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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209)화 (197/264)

“뭔 짓을 했길래 애리얼이 휴학계까지 내고 도망을 가?”

스카이라의 신경질적인 말투에 렉시우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나 곧 생일이잖아. 상냥하게 좀 해 줘, 황자님.”

“생일은 얼어 죽을.”

스카이라는 말 한마디에 또박또박 적대감을 담았다. 렉시우스의 목에 걸린 초커에 눈을 흘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 목줄을 걸고 스스로 종이 되어 애리얼과 붙어 있을 거라며 온갖 서류를 처리하게 하더니 왜 혼자 아카데미로 돌아왔는가.

스카이라는 어젯밤 수리된 애리얼의 휴학을 오늘 아침에야 확인하고서 속이 뒤집혔다.

안 그래도 저를 피하는 애리얼이 아카데미까지도 오지 않는다니. 진작 보고를 올리지 않은 행정관을 연신 추궁하며 상황을 파악했다. 그리하여 오늘 제 집무실로 렉시우스를 부르기에 이르렀다.

의외로 흔쾌히 부름에 응한 렉시우스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계속 소파에 널브러지듯 앉아 있을 뿐이었다. 교복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주제에 오른쪽 귀에는 십자 모양 이어링을 달고 왼쪽 손목에는 벨벳 리본을 감고. 액세서리는 아주 착실히도 챙겼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차림이었다.

“정신이 나간 거야?”

“……아마도.”

웃기지도 않게 렉시우스는 그 사실을 인정했다.

스카이라는 황당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진짜 미친 건가. 만약 그런 거라면 애리얼에게 위협이 될 텐데, 새 저주를 걸어서 처리해 둬야 하나.

온갖 생각을 빠르게 굴려 가는 와중에 렉시우스는 아예 소파로 드러누워 버렸다. 백수 한량처럼 흐느적거리며 팔을 소파 밑으로 늘어트리고 눈을 감았다. 뻔뻔한 작태였다.

스카이라는 쯧 혀를 차며 소파 다리를 발로 찼다. 쿵, 소리가 나며 소파가 흔들렸다. 렉시우스가 가늘게 눈을 떠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황자님, 화나는 건 알겠는데 조금만 참아 줘.”

“언제까지 뭘 참아?”

“내 생일까지만 아무것도 하지 말고 참아 줄래.”

“뭐 하려고?”

“그냥…….”

렉시우스는 뭐라 입술을 움직이다가 이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열이 오른 스카이라가 소파 다리를 한 번 더 쾅 소리가 나게 찼다. 렉시우스는 큭큭 웃으며 눈을 떴다. 그 표정마저도 실성한 사람 같아서 괴상했다.

스카이라가 미간을 구겼다.

“한번 입을 열었으면 말을 끝마쳐.”

“아직 계획 중이라서……. 미안, 말할 게 없네.”

“병신.”

스카이라는 그의 얼굴에다 서류를 확 뿌리고는 방을 나가 버렸다.

그 행동은 렉시우스의 성질을 있는 대로 건드렸을 것이다. 그런데도 렉시우스는 잠잠했다. 진짜로 미쳐 버린 모양이었다.

스카이라는 그게 어떤 위협이 될지 계산했다. 값이 제대로 도출되지 않았다. 렉시우스가 저보다 먼저, 더 심하게 미쳐 버릴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

휘아킨은 퇴학당하지 않았다. 비밀이 까발려지는 일도 없었다. 여느 때처럼 블랑셰의 모습으로 위장을 한 채 방 안에 앉아 있었다.

그는 공허한 눈으로 다시 홀로 쓰게 된 기숙사 방을 둘러보았다. 예전에 쓰던 방이었다. 애리얼과 룸메이트로 함께했던…….

휘아킨은 긴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과거는 과거였다. 애리얼이 없는 방에는 아무 가치가 없었다.

그는 그대로 방을 나서려다가 문고리를 쥐고는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애리얼은 휴학계를 냈다고 했다. 어젯밤 아리앨라를 통해 들은 정보였다. 아리앨라는 황태자를 통해 들었을 것이다.

황태자는 아직도 그에게 계속 손을 내밀고 있는 거였다.

같이 하자고.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황태자는 온통 그녀와 관련된 정보를 뿌리면서 그를 유혹했다. 그가 전했던 대로 고개를 조금 낮추면서, 그의 무도함을 눈감아 주면서.

‘왜 하필 나한테 이러는 거지?’

휘아킨은 끊임없이 그런 의문을 가졌다. 그가 애리얼의 룸메이트로 꽤 친근한 사이였던 것은 분명하나, 그게 황태자가 이렇게 손을 내밀 메리트까지는 아니었다. 정확히 무슨 의도일까. 이토록 가늠하기 어려운 인간은 처음이었다.

휘아킨은 무표정한 얼굴로 문고리를 돌렸다. 문 앞에는 황성의 시녀가 서 있었다.

“무하 공자 서하.”

