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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205)화 (193/264)

점점 극단적으로 치닫는 상황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어떻게 하면 좋은가. 애리얼은 초조하게 입술을 씹었다.

렉시우스는 절대 만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황자비라는 자리를 피하기 위해서는 그가 필요했다. 대공자였던 그와 충성의 맹세로 맺어진 덕에 결혼 내지는 약혼을 미룰 수 있었던 거였으니까. 그와의 사이가 멀어진 채 아카데미로 돌아가면 다시금 황자비에 대한 압박이 강해질 게 뻔했다.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

그런 와중에 곧 렉시우스의 생일이 있다.

애리얼은 머리가 아파져서 휴대폰만 꽉 쥐었다.

지이이잉-

손안에서 휴대폰이 진동했다. 잔떨림이 손가락을 타고 올라왔다.

『공략 대상이 근처에 있습니다.』

화면에 떡하니 뜬 알림에 애리얼은 크게 소스라쳤다. 비명이 나오려는 입을 막으며 지도를 확인했다.

『레이신 디 솔렘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과 깊은 관계가 되고 싶어 합니다. 당신을 쫓아다니고, 붙잡고 싶어 합니다.)

▷현재 위치: 허클리 백작저 본관 - 1층 복도』

요주의 공략 대상들에 비해 현격히 낮은 호감도가 안도감을 불러왔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레이신이 왜 뜬금없이 백작저에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었다. 불안한 것도 없지 않았다.

경계심이 어린 눈으로 그의 초상화를 관찰했다.

느릿하게 복도를 돌아다니는 그의 움직임은 딱히 목적지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만나 봐야 상황이 파악될 것 같다.

‘슬슬 일어나야지.’

애리얼은 휴대폰을 쥐고서 몸을 일으켰다.

때마침 벌컥, 문이 열리며 카논이 들어왔다. 손에는 까만 청소용 솔을 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오후 두 시쯤에 청소를 했던가.

무표정한 얼굴로 방에 들어선 카논은 침대에 앉은 애리얼을 보고서 들고 있던 솔을 떨어트렸다.

“아가씨?”

“어……. 안녕.”

다소 어색한 상황에서 오랜만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애리얼은 머쓱하게 웃었다.

“미리 말을 하려고 했는데, 피곤해서 쉬다가 보니 이렇게 됐네.”

“언제 오신 거예요? 대체 어디로, 어떻게…….”

“마도구로 순간 이동을 했어.”

“대공자…… 크레시앙 공자 서하는 어디 계신데요?”

“아마도 대공저에…….”

애리얼이 말끝을 흐리자 카논은 더 이상 질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대강 알았다는 표시였다.

***

애리얼은 1층으로 내려가 제 귀환을 알렸다. 레이신은 보이지 않았다. 그새 어딜 갔는지 궁금했으나 당장 우선할 일은 아니었다. 일단은 백작을 만나는 게 먼저였다.

애리얼은 주기적으로 백작과 티타임을 가졌던 응접실에서 자초지종을 늘어놓았다. 황자비에 대한 일부터 대공저에 억지로 붙들려 있다가 탈출한 일까지. 휴대폰만 적당히 마도구로 치환하여 설명했다.

백작은 시종일관 차분하게 애리얼의 설명을 들었다. 대공저의 동향을 보고서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던 듯 보였다.

“그래서 너는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니?”

“우선은 집에 머무르며 동향을 파악하고 싶습니다. 크레시앙 공자 서하와 얼굴을 맞대는 건 피하고 싶어요. 황자 저하도 마찬가지고요.”

“그렇구나.”

“그래서 이번 후학기는 빠지고 싶어요. 아카데미에 가면 얼굴을 마주하는 걸 피할 수 없으니, 한 학기만이라도 휴학계를 냈으면 해요.”

애리얼은 긴장한 얼굴로 제 의견을 피력했다.

백작은 모호한 표정이었다. 잠시 침묵하며 찻잔만 만지작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애리얼은 피가 말랐다.

