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로써 확실해졌다.
렉시우스는 회귀 전의 일을 기억해 낸 것이 분명했다.
애리얼은 경악한 얼굴로 뒷걸음질을 쳤다.
휴대폰 때문이다. 자신이 휴대폰을 만지고서 명확한 기억을 떠올린 것처럼 그도 휴대폰을 만지고 기억을 떠올린 것이다. 회귀 전의 기억을…….
“넌 뭘 기억해?”
렉시우스가 물었다. 그녀에게 회귀 전의 기억이 있다는 걸 확신하는 말투였다.
애리얼은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회귀에 대한 기억을 그에게 말하기가 꺼려졌다. 그다지 좋은 기억도 없거니와, 오버히트에 가까운 그의 상태를 생각하면 더 대화를 나누는 게 무서웠다.
“선배는…… 뭘 기억하는데?”
질문으로 받아치자 그는 조용해졌다. 할 말이 없어서 그러는 게 아니었다. 렉시우스는 그저 기억을 더듬는 거였다. 돌연히 떠오른 겪지 않은 일에 관한 기억을. 애리얼이 그랬던 것처럼, 혼란스러워하며.
“……내 기억에서 너는 날 렉스라고 불렀어. 가끔은 선배라고도 불렀는데, 대체로 렉스라고 했어.”
그가 한참 만에 말을 꺼냈다.
“그리고 넌 나랑 꽤…… 친밀한 사이였어. 내가 느끼기에는 그랬어. 주관적일 수는 있는데, 뭐…… 아마 맞을 거야. 네가 그렇게 웃는 걸 본 적이 없어서……. 어지간히 친한 게 아니라면 그렇게 웃지는 않겠지.”
렉시우스는 겪지도 않은 일에 대해 떠올리며 아련한 감상에 젖어 들었다. 조금 들뜬 듯도 했다. 행복했던 과거를 그리듯.
이상도 하지.
애리얼이 기억하는 회귀 전의 일 중에 즐거운 거라곤 하나도 없었는데. 너무나 처참하여 외면하고픈 끔찍한 실패뿐이었다. 좋은 감정이라곤 추호도 없었다.
애리얼은 새삼스럽게 힘에 겨워서 눈만 질끈 감았다. 내일이면 구월이었다. 렉시우스의 생일은 구 월 십 일이었고. 특별 엔딩을 맞아야 할 그녀의 생일까지는 이제 넉 달이 남았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애리얼은 그와 이렇게 문 하나를 사이에 놓고 대화하는 것조차 극도로 불편해졌다.
다섯 개 반. 호감도가 한 번만 더 오르면 오버히트. 잘못하면 그녀에게서 모든 것을 송두리째 빼앗아 갈지도 모를 이와 실패한 과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니.
애리얼의 사고는 급속도로 냉정해졌다.
렉시우스가 회귀에 관한 기억을 떠올렸든 말든, 더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차피 데본시아에게도 회귀한 기억이 있지 않은가.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는데 네가 렉스, 렉스 하면서 거리낌도 없이 나한테…….”
“난 그런 기억 없어.”
애리얼은 즐거운 것을 회상하듯 목소리가 부드러워진 그의 말허리를 가차 없이 끊어 냈다. 최대한 차갑게 말하려고 갖은 애를 썼다.
“그만 가 줘.”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마쳤다.
렉시우스는 그녀에 의해 말이 끊긴 그 순간부터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조금씩 더 들뜨며 이어지던 저음이 사라지자 텅 빈 복도의 싸늘한 정적이 느껴졌다. 평소에도 이렇게 조용했나 싶을 정도로 작은 소음조차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렉시우스의 침묵은 길었다. 그가 어디론가 가 버린 건 아닐까 생각이 될 정도였다.
혹시나 해서 애리얼은 조심스럽게 휴대폰을 켰다.
『렉시우스 크레시앙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을 ------------)
▷현재 위치: 허클리 백작저 본관 - 2층 복도』
여전히 문 앞을 지키고 선 그의 초상화가 보였다. 위험할 정도로 높은 호감도 수치, 깨진 글자와 함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추측하는 것마저 무서울 지경이었다.
레이신이 알려 줬던 사실과 렉시우스의 비정상적인 호감도가 절로 공포를 불렀다.
