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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208)화 (196/264)

레이신은 그를 경계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렉시우스의 분위기가 갑자기 변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허망하게 방황하던 얼굴이 돌연히 이지를 되찾았다.

“이런 으슥한 데까지……. 내가 걱정돼서 찾으러 왔어?”

렉시우스는 계속해서 레이신과의 거리를 좁히며 다가왔다.

분명한 위협을 느꼈으나 레이신은 물러나지 않았다.

일종의 신호였다.

대화를 할 생각으로 왔으나 상대가 그럴 마음이 없다면, 그도 굳이 대화를 할 생각은 없었다.

서로의 사이가 일 미터 이내로 좁혀지자 둘 다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먼저 공격한 것은 레이신이었다.

쥐고 있던 단도가 정확하게 그의 명치를 노리고 들어갔다. 렉시우스는 움직임이 조금 느렸다. 레이신의 단도가 그의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날카로운 날이 그대로 손등을 뚫고 나와 그의 배로 향했다.

렉시우스는 그 날카로운 날을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팔을 접으며 제 명치를 파고들도록 유도했다. 동시에 다른 팔을 들어 레이신을 향해 뻗었다. 정확하게는 그의 머리칼을 향해서.

그제야 레이신은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 렉시우스는 일부러 파고들도록 틈을 주고서 단도에 찔린 것이다. 레이신은 황급히 단도를 잡아 빼고서 다가오는 공격을 피해 물러났다.

렉시우스의 손바닥에서 날이 뽑혀 나왔다. 멀어지는 서슬의 끝을 따라 손바닥으로부터 피의 선이 그려졌다.

레이신은 렉시우스에게 꽤 큰 상처를 입혔다. 렉시우스의 팔은 그의 머리칼만 스쳤다.

그런데도 만족스럽게 웃고 있는 것은 렉시우스였다.

왜 저럴까.

레이신의 눈이 제 머리칼을 스치고 지났던 렉시우스의 손으로 향했다. 주먹 쥔 손에 감긴 검은색의 끈이 보였다. 손가락 사이로 삐져나온 벨벳의 리본이 바람에 휘날렸다.

레이신은 땋아 놓았던 제 머리칼이 스르륵 풀리는 걸 느꼈다. 꼬여 있던 금발이 고정할 힘을 잃고서 흐트러져 나부꼈다. 아뿔싸. 레이신의 얼굴이 낭패감에 물들었다.

손이 꿰뚫려 크게 다친 렉시우스가 리본을 쥐고서 승리자인 양 웃었다.

“레이, 이런 건 너한테 안 어울려.”

도발을 남긴 그가 순식간에 평원에서 모습을 감췄다.

“렉시우스!”

한 타이밍 늦게 레이신의 음성이 평원을 울렸다.

***

렉시우스는 단숨에 대공저로 돌아왔다. 제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피를 컥, 뱉어 냈다. 오늘만 세 번째 장거리 순간 이동이었다. 부하가 걸린 마력이 심하게 역류했다. 카펫이 피로 지저분해지고 입 안에서는 온통 비린 맛이 났지만 그는 웃고 있었다.

손에 감긴 벨벳의 감촉이 그를 유쾌하게 만들었다.

빼앗았다.

하하, 입가로 피를 흘리면서 소리 내 웃었다.

‘애리얼, 봐. 네가 그렇게 내 눈을 피해 레이신에게 건네려 했던 것도 결국 내 손에 있는걸.’

그러니까 너도 결국 내 손에 들어오게 될 거야.

그는 두 눈에 이채를 빛내며 레이신의 것이었던 벨벳 리본을 꽉 쥐었다.

***

피로에 잠긴 애리얼이 가만히 잠든 어두운 방 안.

서랍 속의 휴대폰, 어둡게 잠겼던 화면이 번쩍 빛났다. 렉시우스의 프로필 창, 깨져 있던 문자가 순간적으로 복구되었다.