황립 아카데미는 휴학이 어려웠다. 특별한 사유가 없는 경우에는 한 학기를 통으로 결석 처리 하고 그대로 성적을 깎아서 다음 학기에 반영했다. 그냥 퇴학만 당하지 않을 뿐이었다. 그러니 다음 학기에 무조건 좋은 성적을 받을 자신이 있는 게 아니라면 휴학은 절대 안 하는 게 좋았다.

물론 올해를 마지막으로 특별 엔딩을 달성해 떠날 생각인 애리얼에겐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백작은 그걸 모른다. 백작의 관점에서 판단하자면 애리얼이 황립 아카데미를 휴학하는 건 도박수도 아니고 자충수였다. 렉시우스와 엮이는 거나 황자비가 되는 건 호재에 가까웠고.

그래서 애리얼은 백작에게서 단번에 휴학을 허락받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밤새 설득할 각오도 있었다. 그래도 안 되면 부상을 꾸민다든지, 아픈 척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백작은 의외로 쉽게 허락을 말했다.

“그러렴.”

전혀 기대치 않은 대답이었다. 애리얼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백작을 보았다.

백작은 무표정했으나 화난 기색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약간은 애리얼을 걱정하는 듯도 했다.

“한 학기 쉬는 것도 괜찮지. 아카데미에는 내가 말해 둘 테니 당분간 바깥의 일은 신경 쓰지 말거라.”

“……감사합니다, 어머니.”

애리얼은 얼떨떨한 심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일이 의외로 술술 풀려서 당황스러웠다. 조금 의심스럽기까지 한 지경이었다.

백작은 무슨 생각일까. 은근슬쩍 백작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는 여느 때처럼 차분하고 조금은 고지식해 보이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속내를 읽는 건 무척 어려웠다.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골치 아픈 일을 덜어 주겠다는 백작이 고마웠다.

애리얼은 시선을 내리깔고서 조용히 응접실을 나갔다.

“도망쳤다며.”

막 문을 나온 그녀를 향해 당혹스러운 소리가 날아들었다. 어딜 갔었는지 잠시 사라졌었던 레이신이었다. 백작저의 사용인들은 그의 존재가 익숙한 듯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복도를 빠져나갔다.

벽에 기대선 그는 늘 보던 약간은 허술하게 느껴지는 셔츠 차림이었다. 느슨하게 땋은 금발도 여전했으나, 그 긴 머리칼을 매듭지은 것은 전에는 보지 못했던 리본이었다. 길게 늘어진 검은색의 벨벳 끈이 묘하게 어색했다.

“어때?”

레이신이 애리얼의 시선이 제 머리 끈에 가 있는 것을 알아채고서 물었다.

“괜찮아?”

“리본, 말씀이세요?”

“응.”

“네……. 잘 어울려요.”

지나치게 대충 감아 묶은 리본은 전혀 예쁜 모양이 아니었으나 애리얼은 적당한 칭찬으로 얼버무렸다. 지금 중요한 건 리본이 아니었다.

“그보다 서하께선 왜 여기에 계신가요?”

“네가 대공저에서 도망쳤길래, 얼른 이쪽으로 와 봤어.”

레이신은 애리얼을 몹시 당황스럽게 만드는 말을 늘어놓았다. 애리얼은 잠시 멈칫했다가 횡설수설 질문을 꺼냈다.

“도망이라니……. 그보다 그걸 어떻게 아시고……?”

“저번에 대공저에 갔을 때, 너한테 술식을 하나 걸어 놓고 왔거든.”

저번이라면 그의 생일, 그 난장판에서 말인가.

“대체 언제……. 무슨 술식을요?”

“추적술식. 네가 아직은 렉스를 믿는 거 같아서, 불안해서 걸어 뒀어. 미안해. 대공저로 곧장 가고 싶었는데 단신으로 들어가기가 어려워서…….”

그러니까 대공저에 침입하는 건 실패하고, 미리 걸어 둔 술식으로 위치가 변한 걸 보자마자 곧장 백작저로 왔다는 뜻인데.

“……불안하다니요? 충성의 맹세 때문인가요?”

“그것도 그렇지만, 정확히는 맹세가 이루어지고 렉스가 네게 할 행동이 불안해서야.”

