상처에 손을 올리고서 해제술식을 펼치며 물었다.

“고통이 심하셨을 텐데요.”

“그렇긴 한데, 참는 것 말고는 딱히 방법도 없잖아.”

“저를 더 일찍 부르시지 그러셨어요.”

“백작을 믿을 수가 없어서.”

“지금은 신뢰가 생기셨나요?”

“딱히?”

렉시우스가 아리앨라의 자존심을 은근히 자극하며 웃었다.

“하는 거 보고 생각해 볼게.”

“열심히 해야겠네요.”

아리앨라도 마주 웃으며 술식을 마무리했다.

스카이라가 건 저주에 맞춰 조정된 해제술식이 그의 상처를 파고들었다.

술식이 상처 속에 남은 저주를 태우며 타는 듯한 고통을 일으켰다. 일반인이라면 기절하고도 남았을 고통이었으나 렉시우스는 미간을 구기는 정도로 참아 냈다. 이미 저주에 허덕인 시간이 한 달이 넘는다. 고통에는 꽤 익숙해진 차였다.

삼십 분이 지나자 아리앨라가 술식을 거두고 물러났다.

“이제 상처가 아물 거예요.”

렉시우스는 피로한 듯 눈을 감고서 느른하게 고개를 젖혔다. 다행히 고통의 값은 확실했다. 한 달 반가량을 그를 괴롭히던 출혈이 멎었다.

“실력은 확실한 거 같네.”

“이제 신뢰가 좀 생기셨나요?”

렉시우스는 치료술부터 써서 상처가 아무는 것을 확인한 뒤 대답했다.

“능력은 인정해.”

드디어 인정을 받은 아리앨라가 자신감에 찬 얼굴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무심한 얼굴로 셔츠를 입더니 제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희고 네모난,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 그 익숙한 형태에 우쭐하며 웃던 아리앨라가 놀라서 입을 벌렸다. 애리얼의 손에 있어야 할 물건이 왜 그의 손에 있는가.

렉시우스는 보란 듯이 테이블에 휴대폰을 놓았다. 동요하는 아리앨라의 낯을 면밀하게 훑으며 새까만 액정 부분을 손가락으로 꾹 누르고 싱긋 웃었다.

“그러니까 이것도 한번 맡겨 볼까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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