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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204)화 (192/264)

아리앨라는 놀란 심정을 차마 숨기지 못하고서 휴대폰을 응시했다.

“그걸 어떻게…….”

“아는 물건인가 봐?”

아리앨라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애리얼을 도우며 몇 번이나 관찰하고 만져 봤으니 당연히 아는 물건이지만, 그걸 티 낼 수는 없었다. 의뢰인의 개인 정보나 의뢰 내용을 함부로 발설하지 않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아리앨라는 뒤늦게 시선을 돌리며 모른 체를 했으나 렉시우스는 이미 다 아는 눈치였다. 테이블에 놓인 휴대폰을 그녀의 앞으로 밀어 주며 제안했다.

“여기에 특수한 술식이 걸려 있는 것 같아. 그러니까 백작이 해제해 주지 않겠어? 화면에 뭐가 뜨는 구조인 거 같던데, 도무지 볼 수가 없어서 말이야.”

“전…….”

“보수는 10억 실론. 선불로 5억 줄 거고, 성공하면 추가로 5억 더 얹어 줄게.”

실로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거절을 말하려던 아리앨라의 입이 다물렸다. 돈이 탐나서 그런 게 아니라, 도대체 뭐 때문에 이 정도의 돈을 거나 싶어서 말문이 막혔다.

“설마 자신 없는 건 아니지?”

단시간에 그녀의 성향을 파악한 렉시우스가 능숙하게 도발을 펼쳤다.

아리앨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물론 아니죠. 선불은 필요 없어요. 무조건 성공할 테니까, 전부 후불로 받을게요.”

자신감을 나타낸 그녀가 손끝을 뻗어 휴대폰을 완전히 당겨 왔다. 검은 액정 위에 손을 펴고 전에 애리얼이 부탁했던 때와 같은 술식을 펼쳤다.

“다만 오래는 안 돼요.”

아리앨라가 술식을 펼치자마자 코피를 흘리며 말했다.

렉시우스는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침착함을 되찾고는 물었다.

“허락된 시간은 얼마나 되지?”

“삼십 초 정도예요.”

그녀는 곧장 한계에 부딪쳐 역류하는 제 마력을 느끼면서 추가로 해제술식을 하나 더 펼쳤다. 시야를 제한하는 술식을 깨기 위해서였다.

촘촘히 덮인 술식 안으로 해제술식을 억지로 밀어 넣었다. 그녀가 감당할 수 있는 수치를 아득히 뛰어넘는 강대한 마력이 느껴졌다. 아리앨라의 꽉 깨문 입술 새로 핏물이 흘렀다.

으지직.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보랏빛의 스파크가 튀었다.

“커흑…….”

아리앨라가 격한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해 냈다. 테이블과 휴대폰 액정 위로 핏방울이 튀었다. 그녀는 가물거리는 시야를 다잡으며 휴대폰을 렉시우스에게로 밀어 보냈다.

“삼십 초!”

그녀의 짧은 외침과 동시에 렉시우스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까만 화면이 하얗게 열려 있었다.

『경고! 비정상적인 접촉입니다.』

환한 배경 안에 떠오른 까만 창. 그 안에 흰 글씨로 무언가 쓰여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처음 보는 문자였다. 도무지 읽을 수가 없었다.

‘고대 문자인가?’

지금껏 배웠던 모든 문자의 종류를 떠올리며 머리를 굴려 보는데 새로운 창이 떠올랐다.

『강제 종료 후 재부팅을 실행합니다.』

역시나 읽을 수 없는 문자였다.

화면이 깜박깜박하더니 훅 꺼졌다. 십사 초 정도 지났을 때였다. 렉시우스는 검게 잠긴 화면을 마주하고서 미간을 구겼다. 분명 십 초는 더 여유가 있었을 텐데.

도로 검어진 부분을 보자 짜증이 확 올라왔다.

렉시우스는 이를 꽉 깨물고서 애꿎은 휴대폰만 부술 기세로 꾹꾹 눌렀다. 마침 재부팅 중이던 휴대폰이 외부에서 닿아 온 충격에 스파크를 일으켰다. 검은색의 마력이 그의 손가락을 관통했다. 피부를 찌르는 따끔한 감각과 함께 극심한 두통이 몰려왔다.

렉시우스는 크게 휘청거리며 이마를 짚었다. 순식간에 상체가 기울었다. 쾅! 큰 소리를 내며 테이블을 엎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휴대폰은 이미 손에서 날아가 바닥으로 떨어진 뒤였다.

“렉스!”

들어 본 적 없던 애리얼의 밝은 목소리가 머리를 울려 댔다.