그가 나오길 기다렸다는 듯이 시녀가 멜로르 공녀님 따위가 아닌 진짜 존칭을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차는 어디에 있지?”

“현관 앞에 대기시켜 두었습니다. 사람도 모두 물려 두었습니다.”

“안내해.”

그가 명령하자 시녀가 앞장섰다.

오랜만에 받는 계급에 걸맞은 대우였다. 그러나 아주 유쾌하지는 않았다. 이것마저도 황태자가 놓은 덫 같아서 찝찝했다.

휘아킨은 느긋하게 발걸음을 움직이며 황태자의 화려한 이목구비를 떠올렸다.

향수로 포장된 극독 같은 인간.

그렇기에 더 알아보고 싶었다. 그가 적인지 아닌지.

***

세 시간을 기다린 끝에 황태자가 뻔뻔한 낯짝을 들이밀었다.

그는 바쁜 몸이니 당연히 늦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휘아킨은 그의 얼굴에다 찻잔을 집어 던지고 싶었다. 그 충동을 누르느라 이를 깨물었다. 그만 보면 이상하게도 날이 곤두서고 짜증이 치밀었다.

“미안해, 공자. 머저리들 때문에 회의가 길어졌어.”

황태자, 데본시아는 말을 고르지 않았다. 누구를 이야기하는지는 몰라도 조회에 참여할 정도면 꽤 높은 계급일 텐데, 황태자는 그들을 머저리라 칭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휘아킨은 그러려니 했다. 어차피 황태자가 저렇게 나온들, 그 누구도 절대 권력에 가까워지는 그를 건드릴 수 없었다.

“아닙니다, 전하.”

“오래 기다리게 했으니 상투적인 안부도 거슬릴 테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까?”

데본시아는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보였다. 소파에 앉아 손을 뒤로 내민 그가 보좌관으로부터 뭔가를 넘겨받았다. 흑단으로 만든 손바닥만 한 크기의 상자.

데본시아의 손에 있던 상자는 이윽고 테이블로 올라와 휘아킨의 앞으로 밀어졌다.

“공자는 마저증이잖아.”

“……네, 그렇죠.”

휘아킨은 무표정한 얼굴로 눈썹만 치켰다.

그의 반응에 데본시아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안심해. 내 주변인들은 입이 무거워.”

“별로 신경 안 써요. 이미 아는 사람들도 많아서.”

“그래? 처리해 줄까?”

데본시아가 다리를 꼬고서 무릎 위에 깍지 낀 손을 올렸다. 말투는 평온했다. 그래서 휘아킨은 그가 입막음 정도를 하려는 건 줄 알았다.

“됐어요. 이미 그치들의 머릿속에 들어가 있는데, 입만 막는다고 해결되나요.”

“죽일 때 머리를 으깨라고 할게. 그러면 뭐가 들어 있었는지도 모를 거야.”

점심으로 먹을 감자를 으깨게 하겠다는 소리로 들릴 만큼 온화한 음성이었다.

휘아킨은 황당함을 감추며 데본시아를 지그시 응시했다. 우아한 미소를 머금은 황태자의 얼굴은 살인을 말하면서도 아무런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설마 선의로 건넨 말인가. 아니면 그냥 장난인가. 어느 쪽이어도 유쾌하진 않은 소리였다.

“됐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도 본론은 아닌 듯한데요.”

“아, 미안. 말이 샜네.”

그러면서 데본시아는 검은 상자를 눈짓했다.

휘아킨의 눈이 상자로 향했다. 팔찌 정도가 들어갈 듯한 크기였다.

“뭔가요.”

“뇌물.”

“비싼 건가요?”

“글쎄, 값을 생각해 본 적은 없어서. 얼마나 나갈지 모르겠네. 유용하긴 할 거야.”

“이거 받고 같이하자, 이런 건가요.”

휘아킨이 무감정한 얼굴로 상자를 집어 들며 말했다. 뭐길래 저러나. 상자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하는 동작에는 그 어떤 열의도 없었다.

무신경한 손길에 흑단 나무 상자가 입을 벌렸다. 하얀 쿠션으로 채운 안쪽에 백금으로 된 반지 두 개가 나란히 들어 있었다. 아무 무늬도 없는 평반지(平半指)였다.

“모자라면 더 줄게. 돈이나 땅이야 공자에겐 별 매력도 없을 테고, 어지간한 건 다 있잖아.”

“이건 저한테 없는 거라는 소리군요. 마도구인가요?”

“그렇지.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

“무슨 기능인지 몰라서 좋아하기 어려운데요.”

“내 마력을 공유하는 장치야.”

상자를 기울이며 반지를 대충 훑어보던 휘아킨의 움직임이 멎었다.

“뭐라고요?”

“자주 쓰는 손의 검지와 약지에 끼면 돼. 마력이나 마법 쓰는 이론은 알 테고, 익숙해지기만 하면 고위 마법도 다루게 될 거야. 공자는 재능이 있으니까 어쩌면 신성 마법도 쓸 수 있을지 모르지.”