제발 가 줬으면, 하고 양손을 모으며 입술을 말아 문 때였다.
“주인님.”
침묵을 깨고 드디어 입을 연 그는, 애리얼이 몹시 불편해하는 호칭을 내뱉었다.
애리얼은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숨을 죽였다.
그러나 그는 다시 침묵했다. 한 번 부르고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했다.
애리얼은 입을 열지 않았다. 지금 말하면 목소리가 떨릴 것 같았다. 어차피 할 말도 딱히 없는데. 가라고 해 봤자 렉시우스는 듣지도 않을 텐데. 되레 그의 성질만 건드리게 될지도 몰랐다. 차라리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낫지.
그녀는 그저 거북한 이 순간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다.
오 분, 십 분. 피 마르는 시간이 흘렀다.
렉시우스는 이번에도 꽤 오래 침묵하다가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애리얼.”
심해로 가라앉을 듯한 묵직한 음성이었다. 그는 다음 말을 잇기 전에 몇 초 더 침묵했다. 상대의 반응을 기다리는 것도 같았다.
애리얼은 주저하다가 무겁게 들러붙은 입술을 뗐다.
“서, 선배.”
약간 더듬거리며 말이 나갔다.
애리얼은 그를 부르고서 잔뜩 긴장한 채로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문 바깥에서 자세를 바꾸는 듯한 인기척이 들렸다.
“너, 내가 무서워?”
“응.”
애리얼은 무심코 그렇게 답했다. 어차피 아니라고 해도 그는 알아챌 것이었다. 그러니 괜찮겠지. 그는 되도록 제게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했었으니까.
그렇게 스스로 다독이며 침착하게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다음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휴대폰 화면에서 그의 초상화가 사라졌다.
오랜 침묵에 다시금 휴대폰을 확인한 애리얼은 렉시우스가 사라지고 레이신만 남은 복도를 발견했다.
***
‘무섭다고. 내가.’
그 사실이 끔찍했다.
이렇게 착하게 목에 목줄까지 매고 있는데도 무섭다고 한다.
렉시우스는 충격에 빠져서 백작저 밖으로 이동했다. 홧김에 벌인 순간 이동이었다. 오늘만 두 번째였다. 그는 어딘지도 모르는 들판에서 코피를 닦으며 걸었다.
그는 잠시 회상에 잠겼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을까.
애리얼에게서 빼앗은 하얀 마도구를 잘못 건드리고선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과 환청에 시달리다 못해 종내는 환각까지 보았다. 그러다가 모든 것이 가라앉았을 때, 그는 고통과 함께 보았던 그 환각을 계속 되새기고 있었다.
환히 웃는 애리얼, 저를 렉스라고 부르는 애리얼, 저의 손을 잡아끌며 재잘거리는 애리얼.
한 번도 본 적 없던, 제게 친밀하기 그지없던 그녀의 모습들.
전부 겪은 적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혼란스러웠고, 혼란스러운 만큼 집착했다. 해답을 원했다. 이 기억이 무엇인지. 자신이 가졌던 것인지, 혹은 가질 수 있는 것인지. 그 찰나의 장면들에 중독되었다.
그는 애리얼의 웃는 얼굴을 되새길 때마다 생각했다. 이 환각 같은 장면이야말로 자신이 간절하게 원했던 거였다고.
겪은 적 없는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필사적이 되었다.
하지만 더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아쉽다 못해 안타까웠다.
기억 속의 그녀와 자신은 연인 같은 관계는 아니었다. 아주 친한 친구, 신뢰가 두터운 관계. 그쯤으로 보였다.
그래서 그는 확신했다. 이건 겪은 적 있는 일이다, 라고.
그의 간절함이 만들어 낸 망상이라면 이렇지 않았을 거니까. 그와 그녀는 훨씬 더 진득하게 서로를 구속하는 관계였을 테니까. 고작 친구라는 관계에 만족했을 리 없다.
그리고 망상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선명했다.
“렉스!”
그는 자신이 이토록 환히 웃는 애리얼의 얼굴을, 이렇게나 생생히 그려 낼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까.
그때쯤에 렉시우스는 회귀라는 가능성을 떠올렸다. 한 번 겪었던 일. 지금과는 다른 결의 과거, 현재, 미래. 현재와는 전혀 다른 관계. 겪은 적 없는데도 겪은 일처럼 보이는 이 기억을 설명할 단어는 ‘회귀’뿐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서 큰 감흥은 없었다. 그런 거였구나, 생각한 게 다였다. 어떻게 된 건가 싶긴 했다.