이건 대체 뭘까.

“애리얼.”

“응, 렉스.”

상냥하게 서로의 이름을 부른다.

그녀와 저는 단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는데.

씁쓸함과 함께 두개골을 쪼갤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렉스, 왜 이러는 거야?”

이번에는 공포에 질린 목소리였다.

“왜 이러냐니?”

“렉스…….”

“도망치려고 했잖아!”

“그런 적 없어. 나가는 것도 오늘 말하려고…….”

“안 믿어.”

“렉스!”

애리얼은 저를 렉스라고 부른 적이 거의 없는데, 이상했다. 그녀는 줄곧 저를 렉스라고 부른다. 기억에 없던 대화였다.

‘이런 식으로 싸운 적은 없어. 애리얼은 이런 말을 한 적이…….’

기억을 더듬을수록 골을 울리는 아픔이 강해졌다.

시야마저 가물거렸다.

렉시우스는 바닥을 짚고서 가까스로 몸을 지탱했다. 팔이 떨리고 이마에서 흐른 식은땀이 턱 끝에 맺혔다.

이 기억은 도대체 뭐지.

의문이 봇물 터지듯 불어나는데 사고를 해야 할 정신은 흐리멍덩했다. 클라우스 백작은 이미 기절한 상태였고, 호출 벨은 이 미터 정도 떨어진 테이블에 있었다.

렉시우스는 억지로 다리에 힘을 주고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극심한 두통이 그를 방해했다. 다시금 힘이 풀려서 상체가 고꾸라졌다. 이번에는 근처에 있던 의자를 건드리며 무너졌다.

쿵!

둔탁한 소음이 방을 크게 울렸다. 동시에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카스트로?”

렉시우스가 바닥을 짚은 채 고개를 들었다. 보좌관을 예상한 그의 앞에 나타난 건 뜻밖에도 애리얼이었다. 놀라다 못해 아연해진 그는 상황 파악조차 빠르지 못했다.

놀란 건 애리얼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피를 토한 채 기절한 아리앨라와 바닥에 쓰러지다시피 한 렉시우스를 보고서 당황했다.

그래도 두통에 시달리던 중인 렉시우스보다는 먼저 정신을 차리고 움직였다. 예리해진 흑색 눈동자가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을 금세 포착했다.

휴대폰의 액정 위로 검은 스파크가 일고 있었다.

애리얼의 눈이 크게 뜨였다.

마력이 감도는 휴대폰, 기절한 아리앨라.

백작저에서 아리앨라를 통해 데본시아의 호감도를 확인했던 때와 상황이 비슷했다.

‘해제술식을 써서 내 휴대폰을 열어 보려고 했구나!’

애리얼은 순식간에 전후 상황을 파악하고서 휴대폰부터 주워 들었다.

그녀의 손에 닿자마자 경고 창이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마도구가 제 주인을 찾은 것이다.

그제야 렉시우스는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극심한 두통과 이명이 이어지는 탓에 사지를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 머릿속에서는 들어 본 적 없던 애리얼의 목소리가 여전히 울리고 있었다.

“렉스.”

다정하게 부르는 음성이 기꺼우면서도 쓰라렸다. 처절함이 만들어 낸 환청인가. 기억에도 없는 목소리에 가슴이 아렸다. 간신히 한쪽 무릎을 세운 채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애리얼은 사색을 하고 그의 손을 피해 물러났다. 네모난 그 물건에 손가락을 올린 채.

무언가를 직감한 렉시우스가 다급히 일어나서 소리쳤다.

“거기서 손 떼!”

사납게 외쳤으나 애리얼은 아예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벗어났다. 쫓아가려고 했으나 몸이 따라 주질 않았다. 머리는 계속 깨질 것처럼 아팠다. 그는 이마를 부여잡고서 휘청거렸다.

“그만두라고! 젠장……! 애리얼!”

그의 외침에도 애리얼은 동요하지 않았다. 침착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꾹 눌렀다.

『‘비상 탈출’을 사용했습니다.

사용자가 가장 먼저 떠올린 장소로 즉시 이동합니다.』

“애리얼!”

렉시우스가 처절할 만큼 갈라진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이미 그녀는 사라진 후였다.

***

세찬 마력이 주위를 감쌌다.

시야가 뒤집혀 바뀌는가 싶더니 익숙한 천장이 나타났다.

애리얼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등 뒤로 푹신한 매트리스의 감촉이 느껴졌다. 부드러운 시트를 짚고서 상체를 일으켰다. 청록색의 벽지, 고동색의 가구들이 보였다.

