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붙든 애리얼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서, 서하…….”
“괜찮아. 방에 들어가 있어.”
레이신이 애리얼의 손을 쥐고서 계단으로 이끌었다.
“무슨 소리가 들려도 나오지 말고.”
그가 붙잡고 온 그녀의 손을 세게 쥐고서 당부했다. 대공저에서 렉시우스가 제정신이 아니라며 경고했던 그때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서.
애리얼은 잠깐 주저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설령 굉음이 울리더라도 방 안에만 박혀 있으리라, 각오를 다졌다. 먼저 그에게 도움을 구한 만큼, 그가 당부한 내용을 제대로 따를 것이었다.
다만, 그녀도 그에게 한 가지는 당부하고 싶었다.
“그래도 어디 다치지는 마세요. 위험할 것 같을 땐 그만뒀으면 해요.”
저번과 같은 일이 반복될까 봐, 걱정에 꺼낸 말이었다.
레이신은 묵묵히 듣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뺨을 조금 붉힌 것도 같았다. 금세 몸을 휙 돌려 버리는 바람에 잘 보지는 못했지만.
애리얼은 복도를 걸어 나가는 그를 불안하게 바라보다가 조용히 계단을 올라갔다.
그녀의 발걸음이 내는 미세한 소음이 위층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레이신은 걸음을 멈췄다. 머릿속에는 애리얼이 건넸던 걱정이 꽉 들어차 있었다. ‘어디 다치지는 마세요.’ 전하던 차분한 음성. 그걸 몇 번이고 곱씹었다. 고작 말 한마디에 이토록 설레다니. 그는 열이 오른 뺨을 뒤늦게 찬 손등으로 눌러 식혔다. 꼭 들어주고 싶은 당부였다.
‘근데, 어떻게 안 다치고 렉스를 저지하지?’
애리얼의 성격이라면 렉스가 다치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을 터. 애리얼의 도주로 머리가 돌아 있을 렉시우스는 분명 무력을 사용할 텐데. 레이신은 렉시우스가 와 있을 현관문으로 가는 복도에서 잠시 고민에 빠졌다.
‘별수 없으면 힘으로 제압하고 애리얼만 모르게 하면 되겠지.’
우선 말로 해 보고 안 되면 순간 이동을 써서 애리얼의 눈이 닿지 않는 장소로 가면 된다. 거기서라면 싸워도 문제없을 터.
그는 싸우지 않는 건 아예 고려치 않고 있었다.
애초에 힘을 쓰지 않고 렉시우스를 제압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렉시우스는 지금 대화가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애리얼은 다칠 바에는 그냥 렉시우스를 제압하지 말고 보내라는 듯 말했지만, 그는 그러기 싫었다. 렉시우스를 애리얼에게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눈이 뒤집힐 것 같았다.
레이신은 흐려지려는 이성을 다시 차분하게 다스렸다.
렉시우스만큼은 아니더라도 자신 역시 꽤 제정신이 아님을 느꼈다.
본관 문을 나서는 그의 걸음에 힘이 들어갔다. 애리얼에겐 미안하지만 다치더라도 렉시우스를 막는 게 우선이었다.
현관문의 포치 아래, 장거리 순간 이동의 여파로 코피를 흘리는 렉시우스가 보였다. 금색의 눈끼리 마주치자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서로에게 느끼는 분노가 선연히 드러났다.
레이신은 조용히 렉시우스를 주시한 채 은밀한 동작으로 숨겨 온 단도를 꺼내 쥐었다. 렉시우스가 곧장 저에게 달려들 거라 생각했다. 안 그래도 눈이 돌아 있을 텐데 백작저에서 나오는 저를 보았으니 분노가 정점을 찍었으리라.
그런데 웬일인지 렉시우스는 레이신을 가만히 보기만 했다.
“서하, 부디 돌아가 주셨으면 합니다.”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듯한 목소리에 렉시우스의 시선이 돌아갔다. 레이신의 시선 역시 그를 따라갔다.
놀랍게도 백작이 무릎까지 꿇고서 렉시우스를 막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간절한지, 원래라면 아랑곳하지 않았을 렉시우스마저도 걸음을 멈추게 만드는 행동이었다.
“제게 불이익을 내리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추후 날을 잡아 오늘의 일을 사과드리고 성대히 보답하겠습니다. 그러니 백작저의 준비가 소홀한 오늘만큼은 그만 돌아가 주시길, 이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고개 숙인 백작을 렉시우스는 무시하지 못했다. 그러나 돌아가겠다고 물러나지도 않았다. 그는 그대로 절박했다.