끔찍이도 달콤하게 들리는 유혹이었다.

황태자의 마력. 신성 마법사의 마력. 그걸 쓸 수 있다고.

휘아킨은 의심이 어린 눈으로 데본시아를 훑으며 반지를 꺼냈다. 데본시아는 마음대로 하라는 듯 빙그레 웃기만 했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면상이었다. 반달로 접힌 오드 아이를 주시하며 왼손 검지와 약지에 반지를 끼워 넣었다.

“왼손잡이였나?”

“아니요.”

데본시아의 물음에 휘아킨은 무심하게 대꾸했다.

“그러니까 오른손이 다치면 안 되잖아요.”

“나를 조금도 신뢰…….”

콰앙!

데본시아가 말하는 도중에 굉음이 울렸다. 폭발이라도 일어난 듯 열기가 일어나고 불길이 치솟았다.

“……하지 않는구나.”

그가 휘아킨이 날린 공격술을 순식간에 지워 버리며 못다 한 말을 이었다. 급작스럽게 공격을 당했음에도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면서 휘아킨은 만족스럽게 마주 웃었다.

“네. 하지만 이제 믿을게요.”

황태자의 마력을 쓸 수 있다는 건 진짜였고, 시험 삼아 날린 공격술의 위력은 가히 파괴적이었다. 그러니 이 마도구를 받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데본시아의 손짓에 불길이 빠르게 사그라졌다. 공격술 자체는 상시로 쳐 놓는 방어술에 막히고 남은 여파를 지워 버린 거였다. 휘아킨이 펼친 공격술의 위력이 이것보다 강했다면 위험했을 수도 있었다. 데본시아야 물론 다치지 않았겠지만 응접실이 부서질 수는 있었으니.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어서 주변에 있던 시녀와 호위들은 모두 어리벙벙한 표정이었다. 반응이 한참 느렸다. 불길의 열기가 가시고 나서야 그들은 혼비백산했다.

황태자의 손님이 황성에서 황태자를 공격했다.

응접실 안을 지키던 호위들이 뒤늦게 낯을 굳히고서 휘아킨에게 검을 겨눴다. 하얀 검날이 비슷한 색의 긴 머리칼을 지나 가녀린 목을 겨눴다. 조금만 움직여도 당장 잘라 버릴 수 있도록.

“물러나.”

데본시아가 명령했다. 기사들은 그의 말 한마디에 곧장 검을 거두고 물러났다. 휘아킨을 향해 고개까지 숙였다. 보통 기사도 정신을 주입받고서 황성 기사단이 되는 이들은 그러든 말든 휘아킨을 제압했을 텐데 말이다.

“길을 잘 들였나 보죠?”

“한 번에 알아들어야 편하거든.”

“철저하시네요.”

휘아킨은 건성으로 답하며 왼손에 꼈던 반지를 빼 오른손에 끼웠다.

“그래서 전 뭘 하면 되죠?”

“애리얼 허클리랑 계속 친하게 지내 줬으면 해.”

“……그게 무슨 뜻인가요?”

“애리얼은 날 꺼리거든. 나뿐만 아니라 스카이라, 렉시우스, 레이신, 모두 꺼릴 거야.”

황태자는 이상한 소리를 했다. 특정인을 콕 짚어서, 애리얼이 그들을 꺼릴 거라고 확언했다.

휘아킨은 그가 말하는 바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빠졌다. 표정은 무신경하게 유지했으나 목소리는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근데요? 전 안 꺼릴 거라는 의미인가요?”

“응. 너만은 예외겠지.”

“왜요? 이런 꼴이라서요?”

“그런 의미가 아니야.”

“…….”

“넌 실제로 다르니까…….”

황태자는 자꾸 의미심장한 소리를 흘렸다.

휘아킨은 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며 단도직입적으로 파고들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황태자가 자리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일정이 밀려 있어서 먼저 일어날게. 나중에 다시 연락하지. 용건이 있으면 공자 쪽에서 먼저 전화해도 좋아.”

“그럼,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휘아킨이 곧장 떠나려는 데본시아의 뒷모습에 대고 말을 꺼냈다. 데본시아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휘아킨이 말을 이었다.

“저는 타인의 마력에 예민해서, 익숙하지 않은 마력에 노출되면 멀미 같은 증세를 겪거든요. 그런데 황태자 전하의 마력은 조금도 메스껍지 않네요.”

“…….”

“이것도 마도구의 힘인가요?”

“그럴지도 모르지.”

데본시아는 적당히 대꾸하고서 응접실을 나갔다.

휘아킨은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황태자는 과연 적인가 아군인가. 끝까지 판단할 수 없었음에도, 그는 황태자의 손을 잡고 말았다.

‘위험하네.’

휘아킨은 오른손에 끼워진 반지를 느리게 문지르며 생각했다. 상대방의 페이스에 완전히 말려들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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