『렉시우스 크레시앙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을 사랑하다 못해 집착하고 있습니다. 당신을 가질 수 있다면 망가뜨리는 것도 불사합니다.)』

***

여름 휴학기가 끝나고 아카데미 개학일이 되었다.

애리얼은 계속 백작저에 머물렀다. 아카데미에는 백작이 대신 전화를 걸어 휴학을 알렸다. 아카데미는 별다른 말 없이 애리얼의 휴학을 인정했다.

애리얼이 신경 쓸 일은 별달리 없었다. 이제 열흘 앞으로 다가온 렉시우스의 생일만 제외하면 말이다.

‘뭘 줘야 할까.’

그 전에 어떻게 줘야 할까.

침대에 누워서 달력을 바라보다가 베갯잇에 얼굴을 묻었다.

문을 사이에 두고 나누었던 불편한 침묵과 드문드문했던 대화 이후, 렉시우스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당장은 다행인 일이었지만, 나중을 생각하면 이렇게 벌어진 거리가 괜찮을까 싶기도 했다. 그에게서도 진심이 담긴 생일 선물을 받아야 특별 엔딩이 이루어지는데.

‘내 쪽에서 생일 선물을 챙기면 선배도…….’

하아, 엎드렸던 상체를 일으키며 한숨을 쉬었다.

다섯 개 반의 호감도를 지닌 상대에게서, 그것도 바로 어제 무서워서 보기 싫다는 듯 대했던 상대에게서 진심이 담긴 생일 선물을 받아야 한다니. 애초에 그에게 선물을 건네는 것부터가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애리얼은 근심 가득한 얼굴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쨌건 렉시우스의 생일을 챙겨야 한다.

“카논.”

“네, 아가씨.”

마침 드레스 룸에서 옷을 정리하던 카논이 애리얼의 외출복을 골라 꺼내며 말했다.

“생일 선물을 사러 가시는 거죠?”

“……어떻게 알았어?”

“이제 곧 크레시앙 공자 서하의 생신이잖아요.”

척하면 척이었다. 솔렘 공자의 생일 선물 준비를 도운 것도 그녀였으니.

“아직 볕이 따가우니 양산을 준비할게요.”

카논이 이것저것 척척 꺼내 왔다. 애리얼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욕실로 들어갔다. 카논의 준비가 워낙에 빨라서 덩달아 움직임이 빨라졌다.

***

선물을 고르는 일은 의외로 금방 끝났다.

애리얼은 처음 들어간 양장점에서 바로 선물을 낙점했다. 붉은 벨벳 위에 전시된 넥타이핀을 보자마자 곧장 포장을 부탁했다. 매끈한 몸체에 네모난 루비가 박힌 깔끔하고 단순한 디자인이었다. 렉시우스에게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미 얼굴이 화려한 사람이니 액세서리 정도는 단순한 게 좋겠지.

넥타이라고는 매지도 않는 사람이지만, 그렇기에 선물이 중복될 일도 적지 않은가.

혹시 모르니 검은색 넥타이도 사서 동봉했다. 넥타이도 없는데 넥타이핀만 보내면 자칫 조롱의 의미로 비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카논은 포장된 선물을 받아 들고서 이대로 곧장 돌아가는 거냐고 물었다. 오랜만에 나왔는데 조금만 더 놀다 가면 안 되냐는 의미였다.

애리얼은 그녀의 말뜻을 이해하곤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좋은 향이 나는 커피를 마시고, 유명한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고, 그간 쓰지 않은 용돈을 소모하며 돌아다녔다.

하녀와 친구처럼 붙어 다니는 귀족은 거의 없었기에, 애리얼의 행동은 주변인들의 눈길을 끌었다. 가끔 법도를 중시하는 귀족들의 따끔한 눈총이 쏟아지기도 했다.