“말만 나눌게. 얼굴까지는 못 봐도 좋아.”
“서하…….”
“부탁할게, 백작.”
우직할 정도로 굳건히 그를 막던 백작이 흠칫 놀랐다. 크레시앙의 공자가, 이전에 대공자였던 이가 부탁을 말하고 있었다. 애리얼을 위해 제 미래를 포기한 이가, 제 주인 된 이를 만나기 위해서 고개를 숙였다. 흐르는 코피를 닦지도 않고서 냅다 무릎을 꿇었다.
백작은 당혹스러워하며 몸을 더 낮추었다. 귀족 된 이가 대리석 바닥에 엎드리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황족의 핏줄인 대공가의 공자가 그녀에게 무릎을 꿇었다. 한낱 백작에게 무릎을 꿇었다.
“부탁해.”
“하, 하지만…….”
“렉스.”
누가 볼까 두려운 광경을 앞두고 레이신이 끼어들었다. 단도는 주머니에 도로 숨기고서 굳은 낯으로 렉시우스에게 말했다.
“일단 나하고 먼저 얘기해.”
렉시우스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서 레이신에게로 두 눈을 향했다. 렉시우스의 얼굴은 무표정했으나 눈에 담긴 감정에는 살기가 선명했다.
“네가 뭔데?”
“애리얼과 만나게 해 줄게.”
“……서하!”
백작이 레이신을 보며 경악하여 소리쳤다.
“내가 얘기하는 게 나을 거야. 내가 지켜보고 있을 거니까, 큰 문제가 나지 않을 거고.”
“하지만!”
“어차피 백작은 무릎 꿇는 이상으로 할 수 있는 게 없지 않나?”
레이신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대공가의 공자가 이렇게 무릎을 꿇고 부탁하는 걸, 백작은 거부할 길이 없었다. 거부하기도 어려웠다.
“…….”
“일이 생기면 내가 책임질게. 계급이 비슷한 내가 나서야 문제도 적어질 테고.”
“……알겠습니다. 부디 딸아이에게 해가 가지 않을 방법으로 부탁드립니다.”
백작은 고민 끝에 결국 수긍했다.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로 재차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지.”
레이신은 짧은 대답으로 백작을 안심시킨 뒤 렉시우스에게 따라오라는 눈짓을 보냈다.
렉시우스는 의외로 차분함을 유지하며 그를 따라갔다.
레이신은 백작저 본관으로 들어가 이 층으로 향하는 층계참에서 멈추었다. 렉시우스는 아직 잠잠했다. 딱히 분노를 보이지도 않았고, 돌발 행동을 저지르지도 않았다. 다만 레이신의 땋은 머리를 고정해 놓은 벨벳 리본을 볼 때면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리곤 했다. 뭐가 그리도 불만인지.
잠잠한가 싶던 렉시우스는 기어코 레이신의 금발로 손을 뻗어서 리본을 쥐었다.
레이신은 무척 예민하게 반응하며 그의 손을 쳐 냈다.
“손대지 마.”
“그게 선물이었어?”
알면서 모르는 척 묻는 거다.
레이신은 리본을 고쳐 묶으며 눈을 흘겼다.
“알면 건드리지 마.”
렉시우스는 어이가 없는지 한쪽 눈썹을 치키며 픽 웃었다. 평소 꾸미는 데 무심하여 늘 흐트러져 있던 인간이 저러고 신경을 쓰니 웃기기만 했다. 저게 뭐라고. 고깝게 리본을 쳐다보다가 이 불쾌함이 질투라는 걸 깨달았다.
“애리얼.”
아까보다 훨씬 낮고 음산해진 렉시우스의 목소리에 레이신이 딱딱하게 낯을 굳혔다.
“뭐?”
“만나게 해 준다며, 네가.”
“근데.”
“이딴 데 서서 뭐 하는 거냐고.”
빨리 본론을 꺼내라는 소리였다.
레이신은 위층으로 가는 계단을 쓱 훑은 뒤 무표정하게 말했다.
“물어보고 올게.”
그 소리를 하자 렉시우스가 곧장 욕을 내뱉었다. 성질이 날 대로 나서 미간을 구기고 레이신을 쏘아보았다.
“묻기는 뭘 물어.”