“백작저…….”

자신의 방으로 왔다.

‘비상 탈출’이 제대로 발동된 것이다.

애리얼은 한숨을 쉬며 풀썩 침대에 널브러졌다. 백작저는 여느 때처럼 조용했다. 아직은 대공저에서 연락이 오지도 않았을 테고, 백작저의 사람들도 자신이 이곳에 있는 걸 모르겠지. 찰나일 평온함에 애리얼은 눈을 감았다.

백작저로 돌아왔으나 안도감이 들기는커녕 심란하기만 했다.

마지막으로 본 렉시우스와 아리앨라의 모습이 마음을 괴롭혔다. 코와 입으로 피를 흘리며 기절한 아리앨라, 휘청거리며 처절하게 자신을 부르던 렉시우스.

그의 방으로 접근했던 애리얼은 문에 귀를 대고 몰래 방 안의 동정을 살폈다. 혹시나 난입할 기회가 있을까,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방음이 꽤 철저한 탓에 대화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난입해 들어갈까 고민하던 차에 쾅, 하고 커다란 소음이 울렸다.

안쪽의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놀라 굳은 탓에 애리얼은 난입할 기회를 놓쳤다. 잠자코 숨을 죽이다가 두 번째로 큰 소음이 들린 순간, 방 안으로 진입했다.

그리하여 마주한 장면은 그녀의 예상을 한참 빗나갔다.

‘선배가 설마 내 휴대폰을 파헤치고 있었을 줄은…….’

기절한 아리앨라를 발견했을 때, 그녀를 향한 걱정과 동시에 발밑이 꺼지는 듯한 끔찍한 공포를 느꼈다.

혹시 렉시우스가 휴대폰의 용도를 알았을까. 그 안에 있는 프로필 창들을 봤을까. 그를 포함한 공략 대상들의 초상화와 실시간으로 표시되는 위치 정보를 봤을까.

‘……모르겠어.’

마지막으로 본 렉시우스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애리얼은 그를 부축할까 하다가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 생각을 버렸다.

“거기서 손 떼!”

렉시우스의 그 말은 애리얼의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

그는 휴대폰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 아는 것 같았다. 휘청거리면서도 기어코 저를 향해 걸어와 손을 뻗는 그에게서 늪과 같은 소유욕을 느꼈다.

렉시우스의 하트는 다섯 개 반. 데본시아보다도 많은 수치.

알량한 걱정으로 그에게 다가가기에는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하지만 내일이 개학인데…… 아카데미에서는 어쩌지?’

그와는 충성의 맹세로 묶인 관계였다. 싫어도 어떻게든 마주하기는 해야 할 터.

애리얼은 피로한 얼굴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다가 눈을 가늘게 뜨고 휴대폰을 켰다.

『기본 도움말이 추가되었습니다.』

『모든 도움말이 열렸습니다.』

일주일 동안 확인하지 못했던 휴대폰에 꽤 놀라운 알림이 와 있었다.

애리얼은 눈을 커다랗게 뜨며 급하게 도움말 창을 띄웠다.

『▽기본 도움말

*각 캐릭터의 프로필을 통해 호감도와 위치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공략 대상의 호감도를 올리면 스토리가 자동으로 진행됩니다.

*엔딩을 보기 위해선 호감도 ♥♥♥ 이상의 공략 대상이 최소 한 명은 존재해야 합니다.

*한 캐릭터의 호감도가 ♥♥♥♥ 이상이 되면 해당 캐릭터의 개별 루트에 진입합니다.

*개별 루트에 진입하면 타 캐릭터의 호감도를 올리기 어려워집니다.

*다중 루트에 진입하면 동시에 여러 개의 엔딩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엔딩은 넘기고 진행할 수 있습니다.

*호감도 ♥♥♥♥♥♥의 오버히트 상태에서는 강제 엔딩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오버히트 상태에서는 강제 엔딩을 맞…….”

애리얼은 미처 말을 마치지도 못한 채 화면을 주시하다가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다.

『*공략 대상에게 할당된 호감도는 5개까지입니다.

6개부터는 ‘오버히트(overheat: 과열)’ 상태로, 극단적인 엔딩을 마주할 확률이 매우 높아집니다.』

충격에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웠던 경고.

그 경고 창과 새로운 알림이 시사하는 바는 명확했다.

오버히트 상태에서는 극단적인 엔딩을 마주할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

오버히트 상태에서는 강제 엔딩을 맞을 수도 있다.

즉, 공략 대상이 오버히트인 상태에서는 극단적인 엔딩을 강제로 맞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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