그러나 애리얼도 카논도 개의치 않았다. 당사자가 즐거운데 주변 시선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아가씨 같은 고용주는 절대 없을 거예요. 지금 받는 임금이 반의반으로 깎인대도 전 아가씨 곁에 붙어 있을 거라고요.”

카논이 한 손에는 쇼핑백을, 한 손에는 아이스크림을 들고서 말했다.

애리얼은 기쁘게 웃으며 받아쳤다.

“나도. 카논의 임금이 두 배, 네 배가 되더라도 데리고 있을래.”

“아가씨, 그런 말씀 하시면 저 울어요.”

“네 배까지는 못 올려 주는데……. 울지 마.”

“두 배까지는 주시나 봐요?”

“십 년만 기다리면 자동으로 오를 거야.”

에두른 거절에 카논은 아하하 웃으며 녹아 흐물흐물해진 아이스크림을 콘과 함께 와작 씹어 먹었다.

그 모습에 애리얼은 오묘한 기분이 피어올랐다. 기쁜 듯 슬픈 듯, 구별할 수 없는 아련한 느낌.

제대로 친구라 부를 만한 이가 없는 애리얼에게는 카논의 존재가 더없이 소중했다. 늘 방 안에서만 지내던 과거부터 그녀의 곁에서 그녀를 신경 써 주던 그녀의 전담 하녀이자 유일한 친구.

‘이 세계를 떠나면 카논과도 다시는 만나지 못하겠지?’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애리얼은 웃다 말고 고개를 숙였다.

***

둘은 노을이 질 때쯤에 백작저에 도착했다.

우우우웅-

현관문에 발을 들이자마자 휴대폰이 진동했다.

애리얼은 누구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듯 빠르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카논도 그녀의 뒤에서 의아해하는 눈빛을 하고서 그녀를 따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윽고 둘의 시선은 한곳을 향했다.

왼쪽 복도 중간쯤에 있는 응접실에서 레이신이 나왔다. 대충이라도 땋고 다니던 그의 금발이 오늘은 길게 풀려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은 애리얼을 보고서 약간 온화해졌다.

“애리얼.”

“……서하.”

그의 등장에 애리얼이 고개를 숙였다. 카논은 무릎을 꿇었다.

이름을 부르며 다가온 그는 애리얼의 앞에서 뭔가를 발견하고는 묘하게 슬픈 표정을 지었다. 풀 죽은 것도 같고, 비 맞은 동물 같기도 한 얼굴이었다. 슬쩍 고개를 들고 그를 살핀 애리얼은 적잖이 당황했다.

‘대체 뭘 보고 저러는 거지.’

의문을 느끼고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의 두 눈은 카논이 든 선물 상자를 향해 있었다.

‘선물…… 때문인 건가?’

확신할 수는 없었다. 레이신도 렉시우스와 비슷하게 질투를 느끼는 건지도 몰랐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그가 왜 여기에 있는가.

“서하, 왜 여기에 계신가요?”

애리얼이 질문하자 그가 우울한 듯 가라앉았던 표정을 고쳤다.

“네가 아카데미에 없어서.”

“저를 찾으러 오신 건가요?”

“응.”

그의 대답은 명쾌하고 단순했다.

“아카데미에 없길래, 너 따라 나왔어.”

“아…… 휴학계를 냈거든요. 모르셨어요?”

“아니.”

“알고서 오신 거예요?”

“응. 넌 여기 있을 테니까.”

말투가 어딘지 모르게 의미심장했다.

원래도 레이신은 말을 희한하게 뚝뚝 끊어서 전하는 편이라 그렇게 들리는 건지도 몰랐다. 애리얼은 그냥 그러려니 했다. 레이신은 단순히 제가 보고 싶어서 이곳에 왔을 것이다. 늘 그랬던 것처럼, 다른 의도는 없으리라.

‘별일 없겠지.’

애리얼은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고 전한 뒤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동안 레이신은 애리얼의 뒷모습을 보다가 그녀의 하녀가 든 선물 상자를 쓱 훑고는 백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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