“널 거북하게 여기니까, 내가 먼저 가서 묻고 오겠다는 거잖아.”
레이신의 말에 렉시우스는 험한 말을 참는 표정으로 이를 꽉 깨물다가 억지로 차분함을 유지하고서 말을 꺼냈다.
“그걸 몰라서 물은 줄 알아?”
“알면 여기서 기다려.”
“나한테 명령질 하지 마, 레이. 기분이 더럽다 못해 좆같아서 널 쓰레기장에 처박고 싶어지니까.”
“…….”
“여기 있을 테니까 빨리 묻고 오라고.”
얼마나 절박한 건지, 렉시우스는 있는 성질 없는 성질 다 죽이고서 벽에 기대섰다.
레이신은 그의 상태가 어딘지 이상하다고 느끼며 돌아섰다. 백작에게 무릎을 꿇을 때부터 기이하다고 여기기는 했지만, 자신에게까지 저러고 얌전히 구는 건 예상하지 못했다. 대체 무엇이 렉시우스를 이렇게 고분고분하게 만들었을까. 정신이 돌다 못해 어딘가 망가진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애리얼도 이런 렉시우스의 상태를 아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래야 그녀가 렉시우스를 파악하고 대처할 수 있을 테니까.
레이신은 애리얼의 방 앞에 서서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애리얼.”
“……솔렘 공자 서하?”
대답은 빠르게 돌아왔다. 그녀의 인기척이 문 너머에서 생생히 느껴졌다.
“렉스가 널 만나고 싶어 해.”
“알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직접 만나 보도록 할게요.”
애리얼은 금세 수긍하고 앞으로 나서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레이신이 다치지 말라던 그녀의 당부를 지키기 위해 물러난 것으로 판단한 모양이었다.
이대로면 그녀는 렉시우스의 페이스에 말려들지도 모른다.
레이신은 애리얼의 생각을 정정하고 경각심을 줄 필요를 느꼈다.
“애리얼, 렉스가 어딘지 이상해. 그래서 네가 만나 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상하다니요?”
애리얼의 목소리가 놀란 듯 살짝 떨렸다.
레이신은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말을 덧붙였다.
“직접 말을 나눠 보는 게 좋을 거 같아. 얼굴을 마주할 필요는 없고, 문 너머로 말하면 충분하니까 걱정하지 마. 내가 옆을 지키고 있을 거야.”
“……알겠습니다. 한번 말을 나눠 볼게요.”
그녀는 이성을 찾은 듯 차분했다.
레이신은 곧장 층계참으로 돌아가 렉시우스를 데리고 왔다.
여태 평정을 잘 유지하던 렉시우스는 애리얼의 방 문 앞에 서자 급격히 긴장한 얼굴을 했다.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똑똑 문을 두드리고서 그녀를 불렀다.
“애리얼?”
“응, 선배.”
애리얼은 문 너머에 서서 대답했다.
“무슨 일이야?”
대화를 이어 가고자 태연하게 물었으나, 그녀는 살짝 겁을 먹고 긴장한 상태였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렉시우스는 말이 없었다.
침묵은 길어졌다.
애리얼은 그가 이대로 아무 말 없이 돌아가 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러지는 않겠지. 렉시우스가 여기까지 온 이유가 있을 텐데. 그의 호감도를 생각하면 이대로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애리얼은 그에게 추궁을 당할 것이라 생각하며 침묵하는 그를 불렀다.
“선배?”
“……넌 나를 렉스라고 불렀어.”
갑작스레 이어진 그의 말에 애리얼은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렉스, 그의 애칭. 그걸로 그를 지칭한 적은 거의 없었는데.
‘설마…….’
불길함이 별안간 온몸을 휩싸며 폐부로 끼쳐 들었다. 숨 쉬기가 불편했다.
“애리얼, 너 예전에 나랑 만난 적 있어?”
어딘지 이전에 들어 본 적 있는 것 같은 질문이 렉시우스로부터 나왔다.
애리얼은 충격으로 얼어 버렸다.
“너, 예전에 나랑 만난 적 있어……?”
아카데미 1관, 고대 역사 수업 강의실이 있는 복도. 스카이라에게 던졌던 질문. 그건 회귀 전의 기억을 떠올리고서 던진 질문이었다.
“서, 선배…….”
“너도 기억해?”
“대체…… 뭘?”
“내가 경험한 적 없던 일에 대한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