회귀의 원인으로 데본시아의 얼굴이 스치듯 지나갔다. 이런 불가능에 가까운 마법은 그가 벌였을 가능성이 컸다. 어쩌면 애리얼이 스스로 벌인 일일지도 모르지. 둘 다 신성 마법사가 아닌가.
렉시우스가 회귀를 진실로 받아들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충격을 받지도 않았다. 그냥 애리얼과 신성 마법사라는 공통점을 가진 데본시아가 고깝게 느껴졌을 뿐이었다.
냉소적이다 못해 멍청할 정도로 무감한 반응이었다.
겪지도 않았던 과거를 환청과 환각으로 경험한 탓일지도 모른다.
그는 일종의 도취 상태에 빠져 있었다. 다소 비틀려 버린 지금과 달리 좀 더 희망이 있는 관계였던 회귀 전의 기억에, 온통 정신을 빼앗겼다.
그 미소를 또 볼 수 있을까.
그는 확인하고 싶었다. 혹시 그녀도 같은 기억을 찾았을까. 만약 그렇다면 회귀 전의 관계로 돌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녀가 제게 환히 웃어 주고 가볍게 애칭을 부르는 그 친밀한 관계로…….
희망에 눈이 돈 그는 몹시 들떠서 곧장 행동을 시작했다.
아리앨라를 적당히 치료해서 오늘의 일을 입막음한 뒤 돌려보내고 곧장 애리얼의 행방을 찾았다. 어차피 그가 모르는 곳으로 도망칠 수는 없었으리라. 그녀의 상황상 저를 완전히 내버려 두고 사라지지는 않았을 테니까.
황자비가 되지 않기 위해, 그녀에게는 그가 필요했다.
그의 예상대로 그녀는 백작저에 있었다. 추적 마법까지도 필요 없었다. 전화만 걸어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찾아가서 레이신을 만났다. 머리꼭지가 돌 만큼 화가 났지만, 억지로 성질을 죽였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그는 확인해야 했다. 애리얼이 전에 그와 깊은 관계였다는 걸. 어쩌면 운명일지도 모르는 사이였다는 걸. 확인받고 싶었다.
그렇게 들떠서 혼자 떠들다가 받은 답은.
“난 그런 기억 없어.”
“그만 가 줘.”
그리고 무섭냐는 물음에 돌아온 짧은 말.
“응.”
렉시우스는 그녀와 저의 관계가 회귀 전과 같아질 수 없음을 직감했다.
그 사실이 견딜 수가 없어서,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난생처음으로 겁쟁이같이 도피하고 말았다. 전장에서도 칼에 찔릴지언정 꽁무니를 빼는 짓은 용납하지 않았는데.
그런 자존심이나 체면은 그녀를 향해선 조금도 힘을 쓰지 못했다.
자괴감에 무너진 그는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평원을 멍한 얼굴로 걸었다.
“렉스.”
한참을 걷던 그는 저를 부르는 소리를 따라 건조한 시선을 움직였다.
달빛을 받은 긴 금발이 보였다. 레이신이다.
그는 레이신이 반갑지도 거북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냥 가만히 주시하기만 했다.
무슨 연유로 저를 찾아온 건지.
바람이 불어와 레이신의 금발을 흔들었다. 반짝거리는 땋은 머리 끝에 묶인 검은색 리본에 그의 시선이 향했다.
‘애리얼이 준 거라고 했지.’
그 생각이 들자 우습게도 질투가 일었다.
그토록 절망해서 반쯤 정신을 빼 놓다가도 고작 이런 데서 빤한 감정을 불태우다니.
렉시우스는 코웃음을 쳤다.
레이신이 이상하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그 시선에 보답하듯이 정신이 반쯤 나간 사람처럼 웃어 주었다.
이미 비틀린 관계라면 비틀린 대로 쥐어야지. 애리얼은 어떤 모습이건 사랑스러울 테니까.
사고는 엇나갔지만 머리는 명료해졌다.
렉시우스는 미끈하게 입꼬리를 올리고서 레이신에게 다가갔다.
“레이, 날 따라온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