“그게 어떤 건지…… 물어도 될까요? 설명해 주실 수 있으세요?”

애리얼은 대비하고 싶었다. 레이신이 불안하게 여길 정도라면 알아 두고 싶었다.

그는 불안으로 흔들리는 애리얼의 눈동자를 보고서 주저하다가 입을 움직였다.

“크레시앙 대공가의 인간들은 기이할 정도로 빠른 회복력을 타고 태어나. 그건 그들의 마력에도 해당하는 이야기야. 그래서 그들의 마력으로 구현한 특정 술식은 부숴도 금방 회복돼. 몇 번이고 다시 재생되어서 그 위력을 발휘하지. 부수든 파기하든 지워 버리든, 모두 무용지물로 되돌리고서 원래의 그 기능을 수행해.”

레이신은 그 정도로 설명을 마쳤다.

그 정도로 충분했다.

애리얼의 낯이 창백해졌다.

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었다. 뼛속까지 한기가 스미는 듯 끔찍할 정도로 오싹해진다.

“그러면 충성의 맹세는…….”

“널 어떻게든 옆에 붙들어 두기 위한 하나의 방편. 가장 순한 수를 맛보기로 보여 준 거지.”

충성의 맹세가 가장 순한 수라고, 레이신은 말했다. 렉시우스를 너무나 잘 안다는 눈을 하고서.

애리얼은 헉, 숨을 들이켜다가 입을 틀어막았다. 공포로 꽉 죄어든 속이 불편했다.

렉시우스는 원한다면 그녀를 영원히 붙잡아 둘 감옥을 만들 수도 있었다. 아무리 부수어도 계속해서 그녀를 가둘 무간지옥과도 같은 공간을, 크레시앙 대공가에서도 특출난 그의 마력으로…….

‘설마…….’

애리얼은 믿고 싶지 않았다.

부디 부정해 주길 바라며 레이신을 바라보았다.

선명한 금빛의 눈동자가 애리얼을 향했다. 렉시우스와 닮은 그 빛깔에 애리얼은 오금이 저렸다. 렉시우스를 잘 아는 그의 오랜 친우. 그런 친우가 전한 크레시앙 대공가의 특징. 너무도 두려운 이야기.

레이신은 쓸데없는 말을 지어내는 사람이 아니다.

그걸 너무나 잘 알기에, 그가 말해 준 것들이 전부 진실임을 알기에…….

‘선배랑은…… 렉시우스랑은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아.’

얼굴을 보는 것도 싫었다. 두려움이 배가 되어 사지를 떨리게 했다. 그의 목에 걸려 있을 초커를 부수고 싶었다.

“크레시앙 공자 서하를 더는 만나고 싶지 않아요. 맹세를 깨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애리얼은 겁에 질린 모습으로 레이신의 팔을 붙들었다.

그녀의 돌발 행동에 레이신이 움찔 떨었다. 그녀가 이런 적이 없던 탓에 그는 크게 동요한 상태였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어정쩡한 자세로 애리얼에게 팔을 내 주었다.

애리얼은 애매하게 뻗어진 그의 팔을 절박하게 쥐었다. 그가 아니면 이제 기댈 곳이 없었다. 데본시아도, 스카이라도, 호감도가 지나치게 높았다. 렉시우스와 비슷한 권력을 지니고 견제할 수 있는 이는 그밖에 없었다. 황족 형제는 렉시우스와 동일한 수준으로 위험하고, 어머니인 백작은 그를 견제할 힘이 없었다.

아직 하트가 세 개 반으로 낮은 편인 그가 풍랑 속의 유일한 구명정이었다.

“제발 부탁해요……, 서하.”

애리얼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굳은 얼굴로 그녀를 보던 레이신이 제 팔뚝을 간절하게 붙잡은 그녀의 손을 덮어 잡았다. 그는 그녀를 초조히 마음 졸이게 만들며 침묵하다가 조용히 입술을 움직였다.

“우선은 렉스부터 피하고 생각하자, 애리얼.”

무슨 뜻일까.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우우우웅-

접근 알림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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